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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천고명장 곽자의(郭子儀)

by 중은우시 2014. 5. 30.

글: 철마빙하w(鐵馬氷河w)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중국역사상 저명한 대사건이다. 또한 당나라가 흥성에서 쇠망으로 돌아선 전환점이기도 하다. 다만, 날로 쇠약해지는 당왕조의 국운은 한 광고절금(曠古絶今), 역만광란(力挽狂瀾)의 영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바람에 왕조의 생명은 연장되었고, 형세가 급전직하하던 대당은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청사에 영명을 남긴 비범한 인물은 하늘에 뜬 밝은 달과도 같지, '안사의 난'의 호겁을 당해 날로 시들어가는 대당의 퇴폐적인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었다. 이 군자의 출혀는 마치 맑은 바람과도 같이 초발유속(超發流俗), 격탁양청(激濁揚淸)하며 오랫동안 쌓여 있던 혼탁과 오물을 여과해주는 것같았다. 역사에 이 사람은 말이 적지만, 마음씀씀이는 세심하며, 절세의 재능과 만복의 도략으로 무너지는 건물을 바로 일으켜 세우고, 온 힘을 다하여 천지를 바로잡았다. 이 사람은 바로 당덕종이 '상부(尙父)'라 칭한 천고명장, 곽자의 이다.

 

여하한 강대한 왕조도 모두 흥성하다가 쇠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일찌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위엄을 사방에 떨치던 당왕조도 이 무정한 역사의 철칙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밀복검의 권상 이임보, 양국충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며넛 조정을 어지럽혔고, 천보14년(755년) 11월 호장 안록산, 사사명은 그가 관할하는 탁주 범양에서 거병하여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당나라에 아주 큰 타격을 준 '안사의 난'이 이렇게 발발한 것이다. 당현종은 효장 곽자의를 위위경(衛尉卿)에 봉하고, 영무군태수(靈武郡太守)를 겸직시키며, 삭방절도사의 직도 맡게 하여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안사의 반군을 토벌하게 한다. 곽자의의 군대는 금방 반군이 점거한 운중, 동경등 십여개의 주군을 수복한다. 위기에 사명을 받아 떠난 곽자의는 초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어사대부에 봉해진다.

 

이광필(李光弼)도 당시에 이름을 날린지 오래된 호장(虎將)이다. 그는 용관삼군(勇冠三軍)하여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다만 그는 곽자의와 계속 불화했다. 그리하여 군중에서는 점점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 없다'는 소문이 퍼진다. 천보15년 반군이 공성에 연이어 성공하여 기세가 점점 더 올라간다. 일시에 천하가 뒤흔들리고 국면은 혼란하여 불안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사람을 써야할 때에 당현종은 좋은 장수를 곳곳에서 구한다, 하동,하북으로 보내어 적을 방어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수를 찾는다. 당현종은 곽자의에게 게책을 묻는다. 곽자의는 대국을 중시하고 넓은 흉금을 보이면서 자신과 계속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광필을 추천한다. 위난의 시기에, 곽자의는 이전의 갈등을 따지지 않고,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인재를 추천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곽자의는 흉금이 넓고 인품이 고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야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의롭다고 칭찬하고, 그는 당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천보15년 육월, 명장 가서한(哥舒翰)이 반군에게 패배한다. 장안의 문호(門戶)로 불리던 동관(潼關)을 함락당한다. 경성이 위급해지고, 인심이 흉흉해진다. 당현종은 사천으로 도망친다. 이것이 '명황행촉(明皇幸蜀)의 유래이다. 칠월, 당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하고 새로운 군주가 된다. 그러나 수하에 쓸만한 병력이 없었다. 그의 곁에선 사방에서 모아온 형편없는 장수와 궤멸된 병사들 뿐이었다. 이들은 군기도 없고, 의식도 부족했으며, 사기도 낮았다. 명실상부한 오합지졸이다. 장안, 낙양을 점령한 안사의 반군은 세력은 갈수록 커졌고, 기세는 갈수록 올라갔다. 이런 말까지 나온다. "창해횡류(滄海橫流) 경현여웅본색(更顯英雄本色)" 그리고 곽자의, 이광필이 나서서 거대한 물결의 끝에 우뚝 서서 팔을 한번 휘두르니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곧이어 군대를 이끌고 신황제를 모시러 간다. 대군이 영무에 도착하자, 인심이 흉흉하던 당제국의 임시수도는 사기가 올라가게 된다. 곽자의 휘하의 삭방군은 사람들이 보기에 장안,낙양을 수복할 중류지주(中流砥柱)이다. 곽자의, 이광필 두 사람의 군대의 충의로운 마음을 포상하기 위하여, 당덕종은 곽자의를 병부상서, 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하고, 이광필에게도 봉상을 내린다.

 

그 후, 곽자의는 삭방군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출격하여, 연전연승하며, 동관의 요지를 수복한다. 곧이어 포주, 영풍, 함양등의 실지를 회복하며 이어서 반군을 장안에서 몰아낸다. 안사의 반군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이리저리 도망다녔다. 이때부터 섬서의 경내에는 더 이상 안사 반군은 병졸하나 남지 않게 된다. 십월, 삭방군이 승기를 틈타 추격하여, 지금의 하남 섬현일대에서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의 부대를 대파한다.그리하여 안경서는 패잔병을 이끌고 황하를 넘어 안양으로 도망친다. 곽자의의 부대는 기세등등하게 대오를 지어 낙양에 진입한다. 낙양의 주민은 음식을 들고 길가에 서서 곽자의의 부대를 환영한다. 곽자의의 부대는 장안,낙양 두 수도를 수복하니, 이미 실망하고 기운이 빠져있던 대당제국에 강심제를 놓은 것과 같이, 크게 사기를 고무시켰으니 그 의미가 크다. 곽자의의 공로는 아주 커서 사도(司徒), 대국공(代國公)에 봉해지며 식읍 천호를 받는다.

 

두 수도를 수복한 후, 곽자의는 조정에 들어와 황은에 감사한다. 당숙종은 아주 높은 규격으로 그를 접대한다. 그리고 곽자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감탄하여 말한다: "비록 나의 국가이지만, 실은 경이 다시 만들었다." 이 말은 비록 격려하는 뜻이 있지만, 확실히 내심에서 나온 말이고, 실제상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거의 바로 이 때, 이광필의 부대는 망산에서 참패한다. 어조은 독사의 군대는 반군에게 섬주에서 궤멸당한다. 원래 좋았던 형세가 졸지에 역전된다. 나쁜 소식은 연이어 들려왔다. 하중군에는 변고가 일어나서 반란병이 총사령관 이국정을 죽인다; 한 파도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른 파도가 일어난다. 태원군도 군수물자문제로 반란을 일으킨다. 난군은 태원절도사를 죽인 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다. 일부분은 험난한 지형을 장악하고 관군에 대항한다. 당숙종은  이들 반란부대가 안사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우려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결과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누구를 보내어 다독이고 진압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인 장수들은 명망이 없어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노장 곽자의만이 명망이 있고 군심을 얻고 있어 '초항납반(招降納叛)'을 할 둘도 없는 후보이다. 그해 삼월, 곽자의는 강주로 가서 벽력같은 속도로 과감하게 하중군 총사령관 이국정을 죽인 주모자 왕원진등 십여명을 붙납아 처결한다. 한편으로 반란의 주모자만 처벌하겠고 다른 사람은 관련없다고 선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왕원진등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벌한다. 태원의 주장수인 장운경은 그 소식을 듣고 곽자의를 본받아 반란병의 괴수를 주살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군대의 질서는 신속히 회복된다. 이후, 여러 진의 관병들에게 군령이 먹히고, 군기가 잡히며, 다시 군대의 위력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보응원년(762년), 전패유리(顚沛流離)의 고초와 우환을 겪은 당숙종은 중풍으로 사망하고, 당대종이 즉위한다. 환관 정원진(程元振)은 옹립의 공을 내세워 당대종의 총애를 받아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원로중신들을 시기, 배척한다. 큰 공을 세운 노장 곽자의는 더더욱 경계했다. 그리하여 당대종에게 곽자의의 병권을 박탈하고, 장안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당숙종의 능침을 관리하는 업무만 전담하도록 주청한다. 그러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곽자의는 화를 내지도 않고 즉시 돌아가서 능묘를 관리하는 업무를 제대로 처리한다. 그리고 시기를 봐서 당숙종이 그에게 내린 20개의 밀지를 당대종에게 올려서, 자신에게는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만 있을 뿐, 사사로운 욕심은 없다는 것을 알렸다. 당대종은 그 밀지를 본 후에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는 곽자의에게 말한다: "짐이 부덕하고 불명하여, 대신에게 의심을 품었다. 이를 깊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가슴에 깊이 담아두지 말라." 그때 안록산은 이미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하고, 얼마후 안경서도 다시 사사명에게 살해당한다. 나중에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부친을 죽이고 직위를 찬탈하여 낙양에 자리잡고 연명을 한다. 조정은 옹왕 이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토벌군을 보낼때, 당대종은 다시 곽자의를 기용할 준비를 한다. 그래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곽자의를 부사령관으로 이적을 보좌하게하려 한다. 이때 환관 어조은, 정원진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고,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었는데, 고의로 방해하여, 이 일은 실현되지 못한다. 보응2년, 조정은 회흘병의 힘을 빌어 반란을 진압하면서 사조의의 군대가 패배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고, 7년 2개월간에 걸친 '안사의 난'은 종결된다.

 

'안사의 난'이 비록 평정되었지만, 번진할거의 국면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대당의 이후 장치구안에는 꼬리가 잘리지 않고 숨은 화근이 되어 남아 있게 된다.

 

편안하게 생활한지 얼마 지나지 않다 돌연 토번군이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적병은 파죽지세로 밀려왔고, 경주를 함락한 후, 경기의 중지로 깊이 들어와서 건주, 무공 일대까지 쳤다. 장안과는 지척의 거리여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가 된다. 토번군은 살인방화등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질렀다. '안사의 난'을 겪고 나서 아직 회복도 되기 전에 관중대지는 다시 전쟁에 휩싸이고 경사가 진동한다. 사람들은 불안에 빠진다. 당대종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다시 낯짝 두껍게도 숙장 곽자의를 다시 기용한다. 지난번의 파직으로 삭방군내에 괜찮은 장수들은 거의 사라졌다. 겨우 20여명의 옛 부하를 다시 찾아왔을 뿐이고, 전마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농부들이 밭을 가는데 쓰는 말을 빌려와서 대체한다. 곽자의는 그러나 한 마디도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곤란을 극복하고, 부하를 이끌고 주야로 달려가서,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으며 함양으로 가서 군대를 지휘하여 적을 막아낸다. 토번군은 이미 위수를 건너 장안을 점거했다. 대당의 국도가 두번이나 함락된 것이다. 당당한 13왕조의 고도가 다시 한번 부서진 기왓장과 벽돌만 가득했다. 나라의 형편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할 말을 잃는다. 당대종은 여러 신하를 이끌고 하남 섬현으로 피난간다. 다시 한번 황제가 '임행'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나라의 대군이 몰려오자, 토번군의 총사령관은 종실의 이승굉(李承宏)을 괴뢰황제로 내세운다. 일시에, 천하에는 두 황제가 병립하여 나누어 다스리는 형국이 벌어진다. 그후 토번군은 한바탕 약탈하고난 다음 스스로 물러난다.

 

토번군이 물러난 후, 문무대신들은 태감 정원진이 임금을 속이고 일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정원지는 불안하여 감히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당대종을 끼고 낙양으로 천도한다. 곽자의는 글을 올려 당대종에게 장안으로 천도하여 천하를 안정시킬 것을 주청한다. 보응2년 십일월 당대종이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특별히 곽자의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러 공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 능연각에 걸어두어 그의 충의호국의 장거를 표창한다.

 

토번의 난이 평정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764년 반장 복고회사(僕固懷思)는 다시 토번, 회흘, 당항, 거란, 강, 혼의 연합군과 결탁하여 수십만을 이끌고 남하한다. 대당은 다시 위기에 처한다. 나라는 누란의 위기였다. 곽자의는 이때도 마다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그는 천생 장수이다. 적을 대할 때는 용맹하며, 군대를 배치하는데 뛰어났으며, 명령이 분명했고,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각족의 연합군은 당나라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며, 군대의 모습이 엄정하고, 갑옷이 반짝이며, 사기가 충천해 있으며, 총사령관이 그 이름도 유명한 곽자의라는 것을 알게 되자 싸워봐야 재미가 없다고 여기고 스스로 물러간다. 그 후, 적의 수령은 여러 번 군대를 이끌고 침범했으나 모두 곽자의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이기는' 방식으로 격패시켰고, 적군은 돌아갔다. 곽자의의 위명은 적군마저도 탄복할 정도였다.

 

곽자의는 '안사의 난'을 평정한 주요장수중 하나이다. 가장 특별하고 후세인들이 배워야할 점은 그의 혁혁한 전공과 병법이 아니다. 그의 대지약우(大智若愚), 심암도회(深諳韜晦)의 도와 근신하고 조심하는 처세방식이다. 바로 이런 인욕부중하고 자신을 숙이는 성격으로 그는 공명을 얻은 후에도 시기를 받지 않고 선시선종(善始善終)할 수 있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고,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바로 곽자의의 고명한 점이다.

 

사서에서는 이렇게 곽자의를 평가한다: "권력이 천하를 뒤흔드나 조정에서 그를 꺼리지 않고, 공로가 천하를 뒤덮지만 군주는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고싶은 일을 다 했지만 군자들이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부귀하며 오래 살았고, 자손이 번성하며 편안했다. 시종 인륜이 흥성했고 모자란 것이 없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지모와 용기를 겸비하고, 큰 공을 세운 명장들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공로가 높아지면서도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사지 않고,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어 수종정침(壽終正寢)한 사람은 거의 없다. 모신의 혈루(血淚), 용장의 애상(哀傷)은 중국역사에 점점히 박혀 있다. 제왕의 대사를 이룬 후에는 '도공구(屠功狗, 공로가 있는 개는 죽인다)'의 비극이 역사에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렇게 탄식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자고이래로 미인은 명장과 같다. 세상사람들에게 흰머리카락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사람이 권력이 천하를 뒤흔들면서도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그를 시기질투하지 않도록 하고, 공로가 천하를 덮으면서도 제왕이 시기하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수천년의 역사에서 이를 해낸 사람은 오로지 1명 곽자의 뿐이다.

 

곽자의는 적의를 해소시키고, 갈등을 완화시키고, 쓴 것은 자신이 뱃속에 삼키고 다른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것까지도 참으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빨이 부러져도 피와 함께 삼킬' 줄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위험이 닥쳐도 풀 수 있고, 적을 만나도 친구로 만들며, 선시선종할 수 있던 비결이다. 곽자의는 이당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내리는 상벌에 대하여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설사 태감 정원진, 어조은등의 모함을 받아, 그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우더라도, 그는 꾹 참아냈고, 항거하지 않았다. 황상이 그에게 즉시 군대를 이끌고 경성으로 돌아오라고 조서를 내리면 그는 두 말 없이 명대로 했다. 이렇게 탄탕활랑(坦蕩闊朗)한 곽자의에 대하여 황제마저도 부끄럽게 생각했다. 조그만치의 헛점도 드러내지 않고, 시시때때로 자성하며, 도광양회를 끝까지 견지한 그의 사람됨과 일처리방식은 그 어떠한 악의를 품은 모함이나 참언 혹은 폄훼도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약점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죄명을 뒤집어 씌우고 악의로 중상하려 해도 실패하게 된다.

 

곽자의가 군대를 이끌고 토번의 침략을 막아낼 때, 환관 어조은은 사람을 보내어 그의 부친의 묘를 파낸다. 지방관리는 묘를 판 사람을 붙잡지 못하여, 황공불안해하고 있었다. 곽자의는 승리를 거두고 경성으로 돌아온다. 조정의 내외에서는 중병을 지닌 곽자의가 조상의 묘가 파헤쳐 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대노하여 무력을 써서 사변이 일어날까봐 걱정했다. 조정에서 알현을 할 때, 당대종은 이 일을 그에게 말해준다. 마음 속으로 누가 그런 짓을 지시했는지 잘 알고 있는 곽자의는 화를 벌컥 내지도 않았고, 이를 틈타 복수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말한다: "저는 병력을 이끌고 이렇게 여러 해동안 전쟁에 참가했지만, 수하들이 분묘를 도굴하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 집안의 조상묘가 다른 사람에게 파헤쳐 졌다니 아마도 하늘의 인과응보인가 봅니다. 귀신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있고, 원한은 그대로 갚게 되니, 제가 무슨 원망할 일이 있겠습니까." 사람됨이 이 정도에 이르면, 악독한 어조은 조차도 더 할 말이 없게 된다. 마음 속으로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감군 어조은이 곽자의에게 군중으로 가서 무기와 갑옷등을 점검하자고 약속한다. 곽자의의 부장 원재(元載)는 급히 달려와서 곽자의에게 말한다. 군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그에게 무장한 인원을 좀 더 많이 데리고 가서 불측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곽자의는 이를 듣고도 그의 말에 따르지 안혹, 그저 가동(家童) 몇몇을 데리고 빈 손으로 간다. 일찌기 준비하고 있던 어조은은 그 모습을 보고는 아주 놀라고 기이하게 여긴다. 그에게 왜 몇명만 데리고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곽자의는 군대물자무기를 점검하는 것일 뿐인데, 뭐하려 사람을 많이 데려오느냐고 답한다. 원래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던 어조은은 아주 부끄럽게 여긴다. 그는 곽자의에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내심으로 가장 존경하는 어른, 진정한 군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후 어조은은 곽자의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더 이상 해치려는 뜻을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배를 저을 정도의 도량을 지니고 싸울 일도 화해를 시키며 명창암전을 모조리 해소시킨다. 이런 일을 고금이래로 몇 사람이나 해낼 수 있었을까. 유능극강(柔能克剛)의 곽자의가 해낼 수 있다.

 

안록산의 부하장수인 전승사는 당나라에 투항한 후 위주에 할거했다. 그는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오만하게 굴었으며 발호하며 흉악한 일을 저질렀다. 조정의 말도 듣지 않았다. 기이한 일은 이 고삐풀린 말같은 무장도 곽자의에 대하여는 극히 공경했다는 점이다. 곽자의가 사람을 위주에 보내어 다독이자, 전승사는 무릎을 꿇고 영접했을 뿐아니라, 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이 두 무릎은 오랫동안 남의 앞에 꿇은 적이 없는데, 오늘 곽공을 위하여 꿇는다."

 

당대종은 딸인 승평공주를 곽자의의 아들인 곽애(郭曖)에게 처로 보낸다. 곽애는 고관자제이며 부호자제이다. 당연히 오만하고 나이가 어려서 자주 공주와 말다툼을 했다. 공주도 어려서부터 온갖 총애를 다 받고 자랐으며 총애를 믿고 버릇없이 굴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한번은 두 사람이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는데, 화가난 곽애가 노하여 소리친다: "너는 공주라는 신분을 믿고 마음대로 하고 이치를 따지지 않는다. 너의 부친이 황제로 지내는 것은 곽씨집안의 공로때문이 아니냐. 나는 천자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평공주는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화가 난 나머지 사람을 불러 마차를 차고 궁으로 돌아가서 당대종에게 일러바친다.

 

당대종은 그녀의 말을 들은 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공주를 책망한다: "그 이치를 너는 모른단 말이냐. 그가 정말 황제가 되려고 했으면 일찌감치 되었을 것이다. 오늘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천하가 설마 이씨집안만이 혼자 가질 수 있는 것이더냐?" 그 자리에서 공주를 달랜 후에 집으로 돌려보낸다.

 

곽자의는 이 일을 듣고 곽애를 묶어서 대전으로 끌고가서 죄를 청한다. 당대종이 말한다: "청백리도 집안 일은 처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느냐. '바보 귀머거리가 되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다. 왜 시시비비를 꼭 따져야 하느냐." 자녀들의 일은 그저 한눈을 감고 모른 척하면 된다. 그것을 가지고 따질 필요는 없다."

 

곽자의는 곽애를 집으로 데레온 후, 사람을 시켜 그에게 수십대의 곤장을 때린다. 공주가 차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울면서 사정해서야 비로소 멈춘다. 그후 두 사람은 화해하고 서로 사랑했으며, 다시는 자잘한 일로 싸우지 않았다. 곽자의의 원만하고 교모한 점을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곽자의는 장수로서 일생을 보냈는데, 그가 발탁한 장수만 수십명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작위를 받았고, 영예를 누린다. 다만 이들도 모두 곽자의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감복했고, 곽자의가 부르기만 하면 즉시 달려와서 부탕도화(赴湯蹈火)하고, 두말이 없었다. 이들은 곽자의의 명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며 전투에 나서서 적과 싸웠다. 곽자의는 사병을 지휘하듯이 그들을 지휘하면 그들은 명에 그대로 따랐다.

 

곽자의는 강력할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인 매력과 숭고한 명망이 있었다.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사료에 따르면 곽자의의 저택은 친인리(親仁里)의 1/4을 점했다고 한다. 집안에는 항상 수천명이 드나들었고, 조정의 동료들은 그의 거처를 모를 정도였다.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매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쓰지 않는 것처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곽자의는 사적으로 붕당을 이루거나 사리를 취하지 않았다. 당대종은 그를 아주 존경했고,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으며, 말할 때면 반드시 가르침을 달라고 하고, 태도는 아주 겸허했다. 곽자의의 7명의 아들, 8명의 사위는 모두 고관을 지내고, 그 후손들만도 수십명에 달했다. 나이가 들어서 눈이 흐려진 그는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자손들은 명절을 맞이할 때 그에게 인사하면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서 뜻을 표할 뿐이다. 곽자의는 부귀의 일생, 영화의 일생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시기질투를 받지 않고, 자손은 번성했고, 복록은 무궁했다. 제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낸다. 중국인의 전통관념 속에서 그는 공덕원만하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정도였다.

 

779년, 당덕종이 즉위한다. 곽자의를 '상부'로 모신다. 나이많은 곽자의에게 태위 겸 중서령의 관직을 추가로 내리고, 식읍 이천호를 내린다. 동시에 그가 맡고 있던 부원수등 실권이 있는 직위는 모조리 면직시킨다. 경도해랑에 익숙하고 이미 심여지수(心如止水)의 경지에 이른 곽자의는 여기에 불만을 전혀 표시하지 않았다: "총욕불경(寵辱不驚), 간정전화개화락(看庭前花開花落); 거류무의(去留無意), 망천외운권운서(望天外雲捲雲舒)" 그저 소요자재하는 부옹으로 만족했다. 노이미견(老而彌堅), 백인성정(百忍成精), 수우이안(隨遇而安)의 곽자의에 대하여 조정의 사람들이 무슨 더 쓸데없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황은의 호탕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충의로운 노신을 위안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매년 1500명이 먹을 양식, 200필의 말이 먹을 풀을 공급하여 은혜를 나타냈다. 2년후, 곽자의는 아무런 병도 앓지 않고 죽는다. 향년 85세였다. 당덕종은 정조(停朝) 5일을 선언하고, 신하들에게 곽자의의 집으로 가서 조문하라고 한다. 장례비도 국고에서 지급한다. 곽자의는 당숙종의 능묘 옆에 후장된다. 매장때 당덕종은 문무백관들과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다. 마치 자신의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그리고 시호로 '충무(忠武)'를 내리고 태사(太師)에 추존한다. 곽자의는 공로가 커서 더 이상 상을 내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당덕종은 시에서 그를 칭찬한다: "역부천주(力扶天柱), 유뢰분양(唯賴汾陽); 난사상부(難師尙父) 가통응양(可通鷹揚)" 그에게 극도로 높은 평가를 내리니 진향애영(盡享哀榮)이라 할 만하다."

 

두터운 중화역사에서, 곽자의처럼 살아서 총애를 모두 누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어서도 묘호를 받고 유방천고하는 명장은 수천년이래로 오로지 그 한 명뿐이다. 중국이라는 아주 특색있는 고로의 나라에서, 처세의 어려움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공로가 높으면서 군주를 흔들지 않고, 세력이 크면서 남을 괴롭히지 않고, 세를 잃고서도 원망하지 않으며, 모함을 당하고서도 변명하지 않았다. 인생의 처지가 어떠하든지간에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일대명장 곽자의의 독특한 생존지혜이자 처세이념이다.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천성이 원래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곽자의는 원만하게 일생을 마치고 그다지 여한을 남기지 않았다.

 

인생이 이 정도이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곽자의의 전설같은 인생경력은 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 수천년동안 유일한 특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