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승모헌(升玥軒)
송휘종 조길(趙佶)은 일생동안 두 가지가 많았다: 하나는 재주가 많았고, 다른 하나는 자녀가 많았다. 예술분야에서, 음시작부(吟詩作賦)이건, 전사작곡(塡詞作曲)이근 아니면 필묵단청(筆墨丹靑, 서예와 회화)이건, 국장경기(鞠場競技, 축국)이건 송휘종은 모두 일류였다. 자식을 낳은 분야에서 송휘종은 자녀를 많이 두었다. 중국고대 생육사상 손꼽을 정도이다. <송사>의 기록에 따르면, 북송이 멸망하기 전에 "휘종은 31명의 아들이 있었다."(<종실전>), "34명의 딸이 있었다."(<공주전>). 이 공식적인 불완전한 통계만으로도 송휘종은 역대황제중 자녀수가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기실, 송휘종은 포로가 되기 전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이름은 조상(趙相)이다. 그러나, <송사.종실전>에는 그에 관해서 누락했다.
<송회요.후비>의 기록에 따르면, "(선화) 칠년 팔월 사일, 조서를 내렸다: '첩여 왕씨가 아들을 낳으니..." 이 아이가 바로 32번째 아들인 조상이다. 나중에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진다. 조상에 대하여 <정강패사전증.개봉부장>에도 기록이 있다. "한국공 (조)상이 3살 즉 어린 황자이다" 즉, '정강지난'때 포로로 잡힌 송휘종이 어린 아들이다. 이를 보면 정강지난전에 송휘종은 32명의 아들과 34명이 딸을 두었음을 알 수 잇다.
<정강패사전증>은 송나라사람 확암(確庵), 내암(耐庵)이 편찬했다. 변량의 함락과 금나라병사가 북으로 돌아간 것에 대하여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용이 아주 치욕적이므로, 정사에서는 많은 경우 기록하지 않았다. 이 책은 <개봉부상>(송인 무명씨), <청궁역어>(금인 왕성예), <신음어>(송인 무명씨), <송부기>(금인 무명씨)등 7부분으로 되어 있다. 서로 다른 작자가 자신이 친히 겪고 들은 바를 날짜별로 기록해 완성한 것이다. 각종 자료는 서로 검증될 수 있어, 참고가치가 아주 높다. 송휘종이 포로가 되기 전후에 낳은 자식들의 상황을 탐구하는데 대한 1차적 자료가 된다.
송회종이 자식을 많이 낳은 것은 많은 정도가 그의 호색과 관련있다. <송사>에서는 그를 "경조(輕佻, 가볍고 방정맞다)"하다고 평가한다. 이것도 그의 체면을 봐줘서 쓴 말이다. <정강패사전증.청궁역어>의 기록에 따르면, 송휘종은 "5,7일에 반드시 처녀 한명을 품었다. 한번 품으면 위호(位號)를 내리고, 한번 더 품으면, 한등급 올려준다. 퇴위한 후, 궁에서 내보낸 궁녀가 6,7천명에 달했다." 한번에 6,7천명의 궁녀를 감원할 정도면, 송휘종이 재위할 때의 후궁수는 만명이 넘을 것이다. 황제, 태상황으로서 송휘종은 마음과 정력을 정치나 적국을 상대하는데 두지 않고, 창작과 여색에만 골몰했다. 이것이 북송의 멸망을 재촉한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금나라로 간 후, 송휘종은 "혼덕공(昏德公)"에 봉해져서, 갖은 수모를 당하고, 이곳 저곳으로 끌려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오국성(五國城, 지금의 흑룡강성 의란현 경내)에 정착한다. 그동안 비록 조건은 나빴고, 공간은 좁았지만, 송휘종의 주위에 여인이 적지 않았다. <정강패사전증.개봉부장>의 기록에 따르면, 송휘종이 포로로 잡혔을 때, 봉호가 있는 비빈과 궁녀가 143명이었다. 명호가 없는 궁녀는 504명에 달한다. 이들 비빈은 몇 차례로 나누어 금나라로 압송된다. 중도에 사망하거나 금나라사람이 차지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상당한 일부분의 여인들이 송휘종의 곁에 남아있었다.
<정강패사전증.송부기>에는 송휘종이 "입국후 다시 6남, 8녀를 낳았다."고 적었다. "다른 자녀 5명은 모두 6년 봄에 태어났는데, 혼덕공의 자식들이 아니다." 즉, 송휘종이 포로로 잡힌 후 그의 여인들은 모두 19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 6남 8녀는 송휘종의 골육이고, 다른 자녀 5명은 모두 금나라사람들의 씨라는 것이다. <송부기>는 금나라사람이 쓴 것이다. 송휘종의 체면따위는 고려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더더욱 기록의 신뢰도를 높여준다. 이렇게 보면, 송휘종은 포로로 되기 전후에 모두 38명의 아들, 42명의 딸 합계 80명의 자식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80명의 자식들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먼저 황자들을 보자. 북송이 멸망하기 전에, 32명의 황자중 7명은 요절했다. 나머지 23명의 황자들 중에서 조구(趙構)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출생한 조극(趙極), 조주(趙柱), 조단(趙檀)등 6명의 황자를 포함하여, 송휘종, 송흠종과 함게 망국노가 된다; 42명의 공주는 '공복제희(恭福帝姬)가 태어난지 한 살이 되지 않아서, 금나라사람들이 몰라, 데려가지 않아' 화를 면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요절하거나, 금나라사람의 전리품이 되어 마지막에는 모두 행방이 묘연했다. 새집이 부서지는데 온전한 알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송휘종 부자, 조씨 종실 및 그 수천명의 포로가 된 관리들이 장악한 고도의 문명은 결국 야만적인 여진족에게 영구적인 한문화의 낙인을 찍는다. <황조통지.만주팔기성>에 따르면, 여진족의 후예중에서, "이이근각라(伊爾根覺羅)"성의 한족성은 "조(趙)"이다. <흑룡강지고.씨족>에 따르면, "각라는 송휘종 송흠종의 후손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즉, 나중에 만주족의 일부 명문거족은 북송황실의 후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생육능력이 가장 강하고 자식을 가장 많이 두었던 송휘종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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