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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민국시기 국도(國都)의 변천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유진수(劉振修)


민국시기는 중국역사상 전쟁이 빈번했던 시기이다. 국도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으니, 백성들의 생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고대왕조의 흥망성쇠는 모두 도성의 변천을 불러왔다. 그래서 진,당,송,원은 모두 도성이 다르다. 한 왕조가 건립된 후, 수도를 정하는 것은 '나라의 근본(國之本)"이고, 흥망성쇠에 관련된 최우선 대사였다. 일단 확정되면 일반적으로 다시 변동되지 않는다. 하상주 삼대에 빈번하게 천도한 것은 농업이 발달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봉건사회에 들어서면서, 국사변란 혹은 특수한 정치적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예를 들어, 진,송의 남천, 효문제의 낙양천도), 일반적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지 않는다. 다만 중국은 근대에 들어선 후, 민국시기정부의 도성은 빈번하게 바뀌어서 정말 제대로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민국시기 도성의 변천은 근대중국역사의 발전궤적과 창상거변(滄桑巨變)을 보여준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무창에서 발발한다. 수도를 북경으로 정한 청왕조는 순식간에 와해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남경이 임시정부소재지가 된다. 같은 해 2월 12일 청황제가 퇴위하고 청왕조가 멸망한다. 얼마후, 자산계급혁명파의 타협과 연약으로 원세개가 혁명의 과실을 따간다. 같은 해 3월 6일, 남경참의원은 정식으로 결정한다. 원세개가 북경에서 중화민국임시대총통에 취임하는데 동의하고 10월 임시정부는 북경으로 천도한다고. 이는 북양군벌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려는 꿈이 폭로된 후, 손중산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파는 민주공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련의 투쟁을 전개한다. 다만 2차혁명, 호국운동, 호법운동은 모두 결국 실패로 끝난다. 중국은 공화라는 명칭은 걸고 있었지만, 공화의 실질은 없었다. 1923년 3월 1일, 손중산은 광주에서 정식으로 육해군대원수 대본영을 성립한다. 이는 광주국민정부를 조직하는 기초가 되고, 조건을 만들어 준다. 국공합작이 실현되면서, 국민혁명운동이 일어나고,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국민정부가 광주에서 정식으로 성립된다. 도성 광주는 혁명의 중심이 된다. 북벌의 승리로 혁명세력은 주강유역에서 장강유역까지 확장된다. 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리고 국민혁명운동을 추진하는데 편리하기 위하여 무한(武漢)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다. 1926년 12월 13일, 무한임시중앙당정연석회의가 성립되고, 이는 국민정부가 이미 무한으로 옮겼음을 의미한다. 1927년 1월 1일 정식으로 무한에서 업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무창, 한구, 한양을 경조구(京兆區)로 한다. 그리고 무한이라는 이름으로 수도로 삼는다. 대혁명의 발전은 국민정부를 광주시기에서 무한시기로 접어들게 만든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공산당에 칼을 들어, 반혁명정변을 일으킨다. 그리고 4월 18일 남경에 또 다른 중앙정부, 즉 남경국민정부를 만들어, 무한국민정부와 대치한다. 이때, 중국에는 영한분열(寧漢分裂, 영은 남경, 한은 무한을 가리킴)의 정치적 국면이 나타난다. 무한국민정부를 대표하는 왕정위는 금방 우회전하여 '청공(淸共)'의 '7.15'반혁명정변을 일으킨다. 이는 요란하게 시작한 국민대혁명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때, 무한측의 반대, 계계(桂係)의 이반, 그리고 서주전투의 실패로 장개석은 곤경에 빠진다. 그는 한발 물러서는 길을 택하여 남경정부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8월 12일 남경을 떠나 상해로 가서, 하야를 선포한다. 9월 16일, 중앙특별위원회가 성립되고, 국민정부는 수도를 무한에서 남경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이로써 "영한합류(寧漢合流)"가 실현된다. 장개석은 영국,미국의 지지를 받은 후 다시 나와서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영한합류"는 국민당 일당독재정치의 건립을 알리는 표지이다.


1932년 "1.28"사변이 발발한다. 일분군이 대거 상해로 진격한다. 남경의 형세가 위급해진다. 국민정부는 천도를 논의하고, 어떤 사람은 서안으로 가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낙양으로 가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한구(漢口)로 가자고 한다. 최종적으로 낙양이 결정된다. 3월 6일, 국민정부 주석 임삼(林森), 행정원장 왕정위 등은 전용열차를 타고 개봉에서 낙양으로 간다. 당시의 천도는 명목상으로 지구항전을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도를 모조리 옮겨간 것이 아니라, 중심은 여전히 남경이었다.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중일관계가 완화되자, 11월 국민정부는 도성을 다시 남경으로 되돌린다.


1937년 "7.7"사변이 발발한다. 일본은 전면적인 중국침략을 시작한 것이다. 8월 13일 일본군은 상해로 진공하고, 국민당군대는 "송호회전"에서 패배한다. 12월 수도 남경이 함락된다. 이러한 혈우성풍가운데, 수도가 점령당하였지만, 국민정부는 투항하지 않고, 1938년 1월 11일, 국민정부기관은 모조리 남경에서 중경으로 옮겨간다. 다만 실제로 군사 및 외교부서는 무한에서 근무했고, 무한은 사실상 중국의 임시수도였다. 같은 해 7월, 이곳에서 거행된 사상유례없는 규모의 무한회전이 벌어진다. 10월 25일 무한이 함락된다. 중경은 이때부터 정식으로 중국항전시기의 배도(陪都)가 된다. 그후 중경은 중국정부에서 항전을 지휘하는 중심이 된다. 동시에 2차대전동맹국중국전구의 지휘중심이 된다. 중경은 항전시기 8년간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의 중심이 된다. 중경의 이름은 중화민족의 피비린내나는 항전의 위대한 승리와 함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항전에서 승리하고, 국민정부는 남경으로 돌아온다. "중국첩극일본(中國捷克日本, 남경중경성도(南京重慶成都)" 이 말은 절묘하게 당시 중국인들의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중국, 첩극- 체코 -, 일본은 나라이름이고, 남경, 중경, 성도는 도시 이름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중국이 일본을 이기고, 남경은 다시 수도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1946년 2월 5일, 장개석은 국민정부가 5월이전에 남경으로 환도하고, 중경은 영구히 중국의 배도가 된다고 선언한다. 장개석의 '금의환도'는 중국정국을 10년전 통치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환원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46년 5월 3일, 장개석부부는 남경으로 돌아온다. 5일, 남경에서 환도대전을 거행한다. 환도후 국민당은 정치를 백성에게 돌여주겠다고 선언한다. "훈정(訓政)을 끝내고, 헌정(憲政)을 시작한다". 다만 전면내전이 발동되면서 민주우동을 진압하는 것이 국민당환도후 가장 시급한 일이 된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연이어 패배하면서, 남경국민정부는 다시 비바람에 흔들리는 위태로운 처지가 된다. 회해전투후, 1949년 1월 19일, 남경정부 외교부는 각국대사관을 광주로 이전하라고 통지한다. 26일, 행정원 정무회의에서는 장소를 옮겨서 업무하겠다고 결정한다. 2월 1일, 중앙당부는 남경에서 광주로 옮겨간다. 5일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광주는 다시 국민정부의 수도가 된다. 그러나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해방군의 100만대군이 장강을 건너고, 강서에서 광동으로 진격한다. 광주는 위험해진다. 10월 13일, 국민정부의 도성은 다시 중경으로 간다. 그러나 얼마후, 국민당은 서남전투에서도 일패도지하고, 사천동부를 모조리 잃는다. 11월 22일, 다시 성도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40일내에 국민정부는 광주에서 중경, 중경에서 성도로 세번이나 수도를 바꾼 것이다. 빈전한 천도도 대륙에서의 패색을 구원하지 못했다. 1949년 12월 10일, 장개헉은 비감하게 대륙을 떠난다. 국민정부의 도성을 타이페이로 이전한 것이다. 이제 국민당은 대륙에서의 22년 통치가 철저히 무너졌다. 중국인민은 북경을 수도로 하는 신중국시대를 맞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