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만리(李萬里)
남경시위서기 양웨이저(楊衛澤)가 연초에 중기위(中紀委)에 끌려가서, 널리 주목을 끌었다. 관료가 몰락하는 것은 여러가지 요소가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의 몰락은 저우용캉(周永康)사건과 관련이 있는 외에, 난징 내지 장쑤 관료사회의 내투(내부투쟁)과도 관련이 있다.
이호상쟁(二虎相爭)
양웨이저가 낙마한 후, 그와 전 난징시장 지젠예(季建業)과의 갈등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갈등의 촛점중 지젠예가 추진한 183억위안의 자금을 투입한 우수오수분리처리공사를 적극추진했던 일이다. 기실, 하수도건설은 지금까지 부정부패가 심각한 분야였다. 지젠에는 2010년부터 이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2011년 난징에 온 양웨이저는 거기에서 분명한 이익을 얻지 못한다. 지젠예가 2013년 10월 낙마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난징시는 우수오수분리처리공사를 전면적으로 잠정중단한다고 선언한다.
지젠예가 낙마하기 전에 난징시위 '민주생활회'에서 '자아비판'한 주요내용은 바로 오수우수분리처리공사였다. 그는 연속 3번에나 '자아분석자료'를 제출했으나 모두 지젠예에 의하여 반려된다. 지젠예가 붙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 전화로 통지한 사람이 바로 양웨이저였다. 그는 그후 회의에서 말을 하면서 "가을하늘은 높고 공기는 시원하며, 하늘은 높고 구름은 없다. 정말 마음이 탁트이고 시원하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그때는 지젠예가 낙마한 후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같다.
난징에 있던 2년여의 시간외에, 양웨이저와 지젠예 두 사람은 관료생애에서 짧게 만난 적이 있었다. 양웨이저는 2001년초 쑤저우시위부서기, 시장을 맡고 있었고, 지젠예는 쑤저우 산하의 쿤산시위서기를 맡고 있었다. 얼마 후, 지젠예는 양저우시위부서기, 대리시장으로 발탁되어, 두 사람은 강남, 강북에서 성공을 거둔다.
두사람은 실제로 약간 닮은 점이 있다. 양웨이저가 쑤저우, 우시에서 대거 철거프로젝트를 벌이고, 지젠에도 양저우에서 대거 철거프로젝트를 벌인다. 양웨이저는 우시에서 우수오수분리처리공사를 추진한 바 있고, 지젠에도 난징에서 우수오수분리처리공사를 추진한 바 있다. 양웨이저는 비교적 '패도(覇道)'적이고, 지젠예도 아주 "표한(彪悍)"하다. 두 사람은 모두 '정치적업적에 대한 갈구'가 있고, '성에 대한 갈구'가 있다. 양웨이저의 정부는 최소한 우시 신구 선전부부장 위민얜이 포함되고, 지젠예의 정부에는 최소한 양저우시 완보국국장 진츄펀, 발개위부주임 저우빙등이 포함된다.
지젠예가 낙마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장인 까오더정(高德正)이 북경으로 옮겨와서, 시시때때로 중기위에 실명으로 양웨이저를 고발한다. 거기에는 그가 우시시위서기로 있는 기간동안 및 초기 장쑤성 고속도로건설지휘부에 있던 기간동안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후닝(상해-남경)고속도로는 1996년 2월 전체노선이 개통되고, 11월에 정식으로 차량이 통행하기 시작한다. 양웨이저는 그해 9월 장쑤성 교통청 규획처 처장에서 부청장으로 승진한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 고속도로에 관한 중대한 부정부패의 단서를 억지로 눌러버렸다고 한다. 확실히 양웨이저는 뒤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사를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승진한다. 그때 까오더정은 장쑤성 인대상위회 상무부주임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집요하게 중기위에 고발장을 내지는 않았다.
양웨이저, 지젠예의 '이호상쟁'은 먼저 '한쪽이 반드시 상처입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두 사람이 다 다친다(兩敗俱傷)". 그들은 중기위의 반부(반부정부패)중에서 내부투쟁을 벌이고, 중기위는 그들의 내부투쟁과정에서 반부를 진행한다. 이전의 중기위는 적지 않은 대형사건을 눌러두었고, 적지 않은 고관을 봐주었다. 왕치산시대에 이르러, 중기위는 일부 대형사건을 더 이상 억눌러두지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번의 양웨이저사건이 그렇다. 다만 현재까지 다른 대형사건에 대하여도 그러할지는 확인할 수 없다.
난통방(南通幇)
지진예는 사위방(女婿幇)이다. 양웨이저도 전해지는 바로는 마찬가지이다. 지젠예의 장인은 까오더정이고, 양웨이저의 장모(혹은 양장모)는 구슈롄(顧秀蓮)이라고 하나, 아직까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구슈롄은 장쑤 난통 사람이고, 1982년에서 1989년까지 장쑤성 부서기, 성장을 지낸다. 양웨이저의 조적(祖籍)은 창저우(常州)이나, 난통에서 출생하고 자랐다. 장수정계에는 '난통방'이라는 말이 있는데, 과거 장쑤성의 주요지도자 천환여우(陳煥友), 지윈스(季允石)는 모두 난통 사람이다. 중앙에서 일하는 난통사람도 약간 있다. 류얜동(劉延東), 차오젠밍(曹建明), 딩쉐샹(丁薛祥), 장즈쥔(張志軍)등이 있다.
양웨이저는 일찌기 고속승진한 바 있다. 1994년에서 1998년까지의 기간동안 그는 장쑤성 교통청의 처장에서 청장까지 승진한다. 이는 아주 인기있고 돈되는 자리였다. 천환여우는 이 기간동안 장쑤성위서기였고, 지윈스는 장쑤성위상위, 상무부성장이었다. 양웨이저의 남다른 발탁은 분명 천환여우, 지윈스와 중요한 관게가 있다.
우리는 양웨이저가 어떻게 파리에서 호랑이로 변신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더 높은 고관이 '양호위환(養虎爲患)"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아마도 더욱 큰 호랑이일 것이다. 이런 호랑이들 중에는 '난통방'의 호랑이들이 포함된다.
양웨이저의 부하중에도 난통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전 난징 젠예구위서기 펑야쥔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이 어떤 때는 고향사투리로 말한다고 한다. 양웨이저는 2011년 3월 난징시위서기가 된다. 펑야쥔은 같은 해 6월 젠예구위서기가 된다. 그 사이에는 3개월의 차이가 있다. 펑야쥔은 2014년 9월에 낙마하고, 양웨이저는 2015년 1월에 끌려간다. 그 기간은 4개월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부대로 언급할 일은 펑야쥔의 낙마와 지젠예의 검거는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외에 지젠예의 낙마로 양웨이저가 득죄(得罪)한 사람은 까오더정 한 사람만이 아니다. 장쑤 정계에서 쑤저우의 경제가 비교적 빨리 발전하여, 쑤저우 관리는 현지에서 출생한 관리를 포함하여 승진이 빨랐고, 세력이 적지 않다. "쑤저우방(蘇州幇)"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지젠예와 그의 전임 난징시장 장홍쿤(張宏坤)은 모두 쑤저우 장자강(張家港) 사람이다. 그리고 지젠예가 임직했던 현급시인 쿤산을 보면, 전후로 여러 시위서기는 장쑤의 지급시 시장으로 승진해 갔다. 만일 양웨이저가 일부 '쑤저우방'의 구성원들에게 적대시 당한다면 그의 관료로서의 앞날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양웨이저,지젠예 두 마리의 호랄이는 다시 한번 증거를 제공한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부패사회주의, 철거사회주의, 처가(妻家)사회주의, 허리띠사회주의, 그리고 방파사회주의라는 것을.
장도중인추(墻倒衆人推)
양웨이저가 낙마하기 전에, 그는 강제철거를 통해 민중의 실명고발을 불러왔다. 국내신문잡지, 방송등 전통매체에서는 전혀 보도를 하지 못했다. 그가 낙마하자마자, 매체는 즉시 우시의 항의방문시민을 인터뷰한다. 거기에는 철거로 3-5억위안의 손실을 입었다는 우자오정(吳兆禎)도 포함된다.
지젠예가 조사를 받을 때, 매체는 연속보도를 하나, 그와 양웨이저간의 갈등은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이는 바로 낙마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음에도. 양웨이저가 끌려간 후, 난징의 이 두 전직고관의 갈등은 수면위로 드러난다. 이때 공중은 비로소 지젠예사건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중국내의 전통매체는 단지 '장도중인추'의 역할만을 하는 것같다. 현직관리의 부패를 폭로하지는 못하고, 항의방문시민에게 '설중송탄(雪中送炭)'하지도 못한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신문통제는 우민정책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고, 그저 일부 부패관리를 보호할 뿐이다. 그들의 약행과 열적은 폭로되지 않는다. 양웨이저이건 지젠예이건, 모두 일찌기 이런 신문통제의 수익자였다. 그저 그들이 낙마한 후, 공중은 비로소 전통매체를 통하여 그들이 재직하던 기간동안의 여러가지 스캔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는 정부(情婦)가 도대체 누구인지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
실제로, 양웨이저이건 지젠예이건 모두 "변부변승(邊腐邊昇, 한편으로 부패하며 한편으로 승진하다)"했다. 그들의 승진과정은 모두 의문점이 있다. 이들 의문점은 원래 모두 중요한 뉴스가치가 있고, 아마도 다른 호랑이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엄격히 통제하는 전통매체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하여 깊이있게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대륙의 인터넷매체도 계속 정부의 감시통제하에 있었다. 다만 몇년동안 양웨이저에 관한 부정적인 뉴스가 수시로 출현했지만, 비교적 흩어져 있거나 심지어 겨우 한두마디에 불과했다. 그중 일부 '유언비어'같았던 것이 나중에는 '훨씬 앞서간 예언'이 되었다. 이것은 인터넷이야말로, 신문, 잡지, 방송, TV등 전통매체가 아니라, 중국현질문제를 더욱 전면적으로 연구하는 더욱 다양한 정보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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