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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장벽미(蔣碧薇): 중국 정인절(情人節)을 제창한 기여자

by 중은우시 2014. 10. 2.

글: 장부걸(張溥杰)

 

현대사상 유명한 화가 서비홍(徐悲鴻)은 말그대로 하층출신이다. 서비홍은 출신이 한미하고 어려서부터 시공서화(詩工書畵)에 정통한 부친 서달장(徐達章)을 따라 서화를 배운다. 서씨일가의 장남으로서, 서달장이 40여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서비홍은 집안의 대들보가 된다.

 

1912년, 17세된 서비홍은 의흥(宜興)여자초급사범학교에서 그림교사가 된다. 다만, 서비홍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운명에 고개숙이지 않고 상해로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결심한다. 1916년, 그는 상해진단대학(나중에 복단대학에 합병됨)에 들어가서 프랑스어과에서 공부하면서 일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소묘를 배운다. 당시 장벽미의 무친은 상해진단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나중에 서비홍은 장벽미의 집을 자주 들르는 손님이 된다.

 

서비홍이 장벽미의 집에 갔을 때, 그녀 집안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서비홍은 용모가 영준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했다. 그리하여 장씨집안 사람들은 그를 좋아한다. 서비홍도 장씨집안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고 시간이 있으면 가서 식사를 하고 숙박도 했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보니 정이 생긴다. 서비홍과 장벽미는 각자의 마음 속에서 애정이 생겨난다.

 

바로 이 때, 서비홍의 처는 고향에서 병으로 죽고, 아들도 불행히 요절한다. 서비홍은 말그대로 홀아비가 되었다. 장벽미의 부친은 서비홍의 재주를 높이 평가했고, 그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리하여 암시를 품고 말한다: "내가 딸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자네에게 시집보냈을 텐데..."

 

당시 서비홍이 상해진단대학에 들어간 것은 프랑스유학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유학을 떠나기 전에, 서비홍은 장벽미를 생각한다. 그는 그녀와 함께 가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서비홍은 그녀가 거절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서비홍은 친구 한 명에게 장벽미에게 서비홍과 함께 프랑스에 갈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보게 한다. 장벽미는 흔쾌히 응락한다.

 

서비홍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자 아주 기뻐한다. 기쁜 나머지 서비홍은 수정반지를 한쌍 만들어 하나에는 '비홍'이라고 새기고, 다른 하나에는 '벽미'라고 새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이것이 내 미래 부인의 이름이다."

 

서비홍은 원래 프랑스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이어서, 1917년 5월 14ㅇㄹ에 서비홍은 18세의 장벽미를 데리고 일본 도쿄로 간다. 18세의 장벽미는 처음 집을 떠나 먼 길을 간 것이다. 그리고 잘 알지만 또한 낯선 남자와 함께 간 것이다. 이것은 장벽미가 여인으로서 대담한 용기를 지녔음을 말해준다.

 

일본에 도착한 후, 그들 둘은 가난하고 거처가 일정하지 않은 생활을 지낸다. 조그만치의 수입도 없었다. 그저 부쳐오는 돈에 의지하여 생활한다. 그리하여 몇개월 후, 그들은 부득이 낭패한 모습으로 상해로 돌아오고 만다. 귀국후, 서비홍은 그를 인정해주는 강유위를 찾아가서, 관비유학생의 자격을 얻으려 한다.

 

강유위는 흔쾌히 응락한다. 그의 제자에게 도와주도록 해준다. 그후 서비홍은 강유위의 큰제자가 써준 당시의 교육총장에게 보내는 서신을 받아낸다. 서신은 서비홍에게 관비유학생의 자격을 주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결국 서비홍의 출국유학문제는 해결되었다. 이것은 바로 옛말 그대로이다: 조정내에 사람이 있으면 일을 처리하기 쉽다.

 

1919년 3월, 1차세계대전이 끝난다. 서비홍은 장벽미를 데리고 프랑스로 간다. 거기서 정식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유럽유학기간동안 관비가 오다가 끊기고 하였다. 그리고 서비홍과 장벽미의 집에서도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주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다. 장벽미가 말한 것처럼, 9년동안 그들은 천신만고를 겪는다.

 

비록 온작 고생을 겪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주었다. 둘은 그 힘든 여정을 같이 겪으며 지낸다. 유학기간동안 그들은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데 그 중에는 장도번(張道藩), 유기문(劉紀文), 소순미(邵洵美)등이 있다. 그들은 상해의 '천마회'를 모방하여 '천구회(天狗會)'를 조직한다. 장벽미는 키가 크고, 용모가 단정하며, 피부가 하앴다. 그리고 그들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리하여 그는 말드대로 '압채부인(壓寨夫人)'이 된다.

 

장벽미는 이들 사이에서 뭇 별들 속의 달과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여신이었다. 1925년, 서비홍은 싱가포르로 돈을 구하러 간다. 장벽미는 '천구회'의 친구 장도번, 사강수(謝康壽), 소순미 등이 돌봐주어서, 서비홍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즐겁게 지낸다. 그들은 자주 함께 커피숍, 영화관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고, 춤을 췄다.

 

장벽미는 여신과도 같았다. 고귀한 기질은 금발벽안의 외국여인들과 비교해도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간이 흘자, 그들은 장벽미에게 점차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저 서비홍의 얼굴을 보아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나중에 장벽미와 수십년 애인관계를 유지한 장도번은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다만 당시에는 장도번도 그저 이 사랑을 가슴 속에 파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기실, 장벽미는 서비홍을 따르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과 혼약을 했었다. 다만, 서비홍때문에 그녀는 부모이 명과 혼약을 어겼던 것이다. 1927년, 서비홍과 함게 외국에서 10년간 떠돌던 장벽미는 자신이 이미 임신한 것을 알았다. 그녀와 서비홍은 둘 다 기뻐하며, 한가지 결정을 내린다. 귀국하여 사업을 전개하기로.

 

1927년 10월 1일, 장벽미는 혼자서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비홍은 이미 국내에 마련된 거처로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찌감치 암류가 용동(湧動)했다. 이년후, 장벽미는 서비홍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더 낳는다. 생각지도 못하게 서비홍은 이 딸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쩌다 울기라도 하면, 서비홍은 큰 소리로 혼내곤 했다.

 

이때의 서비홍은 국내에서 이미 아주 높은 명망을 얻었다. 그리고 수입도 적지 않은 좋은 직장을 얻었다. 1930년이 되자, 명성은 멀리까지 알려져서 생활에 걱정이 없었다. 그러자 서비홍은 딴 생각을 갖게 된다. 하루는 서비홍이 장벽미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자신은 학생 손운군(孫韻君)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남자는 정말 생활이 좋아지면 희신염구(喜新厭舊)하는 동물인가 보다. 당연히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식은 장벽미에게 있어서 청천벽력이었다.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눈앞의 이 예전에 동고동락하고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현재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그를 따라 해외를 떠돌고 그를 따라 천신만고를 겪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차갑게 말하게 될 줄을.

 

서비홍이 보기에, 집안에 밥해주는 사람도 있고, 바깥에는 예쁜 애인도 있다. 그저 양쪽 다 문제를 삼지만 않는다면 이렇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서비홍의 이런 일방적인 생각은 깨져버린다. 아마도 손운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장벽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장벽미는 여류이지만, 그녀는 어쨌든 외국에서 그렇게 여러 해를 살았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한 생활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녀는 신시대의 여성이다. 그녀는 절대로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같이 나눠가질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혼인에서 남녀평등의 권리를 원했지 명목상의 부부를 원하지 않았다. 장벽미의 태도는 아주 간단했다. 손운군과 헤어지든지, 아니면 그녀 장벽미와 이혼하자는 것이다.

 

다만 서비홍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명목상의 부부로 지내기를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손운군과의 관계도 단절하려 하지 않았다. 1933년, 서비홍과 장벽미는 유럽으로 순회전시회에 참가한다. 장벽미는 이번 출국의 기회를 빌어 그녀와 서비홍관의 금을 메워보려고 했다. 다만 서비홍은 여전히 막무가내였고, 두 사람은 결국 불쾌해져서 돌아온다.

 

국내에 돌아온 후, 서비홍은 즉시 손운군을 찾는다. 그리고 장벽미를 내버려둔다. 그후 서비홍은 손운군을 따라 그녀의 광서 고향집까지 간다. 1936년, 광서의 국면은 긴장된다. 장벽미는 서비홍을 찾아가서 관심을 나타낸다. 다만 서비홍은 그녀의 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벽미는 할 수 없이 혼자서 남경으로 우울하게 돌아와야 했다. 

 

남경으로 돌아온 후 장벽미는 생계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서비홍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서비홍이 없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장벽미는 일생에서 또 하나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바로 그녀를 십여년간 짝사랑해온 장도번이다. 장도번의 안배하에 장벽미는 중프우호회의 간사를 맡는다.

 

일찌기 유럽에 있을 때, 25살의 장도번은 첫눈에 젊고 예쁜 23살의 장벽미를 보고서, 마음이 흔들린다. 당시 서비홍은 그저 그림그리기에 바빴고, 장도번등 친구들이 적막하고 무료했던 장벽미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던 것이다.

 

1937년 7월,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다. 하루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서비홍이 돌연 집으로 돌아왔다. 다만 장벽미는 그를 일반 손님처럼 대한다. 서비홍은 장벽미에게 남경을 떠나 중경으로 가자고 권하나 장벽미는 원치 않는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권하자, 그녀는 비로소 193년 10월 6일 남경을 떠나 중경으로 간다. 자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장벽미 혼자서 해냈다. 왜냐하면 서비홍은 이미 먼저 광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후 서비홍은 한번 돌아온 적이 있다. 그러나 결국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그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이미 변했다. 더 이상 계속 살 수는 없다." 서비홍이 세번째로 집을 떠나자 장벽미는 철저히 절망한다.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장도번에게 쏟는다. 그리고 장도번의 도움으로 그녀는 몇 가지 일자리를 얻는다.

 

장벽미가 가장 곤란할 때, 장도번은 그녀를 세심하게 보살펴준다. 두 사람은 점점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남녀간의 관계를 돌파한 후, 두 사람은 자주 서신을 보내어 서로의 사랑을 표시한다.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한글자 한글자가 모두 정이었다.

 

나중에 장벽미는 제안한다. 음력 7월 7일, 즉 전설중의 견우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날을 중국의 정인절(발렌타인데이)로 정하자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막 봉건시대의 부자유스러운 혼인의 질곡에서 빠져나왔다. 우리는 자유를 노래한다. 사랑을 예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성한 애정에 약간의 찬란한 색채를 더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도 정인절을 갖다. 우리가 충심으로 사랑에 절을 하자. 나는 가장 이상적인 정인절이 날짜는 매년의 칠석이라고 본다."

 

장벽미는 확실히 탄복할 만한 여인이다. 여인의 몸으로 그 시대에 자신의 애정과 자유를 추구하는 가장 강한 목소리를 냈다. 나중에 장개석정권이 대륙에서 무너진 후, 장벽미는 장도번을 따라 대만으로 간다. 그녀의 자녀는 모두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각자 살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장도번 한 사람 뿐이었다.

 

1958년 연말, 장도번은 외국으로 나가서 자신의 처 소산(素珊)을 만나겠다고 말한다. 장벽미는 아무 말 없이 남양(동남아)으로 날아간다. 5개월후에 다시 대만으로 돌아온다. 장벽미는 장도번이 이미 처 소산과 딸 여련(麗蓮)을 맞이해 오고, 이사를 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친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장도번에게 장문의 서신을 하나 쓴다. 겉으로 보기에 유쾌한 이별이지만 실로 그녀의 내심은 눈물이 흘렀다. 서신의 마지막에 장벽미는 통크게 장도번을 위하여 축복했고, 그에게 자신은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장벽미는 장도번과 10년간 살았고, 그를 10년간 따르고, 공개된 정부로 10년간 지냈다. 말년이 되어 다시 이별을 한다. 정말 무슨 기분이 들었을까. 이별후에 장벽미는 집을 팔고, 이혼때 서비홍이 그녀에게 준 100폭의 그림을 꺼내서 경매한다. 바로 이 그림으로 장벽미는 그후 18년간 생활한다. 장벽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또 다른 기분이었을 것이다. 장도번과 헤어진 후 18년이 지난 1978년 장벽미는 사망한다. 향년 7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