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송사

명청문인들은 왜 이청조(李淸照)의 재혼을 극력 부정했는가?

by 중은우시 2010. 1. 24.

글: 정계진(丁啓陣)

 

남편 조명성(趙明誠)이 죽은 후, 이청조가 재혼하였다는 것은 송나라사람들의 저작에서 여러 군데 명시 또는 암시되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1.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鷄漫誌)>> 권2: "조(명성)이 죽은 후, (이청조)는 모씨와 재혼했다. 소송을 통하여 이혼했다."

 

2. 주욱(朱彧)의 <<평주가담(萍洲可談)>> 권중: "본조의 부녀자중 글을 하는 자는 이이안(李易安, 이청조)을 첫손으로 친다....그러나 마지막에 절개를 다하지는 못했고, 유랑하다가 죽었다."

 

3. 호자(胡仔)의 <<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 전집권60: 이안은 장여주(張汝舟)와 재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목했다. <<계사(啓事)>>와 기처후(綦處厚)가 말했다: "외이상유지만경(猥以桑楡之晩景), 배자장쾌지하재(配玆駔之下材)". 이말을 전하는 자는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4. 홍적(洪適)의 <<석예(釋隸)>>권26: "조군(조명성)은 후사가 없었다. 이씨도 개가했다"

 

5.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권21: "<<수옥집(漱玉集)>> 1권, 이안거사 이씨 청조가 쓴 것이다. 동무 조명성 덕보에 시집갔다. 말년에 절개를 크게 잃었다(晩歲頗失節)."

 

6.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係年要錄)>>권58: "우승봉랑감제군심계사 장여주는 아전(吏)에 속한다. 여주의 처 이씨는 그가 함부로 여러번 관직을 가졌다고 소송을 했다. 이씨는 격비(格非)의 딸로 가사에 능했고, 스스로 이안거사라고 호를 지었다."

 

7. 조언위(趙彦衛)의 <<운록만초(雲麓漫抄)>>권14에 기록된 이청조의 <<투내한기공숭찰계>>: "인이상유지만경, 배자장쾌지하재"

 

송나라 사람들의 저작에서, 우리는 아무도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명청 두 왕조에 이르면 상황이 바뀐다. 명나라때부터 사람들 중에서 이청조가 장여주에게 개가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청나라로 들어선 후에는 이의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서는, 이청조가 재혼한 적이 없다는 설에 찬동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고, 말투도 더욱 확정적으로 바뀐다. 거의 정설로 굳어져 버린다.

 

1. 명나라 사람 서발(徐[火勃])의 <<서씨필정>>권7: "<<<어은총화>>에서 말하기를 "조(명성)은 후사가 없고, 이씨는 다시 비류(非類)에게 개가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그의 <<계(啓)>>에서 '외이상유지만경, 배자장쾌지하재'라고 하였다. 이는 황망하여 믿기가 어렵다. 개가했다는 설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숙한 여인을 심하게 모함하는 말이다."

 

2. 청나라 진문술(陳文述)의 <<이도당시선>>외집권7 <<제차백규찬<이이안론>후>>: "이청조가 개가했다는 설은 의심이 있다. <운록만초>에 기록된 <투기처후계>는 호사가가 만든 것이다. 송나라사람의 소설일 뿐이고, 왕왕 현자의 이름을 더럽혔다. 일찌기 글을 써서 그 오점을 씻어주고 싶었으나 시간이 나지 않았었다. 오늘 백규가 쓴 글을 읽으니, 내 마음을 먼저 알아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정섭(兪正燮)의 <<계사류고. 이안거사사집>>: "그때  학식이 없는 자들이 이안을 조롱했다. 이안과 기학사계를 고치고, 장비경을 장여주로 하고, 옥호를 옥대로 하고, 관문서를 통하여 이안이 여주에게 개가했고, 나중에 소송이 끝나고, 다시 이혼하였다고 하며, 사건기록이 있다...나는 평소에 이안이 장여주에게 개가했다는 설을 몹시 싫어했다. 아아당이 새긴 <<금석록서>>는 정리로 판단하여 이안이 이런 일이 없다고 하였다...조언위, 호자, 이심전등은 시비를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후세인들도 이것을 정설로 알게 되었다."

 

4. 심도(沈濤)의 <<슬사총담>>권하: <<노학암필기>>...방옹은 "장여주처'로 칭하지 않고, '조명성처'로 칭한다. 이를 보면 이안이 개가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오형조(吳衡照)의 <<연자거사화>>권2: "이안거사가 장여주에게 개가하고 나중에 소송을 했다는 것은...반복하여 생각해보아도 이안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6. 황우금(黃友琴)의 <<규수정시집.서아우당중간<금석록>후>>: "이이안이 <금석록발>을 썼다. 당시 이미 나이 오십하고 둘이다. 국조의 아우 노공이 다시 책을 펴내니, 서문에서 그녀가 개가했을 리가 없고, 그것은 호사가들이 한 말이라고 했다. 수백년동안 뒤집어 있던 것이 마침내 명예회복되었다. 앞으로는 이안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7. 육심원(陸心源)의 <<의이당제발. <계사유고.이안사집>서후>>: "이이안이 개가했다는 것은 천고의 심한 모함이다."

 

8. 이자명(李慈銘)의 <<월만당을집.서육강보관찰<의이당제발>후>>: 장여주의 처 이씨는 혹은 원래 이안과 한 집안사람일텐데,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송을 통하여 이혼했다. 당시 이안의 재주를 시기하는 학사 진초재와 같은 사람이나, 이안에 의하여 조롱을 당한 장구성과 같은 자들이 이 일을 이안에게 뒤집어 씌웠다. 나는 이를 제대로 잡고자 한다. 유씨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고, 육씨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이제는 더이상 바뀔 수 없는 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이 어떠했는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기로 하겠다. 청나라때 학자들이 연이어서, 격정에 넘쳐서 이청조가 개가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왜 이처럼 이청조가 개가한 적이 없다고 극력 주장하였을까?

 

고찰과 사색을 거쳐서 필자는 아래와 같은 이유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명청시대의 도덕관념이 이전보다 훨씬 보수적이 되었다. 사람들은 부녀 특히 이청조와 같이 일정한 신분을 가진 여인이 재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청나라때 양소옥과 같은 사람처럼 "사실 개가는 성현이 금지한 것이 아니다"라고 넓은 흉금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더 맣은 사람들은 명나라사람 강지회와 같이 조명성과 함께 '재자가인, 천고절창'의 이청조가 남편이 죽은 후에 다름 사람과 재혼했다는 것에 대하여 참지못했다. 명나라사람 황부는 비록 이청조가 개가했다는 설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한마디 했다. 이는 청나라때 문인들이 이청조의 개가를 극력 부인한 속마음을 드러내주는 것일 것이다: "나는 이안을 위하여 탄식한다. 부친은 공헌을 세운 명신이고, 남편 명성은 관직이 군수에 올랐는데, 어찌 개가를 했단 말인가?"

 

둘째, 이청조의 사는 명청시기에 아주 인기를 끌었다. 비록 이청조의 시가재능은 그녀가 젋었을 때부터 이미 문단에서 선배들의 인정을 받았고, 송나라때부터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평가는 대체로 그저, "그녀는 송나라 부녀중 송사를 가장 잘 쓴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따. 예를 들어, 왕작의 <<벽계만지>>에도 '본조의 부녀중 문장재주로 제일이다", 주욱의 <<평주가담>>에서는 "본조 부녀중 글을 하는 사람은 이이안을 첫손 꼽는다" 그런데, 명청시대에 들어서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대다수는 이청조는 역사상 소수의 가장 우수한 사작자의 반열에 올린다. 어떤 사람은 이청조가 이후주의 후신이라고 했고, 혹자는 이욱, 이청조가 사인의 정종(正宗)이라고 했다.

 

셋째, 명청의 일부 성과를 거둔 문인들은 뛰어난 자를 질시하는 기풍을 아주 싫어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청조가 재혼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얘기하면서 모두 이런 추론을 내놓았다. 이청조가 재혼했다는 것은 그녀가 재주를 믿고 오만했으며, 일찌기 당시의 일부 문인들을 조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유정섭, 이자명의 견해는 모두 이러하다.

 

필자의 생각으로, 명청학자들이 이청조가 개가한 적이 없다고 극력 주장한 것은 '과학적인 탐색'의 요소가 약간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주관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이청조가 재혼하지 않았다고 하여야, 그들의 시대이익, 자신의 이익에 더욱 부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