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한성(陳漢成)
이적의 충의는 본받을 만하지만, 그의 원활은 취할 게 못된다. 그가 원활하게된 것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고, 부득이하게 취한 보신의 방법이다.
<수당연의>에 서무공(徐茂公)은 계략을 써서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고, 앞 일을 귀신처럼 예측하여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기실, 서무공의 원형은 수당명장 이적이다. 이적의 원명은 서세적(徐世勣)이고, 자가 무공(懋公)이다. 그래서 민간전서레서는 그를 서무공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당에 투항한 후, 이연(李淵)은 그에게 이씨성을 내려서 성명이 이세적으로 바뀌게 된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한 정관연간에,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하여, '세(世)"자를 빼버려 '이적'이라 부르게 된다. 그의 개명의 역사만 보더라도 그의 일생이 평범하지 않았을 것임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이적은 농사를 짓는 것을 업으로 하는 지주집안에서 태어난다. 비록 집안은 부유했지만, 그는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10살때부터 강호의 호걸들과 교분을 맺고, 칼끝에 피를 묻히는 생활을 시작한다. 대업7년(611년), 적양(翟讓)이 와강채(瓦崗寨)에서 무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적은 거기에 투신하여 와강채의 맹장중 하나가 된다. 적양은 안목이 좁고 단견이어서,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와강채를 지키려고 할 뿐, 진취적인 생각은 없었다. 이적은 그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와강채는 고향에서 고향사람들과 있고, 사람들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약탈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형양(滎陽)은 조운의 요도를 장악하고 관선상선이 아주 많이 지나가니 그곳으로 주둔지를 옮긴다면 재물을 약탈하는데 더욱 손쉽고 장기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양은 이적의 건의를 따른다. 그러자 와강채는 재물이 늘어나고 병마도 많아지고 튼튼해진다. 나중에 이밀(李密)이 와강채에 들어와서 적양을 대체하여 새로운 두령이 된다. 적양은 그와 싸우다가 죽어버린다. 이적도 "칼에 베어져 목에 상처를 입는다." 이밀은 이적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그로 하여금 여양(黎陽)으로 나가서 지키게 한다. 명목상으로는 중요임무를 맡기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멀리한 것이다.
당나라 무덕원년(618년), 이밀은 북망산에서 왕세충에게 패배당하고, 잔여인원을 이끌고 이연에게 투항한다. 이때, 이적은 여양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와 양식창고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밀의 행방을 알고난 후, 장사(長史) 곽효각(郭孝恪)에게 말한다: "위공(魏公, 이밀)은 이미 당나라에 귀부했다. 현재 이곳의 사람들과 토지는 모두 위공의 것이니, 내가 이를 바치고 공을 내세울 수는 없다." 말을 마치고, 그는 그가 점유하고 있던 주,현의 호구조책을 곽효각을 시켜서 장안의 이밀에게 보낸다. 그리고 이밀로 하여금 이연에게 바치게 한 것이다. 이연은 이적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이밀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하자,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곽효각이 연유를 설명하자 이연은 탄식하며 말한다: "서세적은 덕을 배반하지 않고,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는구나. 실로 순수한 신하이다." 그리하여 이적을 여양총관에 임명하고 국성인 이씨성을 하사한다. 이적의 거동은 완전히 이연의 뜻에 들어맞았던 것이다. 군웅이 분쟁하고 있고, 천하가 아직 주인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이다.
얼마 후,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한 후 예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도망쳐서 당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 도중에 당군에 피살당한다. 이밀의 수급은 장안으로 보내어진다. 당고조 이연은 사람을 보내어 이적에게 보내주게 한다. 그리고 이밀의 모반죄상을 전한다.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했다가,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의 잘못때문에 그 댓가를 받은 것이다. 이밀의 반당행동을 이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연루될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밀의 수급을 보자, 옛 주인의 정을 떠올리며, 슬픈 나머지 대성통곡을 한다. 그후 이적은 이연에게 상소를 올려 이밀의 장례를 치뤄주기를 간청한다. 이연은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이밀의 시신을 보내준다. 이적은 군신의 예로 이밀을 안장한다. 장례날, 그는 와강군의 옛 부하들을 모아서 그를 하늘로 보낸다. 전군은 아래위로 소복을 입어 장면이 아주 감동적이었다. 이적의 이밀에 대한 태도와 장례식의 처리에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서 당나라조정의 칭찬을 받는다.
선웅신(單雄信)도 와강채의 맹장중 하나이다. 일찌기 와강채에서 의형제를 맺을 때 이적과 결의형제가 된다. 그는 적양의 오른팔이었다. 나중에 이밀에 귀부한다. 이밀이 당나라에 귀순한 후에는 선웅신이 왕세충에 투항한다. 이적은 당나라에 투항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각자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된다. 왕세충이 실패한 후, 선웅신은 당나라군대에 생포되고, 이치대로라면 처형을 당해야 했다. 이적은 급히 이세민에게 호소한다. 선웅신은 무예가 절륜하니, 조정에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관작을 내놓을테니 선웅신의 죄를 속(贖)해달라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넓은 것으로 이름난 이세민이 그 요청에 응락하지 않는다. 이적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선웅신은 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이적은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나는 여생을 형과 같이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나는 몸을 나라에 바쳤고, 현재 두 가지를 모두 이룰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만일 내가 죽으면 누가 형의 처자식을 돌보겠는가." 말을 마치고 팔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선웅신에게 먹게 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 살은 형을 따라 흙에 들어갈 것이다. 내가 예전에 한 맹세는 어기지 않는 것이다." 선웅신은 그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이적과 서로 손을 맞잡고 이별한다. 이런 감동적인 장면은 진실한 역사무대에서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다.
수나라말기, 군웅이 할거하고, 세상사는 변화무쌍했다. 인정은 뒤집어지기 일쑤였다. 이적은 초망에서 굴기하여, 옛 주인에 대하여는 충성을 다하고, 옛 친구에 대하여는 간담상조했다. "충의"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점이다. 이적이 대당정권에 귀부한 후, 점차 풀뿌리의 근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쟁터의 숙장에서 원로중신으로의 역할변신을 이룬다. 대당관료체제내에서 그는 잘 살아남는다. 여기서 그가 보여준 것은 성격에서 '원활'한 일면이다.
이적은 궁정파벌투쟁때 명철보신한다. 시종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양쪽을 관망하는 전략을 쓴다. 그의 정명한 점은 그가 황제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렸다는데 있다. 관건적인 순간에 가장 적합한 거동을 한다. 이적이 이세민을 따라 전투에 참가한 기간은 2년여이다. 이렇게 긴 기간동안 이세민은 여러번 이적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나 이적은 비록 이세민에 충성하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지만 진왕부의 핵심집단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이세민은 '현무문사변'이전에 일찌기 이적에게 의견을 물은 바 있다. 그러나 이적은 이씨형제의 권력투쟁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자신의 중립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에 대하여 이세민도 더 책망하지 않았다.
무덕9년(626년) 육월, 진왕 이세민이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한다. 팔월에는 이연을 퇴위하도록 핍박하고, 자신이 황위에 등극한다. 바로 당태종이 된다. 십월, 당태종은 공신들에게 크게 작위를 주는데, 이적을 5등으로 정한다. 43명의 명단 가운데 14위로 위치가 그다지 앞자리가 아니다. 이는 그가 '현무문사변'에 참가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태종말년, 궁정의 분쟁이 다시 일어난다. 정관17년(643년), 태자 이승건이 모반을 꾀하다가 쫓겨난다. 도대체 누구를 태자로 앉힐 것인지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온다. 하나는 위왕 이태(李泰)를 앉혀야 한다는 것으로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로는 시랑 잠문본, 황문시랑 유자가 있다. 또 다른 의견은 진왕 이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사도 장손무기, 저수량이 주도했다. 최종적으로 당태종은 이치를 태자로 삼는다. 이적은 비록 이치를 태자로 삼는 논의에는 참가하였지만 그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양파간의 투쟁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저 당태종이 어떻게 하는지만 보았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의 병이 깊어지고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게 돈다. 비록 후계자는 정했지만, 보정대신 장손무기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까봐 우려했다. 그리고 이적은 군대내의 원로이고 충성심이 강하며 산동의 서족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어서 가정배경이 장손무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이적이야 말로 장손무기를 상대하는데 둘도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당태종이 이치에게 말한다: "너는 이적에게 은혜를 내린 적이 없다. 내가 그를 지방으로 쫓아보낼테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다시 그에게 복야의 직을 주어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당태종은 따로 특별히 당부한다. 만일 이적이 명령을 듣지 않고, 배회관망하면 바로 죽이라고. 당태종이 이적을 좌천시킨 목적은 이치가즉위한 후 다시 이적을 발탁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이적이 이치에게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게 만들려 하였다.
이런 돌연한 조치는 이적의 정치적 지혜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가 잘 처리하면,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이고, 몸값은 올라간다. 만일 처리를 잘못하면, 살신지화를 당할 것이다.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적은 조서를 받은 후 집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바로 첩주로 부임한다. 이적은 당태종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같고, 그의 말년의 심리상태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같다.
당고종 이치는 즉위후에 한 첫번째 일이 바로 이적을 첩주도독에서 낙양자사로 불러들여 낙양을 지키게 한 것이다. 후에 다시 상서좌복야의 직위를 내린다. 이는 당태종 생전의 안배를 그대로 집행한 것이다. 보정대신 장손무기는 조정을 농단했다. 이적은 원래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와 충돌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복야직을 사임하겠다고 간청한다. 당고종은 신중한 고려를 거쳐 그의 청구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개의부동삼사신분으로 집정에 참가하게 한다.
영휘6년(655년), 당고종은 무측천을 황후로 책봉할 시기가 이미 성숙되었다고 보고, 태위 장손무기, 사공 이적, 상서좌복야 우지녕, 상서우복야 저수량 4명의 중신을 내전으로 불러서 이 일을 논의한다. 저수량은 미리 논의할 내용을 알아내서, 태위 장손무기는 황제의 외삼촌이고, 이적은 조정의 개국공신이므로, 황제에게 외삼촌과 공신에게 죄를 내렸다는 악명을 뒤집어 쓰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공로가 없지만 선제의 부탁을 받아서, 황제에게 포기하도록 권할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이적은 이 투쟁에 간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집으로 돌아가서 병을 핑계로 난감한 국면을 회피한다.
과연 당고종은 만나자마자 바로 얘기한다: "왕황후는 자식이 없고, 무소의는 자식이 있다. 짐은 무소의를 황후로 삼고자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수량이 즉시 말한다. "황후는 명문집안 출신으로, 선제가 폐하를 위하여 취해준 부인입니다. 선제가 임종때 일찌기 신의 손을 잡아끌고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며느리를 너에게 부탁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황후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는데, 어찌 가볍게 폐위시키겠습니까. 신은 페하의 선제의 유명에 어긋나는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고종은 그가 선제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아주 불쾌해 하며, 그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한다.
다음 날, 당고종은 다시 그들 4명을 불러서 상의한다. 이적은 여전히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다. 저수량은 다시 한번 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는 말한다: "폐하가 만일 반드시 황후를 세우려면 마땅히 명문집안의 딸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무씨는 선제를 모셨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다 아니다. 폐하는 어찌 천하인의 이목을 가리려 하십니까. 신이 폐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은 만번 죽어 마땅하지만, 선제의 유명을 어기지 않는다면 죽음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격동하여 홀(笏)을 대전계단에 놓고 두건을 푼 다음 바닥에 머리를 박아 머리에 피가 흘러나온다. 당고종은 저수량의 태도가 이렇게 완고한 것을 보자 대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를 끌어낸다.
두번의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에 앉히려는 논의에 이적은 모두 참가하지 않는다. 이는 당고종으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이적의 생각을 급히 알고자 한다. 그래서 당고종은 단독으로 이적을 만난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묻는다; "짐은 무소의를 황후로 세우고 싶은데, 저수량은 안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는 고명대신인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적은 일찌감치 장손무기등이 발호하고, 조정을 좌지우지하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노골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약간 웃으면서 가볍게 말한다: "그건 폐하의 집안일입니다. 어찌 외인에게 물으십니까?" 이 말은 아주 원활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노인들의 말에 신경쓰지 말고 황제는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해도 된다고 말한 것이다. 당고종은 마침내 중신가운데 자신을 지지하는 관건적인 1표를 얻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는 더 이상 반대파대신들이 뭐라고 하드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생각했던대로 진행해 버린다.
영휘6년 구월삼일, 당고종은 조서를 내려 저수량을 담주도독으로 좌천시킨다. 모든 반대파들은 입을 다문다. 십월십삼일, 조서를 내러 왕황후를 폐추시키고, 초숙비를 서인으로 한다. 십월십구일, 조서를 내려 무소의를 황후로 삼는다. 십일월 초하루, 장안 태극전에서 융중한 황후책봉의식을 거행한다. 이적은 책봉예사로 임명된다. 그는 황후의 새수(璽綬)를 무황후에게 바친다. 신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그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시한다.
669년, 이적은 사망한다. 향년 76세이다. 당고종은 조회를 7일간 파하며, 그를 소릉에 매장하도록 한다. 매장하는 날, 당고종은 높은 누각에 올라, 멀리 영구차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영구를 호송하게 보낸다. 실로 최대의 예를 갖추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적은 당고조, 당태종, 당고종의 세 황제를 모시면서 시종 고귀한 자리에 앉아서 향락을 누렸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그가 죽은지 15년만에 그의 손자 이경업(李敬業)이 거병하여 무측천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패배하여 자살한다. 화가 친족들에게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지 여러해가 지난 이적까지도 개관분시(開棺焚屍)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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