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복녕객(福寧客)
양귀비는 <신당서>, <구당서>에 모두 전(傳)이 있다.
그녀는 719년에 태어났는데, 이 해는 그의 미래 남편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지 이미 7년째 되는 해이다. 아마 그 어느 누구도 그녀와 당현종 이융기가 부부로 맺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양옥환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환연받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의 모친은 그녀를 낳은 후 바로 죽는다. 그녀의 부친인 촉주사호 양현염은 얼마후 역시 우울하게 생을 마친다.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부모를 '극(克)'하게 되니, 양씨집안사람들은 아명이 옥환인 이 여자아이의 명이 나쁘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녀를 돌보고자 하지 않았다.
다행히 양옥환의 숙부로 당시 하남부에서 토조(土曹)를 맡고 있던 양현규(楊玄珪)가 나서서 어린 옥환을 거두어주어, 다행히 고아로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는 면하게 된다.
촉주에서 하남으로 간 것은 양옥환에게 다시 한번 부모의 정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돈다.
735년 12월, 양옥환이 시집을 간다. 그러나 남편은 이융기가 아니라 이융기의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였다. 이 해에 양옥환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수왕부에서,양옥환은 가무를 배우고, 음율에도 정통해서 아주 인기있는 여인이 된다.
순식간에 천보4년(754년)이 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이 해의 중화절(中和節, 음력 삼월 삼짓날), 장안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출하여 답청(踏靑)을 한다. 답청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활발한 사람은 아마도 평소에 문밖을 나갈 기회가 없었던 부녀들일 것이다. 두보의 시에 따르면, "삼월삼일천기신(三月三日天氣新), 장안수변다여인(長安水邊多麗人)"(삼월 삼일에는 하늘의 공기도 새로워진다. 장안의 물가에는 예쁜 여인들이 많이 모인다)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런 성황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이들 부녀들은 서로 아름다움을 뽑내고, 왕왕 답청을 온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게 된다.
이 해의 삼월 삼일에 당현종 이융기도 흥이 일어나 미복으로 갈아입고, 몇 몇의 내시들만 데리고, 장안성 바깥의 곡강(曲江) 가로 간다.
가면서 놀고, 놀면서 갔다. 돌연 당현종은 눈앞이 밝아지는 것을 느낀다. 일군의 여인들 중에 그는 돌연 절세가인을 본 것이다.
그는 바로 '침어낙안지용(沉魚落雁之容), 폐월수화지모(閉月羞花之貌)"를 지녔다는 양옥환이다. 당시의 사람은 시를 지어 이렇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태농의원숙차진(態濃意遠淑且眞), 기리세니골육균(肌理細膩骨肉勻)
소라의상조모춘(素羅衣裳照暮春), 축금공작은기린(蹙金孔雀銀麒麟)
두상하소유(頭上何所有)? 취미합엽수빈순(翠微合葉垂鬂脣)
배후하소견(背後何所見)? 주압요겁온칭신(珠壓腰衱穩稱身)
현종황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수행하던 고역사(高力士)는 얼마나 기민한 사람인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바로 어린 태감을 불러서, 그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즉시 알아오도록 시킨다.
어린 태감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일처리는 기민했다. 얼마 시간을 들이지 않아서 모든 것을 알아온다.
"뭐라고? 수왕비라고?" 고역사는 비록 일찌감치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 황제를 일께워주기 위하여 고의로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융기는 못들은 척 여전히 넋이 나간 것처럼 바라보는데 눈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고역사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탄식한다: "황상아, 황상. 세상의 여자는 수천수만이고, 궁중의 미려도 수천수만인데, 왜 하필이면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하필이면 자신의 며느리를 마음에 둔단 말인가?"
그러나 황상은 황상이다. 고역사는 태감일 뿐이다. 황상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그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현종때 확실히 현상(賢相)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요숭(姚崇), 송경(宋璟), 장가정(張嘉貞), 장열(張說), 이원굉(李元紘), 두섬(杜暹), 한휴(韓休), 장구령(張九齡) 등이 있었다. 다만 이들 현명한 재상들은 당시에 이미 죽을 사람은 죽고, 좌천될 사람들은 좌천되어, 현종을 보좌하고 있는 사람은 유명한 간상(奸相) 이임보(李林甫)였다.
이임보를 얘기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성어와 연결시킬 것이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천고에 전해지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
"지금 주상은 명주(明主)이다. 여러 신하들은 그의 말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쉴 틈이 없으니,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입장마(立仗馬, 궁문 바깥에 서 있는 의장용 말)를 보지 못했는가? 좋은 음식을 먹고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소리를 내면 바로 쫒아버린다. 쫒겨나고 나서 후회해도 늦는다."
당현종이 며느리를 가지겠다는 난륜의 생각을 알고도 이임보는 이를 말리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머리를 짜내어 그 길을 열어준다.
수천년간 형성된 윤리규범때문에 비록 천자의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융기는 감히 공공연히 며느리를 처로 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임보는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는 황제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묘계"를 얘기한다. 먼저 수왕비 양옥환을 출가(出家)시켜 여도사(女道士)로 만드는 것이다.
"신하들은 누구도 나서서 감히 이 일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임보는 아주 자신있게 말한다. "왜냐하면 신이 생각해낸 이 방법은 이미 옛날에 선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례인가?"
"측천순성황후(무측천)이 그 예입니다." 이임보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다. 그는 더더구나 어떤 말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한 마디만 하면 서로 뜻이 통하게 된다. 점도위지(點到爲止)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아마도 머리를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왕조의 큰 비밀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들 마음 속에 아주 위엄있는 무측천이, 일찌기 당태종 이세민과 당고종 이치 부자 2명을 모셨고, 그녀가 당고종의 측천순성황후가 된 것도 일종의 '곡선(曲線)'의 우회로를 거친 것이다. 먼처 출가하여 여승이 되어, 스스로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그 다음에 '다시 인간세상으로 환속하여' 부친의 법에서 아들의 며느리로 바뀐 것이다.
이임보가 이 일을 얘기한 것은 당연히 당나라 이씨황실의 상처를 건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 황상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씨황족의 가풍에 따르면 1대의 차이가 있더라도 부부로 맺어질 수 있다고. 그러나 하려면 형식을 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된다고. 당현종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확실히 이임보가 제안한 것보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큰 방침은 그렇게 정해진다.
745년 팔월, 당현종 이융기의 뜻에 따라. 수왕 이모의 비 양옥환는 스스로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고 법호를 태진(太眞)이라 한다.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융기는 그의 선조인 이치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배분의 여인을 사원으로 보낸다. 두 황제(이치, 이융기)가 서로 다른 점이라면, 이융기는 참을성에서 이치만 못했다는 것이다. 무측천이 출가한지 근 4년만에 이치는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이융기는 4개월도 기다리지 못하고 양옥환을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그녀를 환속시키고 자신과 '부부'로 맺어지는 것이다.
얼마후, 당현종은 친히 명을 내려 양옥환을 귀비로 삼는다. "궁중호위낭자(宮中呼爲娘子), 예수실동황후(禮數實同皇后)". 즉 대우는 황후와 같았다.
양옥환이 황귀비가 된 후에 양씨가족은 모조리 그 덕을 입는다.
현종은 명을 내려: 양옥환의 부친 양현염을 태위 제국공으로 추봉하고, 모친은 양국부인(凉國夫人)으로 추봉한다. 양옥환의 숙부 양현규는 광록경에 봉하고, 재종형(같은 조부의 당형) 양섬(楊銛)은 홍려경에, 양기(楊琦)는 시어사에, 족형 양쇠(楊釗)는 금오병조참군에 임명된다.
그리고, 양옥환의 큰언니는 한국부인(韓國夫人), 셋째언니는 괵국부인(虢國夫人), 여덟째언니는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한다.(큰언니, 셋째언니, 여덟째언니는 형제자매를 합친 순서이고, 자매는 이들 4명뿐이다)
양옥환과 동시대의 당나라대시인 두보는 시를 지어 양씨의 권세와 위세를 묘사한다:
취중운막초방친(就中雲幕椒房親), 사명대국괵여진(賜名大國虢與秦)
자치지봉출취부(紫馳之峰出翠釜), 수정지반행소린(水晶之盤行素麟)
서저염음구미하(犀箸厭飮久未下), 난도루절공분륜(鸞刀縷切空紛綸)
황문비공부동진(黃門飛鞚不動塵), 어주낙역송팔진(御廚絡繹送八珍)
소고애음감귀신(簫鼓哀吟感鬼神), 빈종잡묘실요진(賓從雜杳實要津)
후래안마하준순(後來鞍馬何逡巡), 당헌하마입금인(當軒下馬入錦茵)
양화설락복백평(楊花雪落覆白萍), 청조비거함홍건(靑鳥飛去銜紅巾)
자수가열세절륜(炙手可熱勢絶倫), 신막근전승상진(愼莫近前丞相嗔)
이때 양씨일가의 권세는 이미 등봉조극(登峰造極)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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