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사황(秦四晃)
전국시대는 아주 기이하다. 말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혓바닥만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이 넘쳐났으며, 적수공권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이 적지 않았다. 소진, 장의, 순우곤(淳于髡)같은 자들이 모두 이런 유형에 속한다. <전국책>은 기실 각로의 혀와 이빨을 놀리는 사람들의 말을 모은 것이다. 조진모초(朝秦暮楚)는 바로 이런 고수들의 기본적인 인격을 나타낸다.
말잘하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나타난 것에 대한 공로는 제나라 군왕에게 돌려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그저 수주대토식으로 기다리거나 우연히 한 둘 거두어들인데 반하여, 제환공 전오(田午)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큰 돈을 들여서 아예 제나라의 도성 서성문인 직문(稷門)의 바깥에 대학을 설립한다. 이름은 "직하학궁(稷下學宮)"이다. 천하의 학자들을 끌어모아서 여기에서 학문을 교류하게 한다. 당연히 제왕의 진정한 목적은 천하의 이빨꾼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직하학궁은 명목상으로는 학술기구이지만, 실제로는 정책고문의 기능을 했다.
유명인사들이 구름처럼 이 곳으로 모여든다. 백가쟁명이 일어난다. 여기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후세의 공적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 당시의 이빨꾼들 중에서는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호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말재주를 지녔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천구병(天口騈)"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담천연(談天衍)"이다.
"천구병"은 본명이 전병(田騈)이며, "담천연"의 본명은 추연(鄒衍)이다.
"천구병"이 무슨 뜻인가? 전병이 그의 치국목민의 이론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를 않고 침을 튀기면서 얘기하는 기세는 마치 하늘의 일까지도 그가 다 처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전병이 얘기하는 것은 주로 도가학설이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바로 혀를 잘 놀려서 말을 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뜻을 세운 것이다. 전병은 말을 아주 잘 했지만, 그는 스스로 관직에 나가지는 않겠다고 선언한다. 관직은 실제 필요없었다. 전병은 그의 혓바닥을 가지고, 호화주택과 미녀들을 다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마침내 천구병이 상대를 만난다. 그날, 한 제나라의 후배가 전병을 만나자마자 바로 이렇게 말문을 연다: "후배가 듣기로 선배께서는 고담준론에 능하나 관직을 얻으려 하지는 않고 창생을 생각한다고 하더이다." 전병이 그 말을 듣고 얼굴에 득의만면한 기색을 드러내며 후배에게 반문한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는가?" 그러자 후배가 대답한다: "저는 우리 이웃집의 한 여자에게서 들었습니다." 전병은 그의 말을 듣고 의외라고 여긴다 그래서 바로 경계하며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후배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제 이웃에 사는 여자는 선생이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뜻을 세운 것처럼 평생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현재 아직 서른살도 되지 않았는데 자식을 7명이나 낳았답니다. 그녀는 확실히 시집을 가지는 않았지만, 시집간 여자보다 더 대단합니다. 같이 잠을 잔 남자가 부지기수이고, 낳은 자식만도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전병은 그의 말을 듣고 말 속에 뼈가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소매를 떨치고 떠나려 한다. 그러나 후배는 바로 따라오면서 그 뒷말을 잇는다; "선생은 확실히 현재까지 관직은 전혀 갖지 않았지만, 그러나 혓바닥 하나를 가지고 천종의 봉록을 받고, 노비가 백명이 넘으니, 표면적으로는 관직을 얻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관직을 얻은 것보다 더 대단하지 않습니까."
담천연도 천구병과 마찬가지로 별호에 "천(天)"이 있다. 천이라는 것은 말을 교묘하게 잘 한다. 그뿐아니라 그는 "하늘의 일을 말했다" 그는 천지간의 대사를 주로 연구하였다.
추연은 음양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이치를 연구하여, 괴이한 학설을 내놓았다(즉, 음양오행설). 학설은 신기하고 기세도 대단했다. 그의 말은 "굉대불경(宏大不經)"(사마천의 말)했다. 추연이 말하는 것은 대부분 너무 거대한 것이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사람들은 안개속을 헤매는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의 신기한 학설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많은 왕공귀족은 그의 말을 듣고 모두 놀라고 신기해 한다. 그래서 그에게 더 많이 배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더 자세한 말을 듣고 나면 비로소 발견한다. 추연이 말하는 것은 아예 실제로 집행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추연이 하늘의 일을 잘 말한다는 명성은 전혀 줄지 않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숭배했다.
제민왕은 황제를 칭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추연은 그를 위하여 아주 거대한 청사진을 만든다. 그리하여 제왕의 큰 총애를 받는다. 추연이 양나라에 가니 양혜왕이 친히 교외까지 와서 영접했다; 조나라에 가니, 평원군이 공경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안내할 정도였고, 자신의 소매로 그가 앉을 자리의 먼지를 털어줄 정도였다. 연나라에 갔을 때는 추연이 더욱 높은 규격의 대접을 받는다. 연소왕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면서 안내했다. 마치 초등학생이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추연의 가르침을 들었고, 특별히 그를 위하여 갈석궁을 만든다. 추연이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쓸 수 있도록.
후세에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사상언론의 자유가 있었다고. 그래서 제자백가의 학설이 흥성할 수 있었다고. 사마천은 여기에 대하여 약간은 귀찮게 느낄 정도였던 것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연과 제나라 직하학궁의 여러 사람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종 학설을 얘기하여 각 군주로부터 중용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도저히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역대이래로 말잘하는 사람들은 말못하는 사람들보다 잘 사는 법이다. 학문이 깊지만 말을 더듬었던 한비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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