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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진평)

진평(陳平)의 "태도"

by 중은우시 2015. 2. 24.

글: 독서삼매(讀書三昧)

 

진평의 "태도"는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이다. 진평이 유방에 투신한 후, 금방 유방의 인정을 받고 중용된다. 유방의 수하중 "오래된 사람들" 경력이 비교적 많은 주발과 관영같은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고, 마음 속으로 질투를 한다. 그리하여 유방의 앞에서 진평을 흉보는 말을 한다. 즉 그가 "형수를 훔쳤다(盜其嫂)"고 말한다. 즉 그의 작풍(作風)에 무제가 있다는 것이고,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사실인 것처럼.

 

젊었을 때, 진평의 집안은 빈곤했지만, 글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의 형인 진백(陳伯)은 동생에게 장래성이 있다고 보고, 집안의 일은 모두 혼자서 하고, 동생 진평은 스승을 따라 공부하는데 집중하게 해주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형의 이런 행동에 형수가 불쾌해 했고, 형수는 바가지를 긁었다. "이렇게 밥만 축내고 일은 하지 않는 시동생이라면 차라리 없는게 낫겠다"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가 긴장된다. 형인 진백은 화가나서 처를 버린다. 이것이 아마도 진평이 "도기수(盜其嫂)"했다는 유언비어가 나타난 바탕이 되었다. 기실, 이는 엄청난 중상모략이다. 진평의 형수가 버림받기 전에 진평의 키는 아주 컸지만 아직 소년이었다; 형수가 버림받은 후 진평도 자라서 처를 맞이한다. 그것도 현지의 부호집안의 손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에게 시집온 것이다. 부호는 손녀가 출가할 때 이렇게 당부한다: "형수를 시어머니처럼 모셔라(事嫂如母)". 즉 진평이 결혼할 때, 형인 진백은 이미 "매개이도(梅開二度)"하여 다시 결혼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호가 "사수여모'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진평의 이 형수는 앚 현혜(賢惠)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처럼 '색(色)'에 관련된 유언비어는 왕왕 말을 하면할수록 심해지게 된다. 진평은 이 문제에 관하여 한 마디도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진평의 총명한 점이다. 청나라사람 오견사(吳見思)는 이렇게 평가했다: "대장부가 광명정대한 흉금을 지니고 있으면, 원래 거리끼는 것이 없는 법이다. 소인과 말다툼을 하며, 악착같이 따질 필요는 없다"라고 하여 진평의 총명함을 언급했다.

 

"작풍문제"로는 진평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다시 유방에게 진평은 "반복난신(反復亂臣)", "수제장금(受諸將金)"했다고 말한다. 즉, 진평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 조진모초(朝秦暮楚)하고 반복무상(反復無常)하며, 염결봉공(廉潔奉公)할 수 없고, 유방의 뒤에서 자신의 일당을 끌어모으고, 소집단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도 아주 그럴 듯하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진평은 위(魏)로 갔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가서 초(楚)나라로 간다. 나중에 마음에 들지 않자, 다시 초에서 한왕에게 도망쳐와서 귀순한다. 여러 장수로부터 황금을 받았는데, 많이 준 사람에게는 좋은 직위를 주고, 적게 준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직위를 주었다. 진평은 실로 반복무상의 난신이다." 이 죄상은 실로 적지 않다. 만일 여색을 좋아한다는 것이라면 그래도 봐줄 만하다. 그러나, "충(忠)"과 "의(義)"는 입신의 근본이다. 주인을 배반하고, 소집단을 만든다는 것은 대역무도한 것이다.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면, 관료로서 어떻게 앞날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기암투명(棄暗投明)"이나 아니면 "삼심이의(三心二意)"이냐의 원칙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진평은 적시에 반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위왕을 모셨다. 그러나 위왕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나서 항왕을 모셨다. 항왕은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가 임용한 것은 항씨집안 사람이나 처의 형제였다. 설사 기모지사(奇謀之士)라 하더라도 기용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왕을 떠난 것이다. 나는 맨몸으로 도망쳐 나왔고, 쓸 돈도 없었다. 돈을 받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만일 나의 계획을 정말 받아들여주신다면, 대왕은 나를 써주십시오, 만일 받아들여주지 않으신다면 여러 장수들이 보내온 황금은 아직 있으니 내가 그것을 공금으로 내놓겠으니, 대왕께서는 제가 맨몸으로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를 보자. 연약하지도 강경하지도 않고(不軟不硬), 비굴하지도 않고 오만하지도 않다(不卑不亢). 유방에게 사정의 진상을 말했을 뿐아니라, 유언비어를 퍼트러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반격했다. 이 문제에서 진평의 태도는 확실히: 작은 일에는 눈을 감고, 큰 일은 확실히 처리한다, 원칙문제는 양보도 타협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혜제의 사후, 여태후는 여씨집안의 사람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 의견을 물었을 때, 당시 우승상이던 왕릉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평은 모른체 하며 넘어간다. 왕릉이 진평을 비난하며, 그가 유씨에데 받은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고, 여씨와 함께 더러운 짓을 한다고 통열하게 욕한다: "무슨 면복으로 고제(유방)를 지하에서 볼 것인가?" 그러나, 진평의 인욕부중(忍辱負重)을 누가 이해해 줄 것인가?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여태후가 여러 여씨를 왕으로 세울 때, 진평은 위청지(僞聽之)했다"  여기서 '위'자 한자는 진평이 여씨와 '동류합오(同流合汚)하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진평은 이퇴위진(以退爲進)한 것이다. 이렇게 여씨의 날카로운 칼끝을 피한 것이다. 사마천의 말을 빌리자면, "탈신어기중(脫身於其中)"이다. 즉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계책을 쓴 것이다. '여씨를 멸하고 유씨를 흥성시킬'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나중의 사실은 바로 이런 점을 증명한다.

 

그래서, 왕릉의 비난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유언비어에도, 진펑은 침묵했는데, 이는 그것을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모든 것을 증명할 것이며, 일체의 오해 심지어 욕도 모두 사실의 앞에서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마천의 진평에 대한 평가는 "정종묘(定宗廟), 이영명종(以榮名終), 칭현상(稱賢相), 기불선시선종재(豈不善始善終哉)" 태사공의 이 말을 진평에 대한 가장 좋은 개관정론(蓋棺定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