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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당나라 "조공"외교의 진상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맹헌실(孟憲實)

 

영국과 미국은 근대이래 세계역사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두 개의 서방국가이다. 영미역사를 분석해보면, 하나의 중요한 외재적환경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다. 영국은 유럽대륙과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미국은 세계중요국가와 상대적으로 격리되어 있다. 이런 지리적 환경은 영미가 상응한 '명예로운 고립'정책을 제정하는데 기초가 되었고, 영미가 세계와 직면하였을 때 담담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고대세계는 문명고국을 기초로 하는 강대한 제국이 모두 유라시아대륙의 다른 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중국만이 장기간 세계의 동방에 고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세계문명의 기본국면이고 이 국면은 확실히 중화문명이 건강하게 발전하는데 유리했다.

 

고립된 중국은 문화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완전히 국제적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조성된 것이다. 다만 이것은 중국의 외교국면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정치적으로 중국은 간헐적으로 초원역량의 충격을 받아왔다. 이것은 중국문명의 통일성에 외재적인 조건을 제공해주었고, 중국외교의 중점을 북방, 서방을 위주로 하는 태세를 촉진한다. 고대해양은 격리성이 비교적 강하여, 한나라이후, 중국의 대외발전에서 기본적인 방향은 서방이었다. 비단길은 그리하여 중국외교노력의 화신이자 대표가 된다. 중국의 역외교류에 대한 바램은 한편으로 '만국내조(萬國來朝)'의 정치적 바램이고,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아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방에 형성된 '한자문화권'은 충분히 증명한다. 고대중국은 주변의 분화에 대한 공헌이 다방면에 걸치고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방사적이었다.

 

"자기중심"적인 외교국면

 

한나라 당나라때, 중국의 외교체제는 양호한 발전을 거둔다. 당나라의 '자기중심'적인 외교는 이미 상당히 성숙한다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는 모든 국가는 당나라에 의하여 자신이 외교체제 속에 편입되어야 했다. 그들의 상황은 서로 다르고, 당나라와의 관계도 서로 달랐다. 당나라의 관념에서, 중국은 천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사이(四夷)'가 중국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이'라는 관념의 유래는 아주 오래되었다. 당나라는 그저 옛날의 것을 답습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응하는 제도도 이에 맞추어야 했다. 예를 들어, "사방관(四方館)"은 바로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장소이고, 전체적인 틀을 갖춘 제도였다. 만일 사신이 오면, 전문적으로 접대하는 인원이 맞이하고, 방문하고 기록한다. 특히 내방국의 풍정, 제도등을 기록하고 당나라의 사관에 보존한다.

 

당나라의 외교체제중에서 각국과 교류하는데는 등급이 있었다. 이 등급은 당나라가 설정하고, 상응하게 접대하며, 등급에 따라 진행한다. 전문적인 외교부서를 당나라에서는 홍려시(鴻寺)라 불렀다. "사방의 오랑캐의 군장이 황제를 배알하러 오면, 그 등급을 구분하여 손님으로 대접한다." 홍려시의 장관은 홍려경이고 부장관은 소경이다. 이들은 사신업무도 맡는다. "만일 여러 번국의 우두머리에게 봉건예명을 내리면, 책봉을 받아 그 나라로 간다." 정치적 우두머리를 책봉하는 것은 중국황제(당나라때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 부름)의 권력이다. 홍려경등은 집행자이다. 즉 각국수뇌의 등극의식에 참가하여 중국황제의 정치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홍려시가 관할하는 전객서의 직책은 외빈접대이다. "무릇 조공, 연회, 송영등은 모두 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그 직무를 한다. 무릇 추장수령이 알현하고자 하면, 관에서는 예의로 모신다." 등급은 확실히 관건적인 요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3품이상은 제3등, 4품,5품이상은 제4등, 6품이하는 제5등에 준한다." 처음에 중국으로 오는 외국사신은 아마도 관직등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는 미리 안배한다. 즉 '관직품계가 없는 자의 경우 큰 추장 우두머리는 제4등으로 하고 작은 추장 우두머리는 제5등으로 한다." 등급이 다르면 대우도 다르다. 이것이 당시의 등급특색이다.

 

소위 품계라는 것은 당나라의 관리 품계이다. 직무, 장군호칭 및 작위등을 포함한다. 외국영수는 당나라의 관직을 받는다. 이것이 당시에 가장 보편적이고 쌍방이 공동으로 준수해야할 하나의 규칙이었다.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를 예로 들면, 그는 돌궐인인데, 동돌궐 내부의 관직은 "협필특근(夾畢特勤)"으로 병권이 없다. 여러번 당나라에 사신으로 왔는데, 당고조는 처음에 그를 "화순군왕(和順郡王)'에 봉한다. 정관4년(630년) 삼월, 당태종은 그를 "우무후대장군(右武侯大將軍), 화주도독(化州都督)"에 임명하고, 오월에는 다시 "회화군왕(懷化郡王)"으로 봉한다. 장군호칭은 정3품이고, 군왕품계는 종1품이다. 여러 책봉은 답습하는 성질이 있다. 예를 들어, 신라왕은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했고, 백제왕은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했으며, 고려왕은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했다. 당나라와 교류하는 각국은 대다수가 부속국으로 당나라에 칭신조공(稱臣朝貢)했고, 당나라에서 책봉하는 관직을 받았다. 이것도 그중이 하나의 내용이다. 사서에는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를 '외신(外臣)'이라 칭한다. 당나라가 외교업무를 주재하였고, 중국과 교류의 조건과 대우는 각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형식적인 평등교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공, 실질은 경제무역이다.

 

고대국가외교는 실력원칙이 적나라하고 선명하게 반영되며 전혀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고대에 페르시아제국에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만국내조의 부조(浮雕)는 설명한다. 국제관계의 실질은 불평등이 근본이다. 실력이 상당한 대국과의 사이에서 소국의 선택은 더욱 곤란하다. 부득이하게 양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서한시기에 흉노와 장기적으로 전쟁을 치를 때, 많은 주변소국은 조진모초했다. 누란왕은 한무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국은 대국의 사에에서 양쪽에 모두 부속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한무제의 동정과 이해를 받아낸다. 이것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래서 대국과 교류함에 있어서, 소국이 추구하는 것은 대국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기타의 실질적인 이익이었다. 조공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속국이 진공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로 주군과 신하의 관계가 분명하지만, 현재의 연구에 따르면, 조공은 기실 정치관계라기보다는 경제관게이다 그래서 학술계는 이를 '조공무역'이라고 칭한다.

 

당나라는 이런 조공무역에 대하여 독특한 언어로 묘사했다. 조공하는 측에 대하여 당나라는 '헌방물(獻方物)'이라고 했다. 명마, 전상(戰象), 사자등등 모구 구체적인 '방물'이다. 당나라에는 전문적인 규정이 있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서 처리하는지 명확한 절차와 방법을 규정해두었다. 만일 방물이 약물, 식물이면 당나라 변경에 들어오자마자, 변경의 주현이 검수, 포장, 봉인하고 다시 사신에게 건네준다. 그 후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정으로 보낸다. 이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연회를 베풀 것인지 말 것인지를 모두 조정의 지시에 따라 진행한다. 사신이 귀국(還藩)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상사(賞賜)를 내린다. 상사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 장소는 조당(朝堂)에서이고, 전객서의 관리가 사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수령한다. 그리고 사신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예절을 가르친다. 왜 '상사에는 각각 차이가 있다'고 하는가. 이전에 조공품에 대한 가치를 결정하고, 최후의 상사단게에서 그것을 반영한다. 황제의 상사는 근거가 있다. 진공방물의 가치에 따라 상사의 다과를 결정한다. 비록 거래라는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거래이다.

 

당나라의 황제는 외교사절에 대한 하사품으로 아무 것이나 다 쓰지는 않았다. 통상적으로는 방직품이다. 이것이 바로 '사물(賜物)'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러나, 사물은 내외의 구분이 있다. 만일 조정신하라면 '사물십단(賜物十段)'의 구체적인 내용은 견3필(四丈이 一匹이다), 포삼단(五丈이 一端이다), 면사둔(六兩이 1屯이다)이다. 만일 "사번객금채(賜藩客錦綵)"라면, '십단'은 '금1장, 능2필, 만3필, 금4둔'이 된다. 이를 보면 번객을 위하여 준비하는 하사물이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다. 당나라는 변경밖의 주민들과 호시(互市)를 열었다. 어떤 물품은 호시에서 거래할 수 없었다. 당나라의 <관시령>에 따르면, "금, 능, 라, 곡, 수, 직성, 유, 사견, 사포, 모우미, 진주, 금, 은, 철은 여러 번국과의 호시에서 거래하여 번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 같은 금릉등 사직품은 황제의 사물에도 있다. 그러나 호시에서 거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황은의 독특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공무역은 본질적으로 무역이다. 다만 어쨌든 심각한 정치적인 낙인을 남긴다. 그래서 정치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때, 회흘이 일찌기 당나라에서 난을 평정하는데 도움을 준 바 있다. 이것은 당나라후기 쌍방관계에 장기적인 문제를 가져온다. 회흘은 호시관계를 이용하여 대량의 마필을 당나라로 보내고, 이를 주면서 당나라의 비단을 가져간다. 이는 당나라에 거대한 재정압력을 가했다.

 

문화소프트웨어실력은 군사력보다 중요하다.

 

외교활동은 힘을 교환하는 의미가 있다. 저명한 장건의 서역에 사신으로 간 것은 원래 국제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흉노에 항거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비단길을 열게 되어 당시 세계의 주요문화구역간의 교통로를 연다. 그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중국문명이 서방에 수출되는데 모두 이 길을 통해서이다. 문화교류는 문화발전의 주요한 경로이다. 문화도 자주 외교활동의 일부분이 된다. 문명의 유사성은 쌍방의 호감을 촉진시킨다. 이것은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무제는 바로 장건의 소개에서 서역에 '행국(行國)'과 '성곽지국(城廓之國)'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후자는 중국과 문명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서야 서역에 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농후한 흥미를 나타낸다. 고대중국은 중국문화에 대하여 굳건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활동방면에서 문화요소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당나라의 중앙학부는 국학, 태학이다. 이곳에서 배우는 학생은 고관자제뿐이 아니라, 각국의 유학생도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창, 토번 여러 나라의 추장은 자제를 보내어 국학에 넣어주기를 청했다. 그리하여 국학의 안에는 팔천여명이 있었다. 국학의 흥성은 사상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당나라의 사서에는 신라, 발해등 국가에서 당나라조정에 중국서적을 요청한 이야기를 싣고 있다. 조선반도의 국가는 경전을 언급할 때면 자주 중국의 유가경전을 꼽는다. 개원19년(731), 당나라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아주 재미있다. 토번과 화친한 금성공주의 요청으로, 당현종은 관련부서에 <모시>, <예기>, <좌전>, <문선>을 각 1부씩 필사하여 금성공주에게 보내려고 준비시킨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신하 우휴열(于休烈)이 상소를 올려 반대한다. 이유는 <좌전>은 역사서이고, 여러가지 정치군사모략을 적고 있는데, 당나라와 토번은 자주 전쟁을 벌이다가 화해하곤 하는데, 이런 모략을 만일 토번이 쓴다면, 당나라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당현종은 재상들에게 토론하게 시킨다. 배광정은 우휴율의 견해에 반대했다. 우휴열은 사서중의 모략만 보았지, 서석의 도덕 즉 충신절의(忠信節義)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광정의 견해를 당현종은 지지하여, 전통경전을 토번으로 보낸다. 이 외교이야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정치지도자는 문화적인 자신감을 나타냈고, 이러한 자신감은 외교활동에서 아주 중요했다.

 

정관14년(640), 당태종은 고창국을 평정한다. 이 전투는 당태종의 외교사상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고창국왕은 지금의 신강 투루판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502년 국가(麴嘉)가 이 곳에 왕국을 건립하였고, 이미 백여년이 지났다. 남북조시대에 장수국가라 할 수 있다. 다만, 서돌궐이 분열된 이래, 당나라에 칭신하던 고창왕국은 서돌궐의 내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특히 고창을 장악한 서돌궐 욕곡설(欲谷設) 일파는 연이은 승리에 의지하여, 당태종의 조정을 눈아래 두지 않았다. 고창국은 서돌궐에게 좌지우지당하게 되었고, 당나라에도 공손하지 않게 된다. 당나라의 또 다른 속국인 언기(焉耆)를 공격하여 당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차단해 버린다. 그리고 당나라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 고창국의 이러한 거동에 대하여, 당나라가 병력을 일으켜 토벌하는 것은 명분에 맞았다. 다만 당태종은 그래도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낸다. 평화적인 해결의 가능성이 철저히 소멸된 후, 당왕조는 부득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고창국의 인구는 전국을 합쳐서 4만명이 되지 않는다. 당나라는 정관13년(639년)에 20만이상의 병력을 동원한다. 이뿐만 아니었다. 당나라가 고창을 토벌하면서, 서돌궐의 세력도 계산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군을 동원한 것이다. 최후의 수단을 취했지만, 자신없는 전쟁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요행에 기대어 돌궐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 고창국와의 전쟁을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고창왕 국문태는 전쟁전에 사망하고, 당나라대군이 국경을 밀고 들어오자, 고창국은 온나라가 장례를 치른다. 당나라의 지휘관 후군집은 잠시 고창국 수도를 공격하는 것을 보류하여, 고창국민이 안심하고 장례를 치르도록 해준다. 이렇게 대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의 서돌궐 주력은 이미 욕곡설이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고창국은 전쟁을 앞두고 서돌궐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고창국의 국왕인 국시는 금성(지금의 감숙성 난주) 사람이다. 고창국의 신민은 중원에서 간 한인이 많았다. 당나라와 서돌궐의 사이에서, 고창왕국의 내부에는 의견차이가 있어왔다. 고창국왕 국문태는 실용주의노선을 채택한다. 서돌궐과 협조하다가 결국 당나라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당한다. 고창국 내부의 인심은 문화적인 연유로 당나라와 전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전쟁전에 이런 동요가 유행한다: "고창병마여상설(高昌兵馬如霜雪), 한가병마여일월(漢家兵馬如日月), 일월조상설(日月照霜雪), 회수자소멸(回首自消滅)". 고창을 평정하자 당나라의 서역경영전략은 관철된다. 비단길의 동쪽노선은 다시 중국의 통제하에 들어온다.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고 부득이할 때 쓴다. 자주 무력을 써서는 안된다. 다만 무력이 없어서는 안된다. 통상적인 외교수단은 무역이고, 경제이다. 그리고 가장 환영받는 교류방식은 역시 문화이다.

 

고대중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평화적인 시간이 더욱 길었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적인 부와 제도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문화소프트웨어실력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렇게 외교활동에서 자주 대범하고, 이치에 맞고 이익을 얻는 양호한 상태에 놓인다. 외교는 국제적인 복잡한 관계가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중국은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원리를 숭상했다 그래서 일방적인 이익최대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이익최대화는 아마도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력은 이익의 기본점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실력에 호소하면 힘으로 사람을 누른다는 인상을 남긴다. 장기적으로 보면 자신의 더욱 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익은 국가에서 포기할 수 없는 추구이다. 그러나, 견리사의(見利思義)는 중국인의 근본 신조이다. 도덕적인 요청은 문화소프트웨어실력을 보여주는데 최대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결국, 국가간의 의견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역시 문화이다. 중국이 전통에 따르면 이를 "이문화지(以文化之)"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