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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송사

유영(柳永): 북송 가단(歌壇)의 "대부"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진사황(秦四晃)

 

 

 

어떤 사람은 백곡, 천곡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평범한 음악가이고, 어떤 사람은 단지 1곡만으로도 인기가 엄청나서 순식간에 스타 우상이 되곤 한다. 이 속에 숨은 비밀은 그다지 오묘할 것도 없다. 관건은 아주 대표적이고 후세에 전해질 노래가 있느냐는 것이다. 좋은 노래는 곡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도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음악의 꿈을 품은 선남선녀들이 아침저녁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대표곡을 만들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가?

 

듣자니, 홍콩,대만의 가요계에 몇몇 '대가급'의 인물에게 가사를 얻기만 하면 바로 하루아침에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점석성금(點石成金)의 인물이 북송때도 있었다. 그는 바로 사단(詞壇) 완약파(婉約派)이 대가 유영(柳永)이다. 그는 당시에 악공(樂工) 가기(歌妓)들에게 부르기 쉬운 가사를 제공하는데 공인된 고수였다. 무수한 가기들의 마음 속에 그는 불후의 '대부'였다.

 

재자사인(才子詞人), 자시백의경상(自是白衣卿相)

 

유영은 복건 무이산 사람이다. 본명은 유삼변(柳三變)이고, 집안에서 일곱째여서 사람들은 그를 유칠(柳七)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유영도 관직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부주의하게도 "인파부명(忍把浮名), 환료천짐저창(換了淺斟低唱)"(헛된 명성은 추구하지 않겠다. 차라리 술이나 맛보며 낮은 소리로 노래나 부르겠다)이라는 사를 써서 당조의 송인종 조정의 화를 돋군다. 네가 재주가 있다고 오만하여 우리 대송이 관직을 우습게 아는 것이냐. 그러면, "차거천짐저창(且去淺斟低唱), 하요부명(何要浮名)"(그러면 가서 술이나 맛보며 낮은 소리로 노래나 불러라. 헛된 명성은 필요없지 않느냐)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영은 관직에 오르려는 꿈이 막혀 버린다. 그는 스스로 자조섞인 말로 "봉지전사유삼변(奉旨塡詞柳三變,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를 짓는 유삼변)"이라고 하게 된다.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유영의 관료로서의 길은 막혔지만, 오히려 그의 사에 대한 창작에서는 성취를 얻는다. 관료로서의 실의는 사의 창작분야에서의 자신과 성취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랑스럽게 스스로 말한다: "재자사인(才子詞人), 자시백의경상(自是白衣卿相)". 자신은 "다재다예선사부(多才多藝善詞賦)", "의홍외취(倚紅偎翠)"의 풍류를 지녔다고. 그러니 관모를 쓴 당신들보다 못할 바가 없다고. 유영은 북송 제일의 전문 사인이 되고, 천고의 풍류재자라는 미명을 얻는다.

 

범유정수처(凡有井水處), 즉능가유사(卽能歌柳詞)

 

유영이 선택한 생활환경은 수색어외(秀色於外), 심산어내(心酸於內)의 연화항맥(煙花巷陌)이다. 번화만안(繁花滿眼), 연지군대(臙脂裙帶)의 사이에서 유영은 정감을 느끼고, 인생을 맛보며, 영감을 찾았다. 그는 스스로 '봉지전사유삼변'으로 성격규정한 후, 유영은 아예 일체의 공명은 포기하고, 스스로를 미녀들이 운집한 기관주루(妓館酒樓)에 들어가 융화하며, 전문적으로 민간의 새로운 목소리로 가사를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일시에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고, 좋은 작품이 연이어 나왔다. 가요계에서 대가로 인정받게 된다. 당시에 국가의 가장 높은 규격의 음악단체인 궁중교방이건 아니면 민간의 공연단체의 가수들이건, 모두 새로운 곡이 나올 때면, 앞다투어 '유영'에게 가사를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게 아니라, '유삼변'이 바로 흡인력을 지녔고, 매표수입을 보장한다. 그가 내놓은 가사는 입에 착 달라붙는다. 듣는 사람들은 무조건 추종하고, 팬들이 미친 듯이 클릭수를 올리게 된다.

 

유영의 사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이 현상은 한 가지를 설명해준다. 그 몇년동안 전국각지의 크고 작은 거리에서 모두 유영이 쓴 사로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없던 현상이 하나 나타났는데, 바로 "우물물이 있는 곳이면 유영의 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라는 대단한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겨울의 불꽃'보다 몇 배나 인기가 있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유영의 가요계에서의 '대부'라는 지위를 공고히 해주었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불원신선견(不願神仙見), 원식유칠면(願識柳七面)

 

송나라때 정사에 유영의 평생에 관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당시 무수한 가수들의 마음 속에서 '신'이었다. 경성 개봉에 젊은 가기들은 모두 유영과 한번 만나는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다. 유영이 쓴 사를 얻으면 스타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어라 쫓아다니는 목표가 된다. 명나라의 대재자 풍몽룡이 말한 바에 따르면, 한번은 가수미녀들 사이에 이런 말이 돌았다고 한다. "능라비단옷을 입기를 원치 않고, 유칠오빠를 만나고 싶다. 왕의 부름을 바라지 않고 유칠이 불러주기를 바란다. 황금천냥을 원하지 않고 유칠의 마음에 들기를 바란다. 신선을 만나기를 바라지 않고, 유칠의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유영은 무수한 가수들의 마음 속에 신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녀들이 앙모하는 재자, 소녀들이 꿈꾸던 그.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유영의 애정사에서 적지 않은 미녀들이 스스로 그의 품에 뛰어든 경우가 많다. 이름을 남긴 사람은 사옥영(謝玉英)이라는 여자 뿐이다. 유영이 강주(지금의 강서 구강)에 갔을 때 거기의 유명한 기녀 사옥영을 만난다. 그녀의 방에서 가장 잘보이는 자리에 유영이 쓴 <유칠신사>가 놓여 있었다. 이때 사옥영은 유칠의 이름을 앙모한지 오래 되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 꿈 속에 그리던 유영인줄 몰랐다. 유영이 신분을 밝히자, 그녀는 깜짝 놀라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유영도 그녀를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바로 사랑에 빠진다. 그후 사옥영은 손님을 받지 않고, 더이상 다른 남자를 받지 않는다. 당연히 문예계에서 이런 식의 사랑은 결국 노연분비(勞燕分飛)의 결과로 이어진다. 격정이 지난 후 둘은 헤어지고, 사옥영은 다시 손님을 받는다. 유영도 다시 다른 롯으로 심화문류(尋花問柳)하러 떠난다.

 

가소분분진신배(可笑紛紛縉紳輩), 연재불급중홍군(憐才不及衆紅裙)

 

유영은 일생동안 풍류를 즐기며 일생동안 가난하게 지낸다. 사의 명성은 널리 떨쳤지만, 항상 따스하게 먹고 자는 일로 고생을 했다. 그는 가기들과 놀고, 가기들을 동정하고 연민했으며 그녀들을 아주 존중했다. 그에게는 많은 가기팬들이 있었다. 그는 그녀들 사이에서 실컷 즐기고, 그녀들과 인생의 사랑과 한, 애정과 원한, 그리고 쓰고 맵고 시고 단 맛을 공유하고자 했다. 어떤 때는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사랑을 쏟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그의 <접연화(蝶戀花)>에 표현된 "그대를 위하여 사람이 초췌해졌다. 옷과 허리따가 모두 커졌지만 끝까지 후회는 없다"(허리띠와 옷이 커졌다는 것은 살이 빠졌다는 것). 이를 보면 남자는 여자와 함께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여러 가기들은 유칠을 신필성수로 여겼고, 친한 오빠로 여긴다. 풍류를 즐기면서도 가난했던 유영은 오십여세때 사망한다. 그에게는 자신을 매장할 돈도 없었다. 경성의 가기들이 기꺼이 돈을 내어 각자 일부분씩 부담하여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유영이 묻히는 그날 "그저 흰 옷만 볼 수 있었다. 전체 성의 기원에는 한 명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고, 애통해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일찌기 유칠을 깊이 사랑했던 사옥영은 유칠이 죽은 후 2달만에 슬픔이 지나쳐 병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유언으로 자신을 유칠의 묘 옆에 묻어달라고 했다. 매년 청명절이 되면, 기녀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유칠의 묘를 찾았다. 이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는데, "조유칠(弔柳七)"이라고 불렀다. 조유칠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유세명언>의 <중명희춘풍조유칠>이라는 시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낙유원상기여운(樂遊原上妓如雲)

진상풍류유칠분(盡上風流柳七墳)

가소분분진신배(可笑紛紛縉紳輩)

연재불급중홍군(憐才不及衆紅裙)

 

낙유원에 기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풍류를 즐긴 유칠의 묘로 올라간다.

신사라는 자들이 가소롭구나

인재를 아끼는데는 여자들만도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