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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휘종)

상해박물관 송휘종 <천자문(千字文)>의 진위

by 중은우시 2012. 2. 28.

글: 배광휘(裴光輝)

 

 

 

 

 

일전에 송휘종 조길(趙佶)의 수금체(瘦金體) <천자문(千字文)>의 서예작품이 선전(深圳)의 모 경매회사에서 1.4억위안의 고가로 낙찰되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업계는 난리가 난다. 상해박물관 서화부의 주임 샨궈린(單國霖)은 개자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재 세상에 남아있는 송휘종의 수금체 <천자문>은 확실히 송휘종 조길이 동관(童貫)에게 하사한 서예작품이다. 그러나 단지 1개이다. 그리고 상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선전에서 낙찰된 그 작품은 가짜이거나 임모품(臨摹品)이다. 현제 가짜가 경매되거나 위조품이 경매되는 경우가 아주 많고, 속임수도 난무한다. 그러나 상해박물관의 이 <천자문>이 정말 샨궈린이 말한대로 송휘종 조길의 진품일까? 필자는 상해박물관이 이 작품에 대하여 고증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점이 너무 많다. 사실 이것도 가짜작품일 것이다.

 

뒷쪽에 "숭녕갑신세선화전서사동관(崇寧甲申歲宣和殿書賜童貫)"이라는 글이 적혀 있는 '수금체' 진품 <천자문>은 상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양인개(楊仁凱) 선생은 이를 송휘종 조길의 진품으로 감정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의문점이 4가지나 된다:

 

첫째, 숭녕 갑신년에는 '선화전'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선화전은 송철종(宋哲宗) 조후(趙煦)가 만들었지, 송휘종이 만든 것이 아니다. 선화전은 원부3년(1100년)이전에 훼손되었다가, 송휘종 대관연간(1107년-1110년)에 재건된다. '숭녕갑신(1104년)에는 아예 '선화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송휘종은 대관연관이전에 스스로 '선화전'이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이 것이 철종 조후가 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송휘종이 등극한 후, 동관이 환관으로 일했다. 철종이 그를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더더구나 이 <천자문>은 전형적인 '수금체'이다. 조길의 독창적인 서체인 것이다. 그 이전의 어느 황제라도 이런 품격을 지닐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숭녕갑신'에 송휘종은 22세였다. 이 연령은 그가 '개종입파(開宗立派)'하고 '수금체'를 독창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이 연령은 그가 널리 배우고 전통을 익히는 때이다. 그가 스스로 문호를 만들고 일가를 형성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수금체'가 아직 출현할 수 없었다. 문헌에도 그가 22세에 '수금체'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고금 서예가의 서예실천의 규율에 부합하지 않는다.

 

셋째, 낙관에 쓴 격식에도 문제가 있다.

 

"선화전"을 마지막에 줄을 바꿔쓰지 않고, '동관'의 위치는 높이 '선화전'보다 위에 두었다. 이렇게 '동관'을 높이는 방식은 상규에 부합하지 않는다.

 

넷째, 문자가 송황제의 휘(諱)에 저촉되고 청나라황제의 휘(諱)는 회피했다.

 

송휘종의 전임황제의 휘인 '광(光)'과 '의(義)'는 송태종 조광의의 이름에 저촉된다. '현(縣)', '현(懸)'도 성조 조현랑(趙玄朗)의 이름에 저축된다. '속(屬)'은 송영종 조서(趙曙)의 이름에 저촉된다. 이들 글자는 송나라대의 '피휘대상'인 글자에 올라 있었고, 송나라때라면 반드시 피휘해야하는 글자들이다.

 

청나라황제의 휘를 피하여,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천지원황(天地元黃)"으로 적었다. 이는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휘한 것이다. "여모정결(女慕貞潔)"을 "여모청결(女慕淸潔)"로 적었는데, 이것은 옹정제의 휘인 윤정(胤禎)을 피휘한 것이다. "적력원망(的歷園莽)"을 "적력원망(的園莽)"으로 적었는데 이는 건륭제의 휘인 홍력(弘歷)을 피휘한 것이다.

 

'현'과 '정'은 송나라때도 피휘했다. 청나라때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둘 자가 송나라황제의 휘를 피한 것이면, 왜 '광' '의'자는 피휘하지 않았을까? 이를 보면 위 두 글자는 송나라황제를 피휘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황제를 피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을 분석해보면, 이 소위 송휘종의 <천자문>은 청나라사람이 만든 위작이다. 시기는 분명히 건륭이후 도광(道光)이전이다. 왜나하면 '녕(寧)'자가 나타나는데 이는 도광제의 휘인 민녕(旻寧)을 피휘하지 않은 것이므로 도광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건륭어람지보'를 찍었다고 하여 그것이 건륭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반드시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