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반청천(湖畔聽泉)
오늘날의 섬서성 함양부근의 함양궁은 진제국의 심장이다. 그러나 2천년이 지나서, 함양궁은 황토무더기로 바뀌었고, 진나라군대라는 한때 최강의 군대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를 남겼다. 도대체 어떤 군대였을까? 진군이 강대한 근원은 무엇이었을가? 진군은 무엇을 가지고 역사의 기적을 이루었을까?
1974년, 진시황병마용갱에서는 대량의 병기가 발견된다. 이들 병기는 진군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던 일면을 드러내보였다. 고고학자들은 하남성 서평현에서 고대인들이 철을 제련한 유적지를 발견한다. 2000여년전에, 이 일대는 한(韓)나라의 야철중심이었다. 철기생산이 당시에 이미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 하나는 동일한 시기에 처한 진나라사람들은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것같다는 것이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4만건의 병기는 거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설마 중국의 진군은 장비가 낙후된 군대였단 말인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저명한 암살사건을 하나 기록한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1년전에, 강인한 진군은 연나라를 소멸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형가라는 사신은 연나라의 지도를 가지고 진나라로 온다. 지도를 바치며 투항한다는 것은 거짓이었고, 실제는 그 기회를 틈타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사기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자객 형가가 손에 비수를 들고 있었고, 진시황은 기둥을 돌아 도망가면서 검을 뽑아 반격하려고 한다. 3번이나 검을 뽑으려 시도했으나 검을 뽑지 못한다.
사마천은 이렇게 해석했다. 진시황의 검이 너무 길어서, 적시에 뽑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청동검은 일반적으로 모두 단검이다. 청동검을 길게 만들 수 없는 원인은 청동재료가 쉽게 부러지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유명한 월왕구천검의 전체 길이는 55.6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청동검은 보편적으로 넓고 짧다. 60센티미터가 거의 청동검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런 길이의 검은 언제든지 뽑을 수 있다. 진시황이 어찌 검이 너무 길어서 뽑지 못했다고 한단 말인가? 이를 해석하는데 역사학자들은 항상 곤혹을 겪었다.
1974년, 고고학자들은 병마용갱에서 전혀 다른 청동검을 한 자루 발견한다. 전문가들이 깜짝 놀라게도, 이 검의 길이는 91센티미터를 넘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진시황의 검은 아마도 이런 길다란 청동검이었을 것이라고. 자객이 쫓아오는데, 1미터짜리 장검을 뽑는 것은 실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의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사람들이 검을 길게 만든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19세기 영국의 고병기학자 리차드 버튼은 이렇게 말했다. 단병기의 격투과정에서, 찌르는 것은 베는 것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찌르는 것이 더 쉽게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보다 약 30센티미터 더 길어진 진나라장검은 격투과정에서 쉽게 상대방을 찌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아마도 진나라검을 길게 늘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청동검인데, 진나라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부러지지 않게 하였을까?
청동시대에 검을 만드는 관건은 야연때 구리에 약간의 주석을 넣는 것이다. 주석이 적으면 검이 너무 부드러워진다; 주석이 많으면, 검이 단단해지나 쉽게 부러진다. 진나라검에 대한 화학정량분석에 따르면, 구리주석의 배합비율이 청동검의 강도와 인성을 최적으로 결합시킨 것이다.
중원육국을 소멸시킨 후, 강인한 흉노기병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가 진나라군대앞에 놓여진 숙제였다.
흉노기병은 빠른 속도로 돌진한다. 전통적인 보병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다. 역사기록으로 보면, 노(弩)라는 원거리 사병기(射兵器)가 당시의 전투에서 주도작용을 했을 것이다. 병마용갱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으므로 노의 목재부분은 이미 썩었다. 다만 완전한 유적은 여전히 당초의 진나라노를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 활과는 달리, 진노는 각등(脚蹬)을 반드시 썼다. 전신의 힘을 다하여 줄을 당긴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런 노의 사정거리는 300미터가량이고, 유효살상거리는 150미터정도 되었을 것으로 본다.
노가 썩은 후 남긴 흔적가운데에서 고고학자들은 청동으로 만든 작은 기계를 발견한다. 이들 작은 청동부품은 노를 발사하는데 쓰는 걸쇠였다. 설계는 아주 정교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진나라사람들이 왜 그것을 좀 더 간단하게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일종의 가장 간단한 방안이라면 제조비용이 크게 내려간다. 다만, 사수는 완전히 손가락의 힘으로 활줄을 당겨여 한다. 큰 힘이 필요하고, 격발순간, 노는 분명 흔들릴 것이다. 오늘날의 사격훈련에서 사격순간 호흡조정까지 하지 않으면 사격의 정확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진군의 노기는 아주 중교한 기계장치를 통하여, 화살앞의 구아(勾牙)가 돌연 내려가게 만들었다. 사격이 아주 쉽게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노가 활보다 뛰어난 점중의 하나이다. 활을 당기려면 큰 힘이 필요하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겨냥을 정확하게 하기 힘들다.
병마용갱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화살촉이다. 이들 화살촉은 모두 3각마름모형이다. 진군은 왜 이런 삼각마름모형의 화살촉을 선택했을까? 삼각마름모화살촉은 3개의 날카로운 능각이 있다. 목표에 격중하는 순간, 능의 날카로움으로 잘라낼 수 있고, 화살촉은 갑옷을 뚫고 들어가서 인체에 닿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대익전두(帶翼箭頭)는 흉맹한 도자(倒刺)를 지니고 있지만, 날개부분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목표에서 벗어나기 쉽다.
진군의 이런 삼각마름모형화살촉은 날개면을 없앴다. 사격이 더욱 정확해진다. 전문가들은 이런 화살촉을 자세히 분석했다. 검측수치가 나오자, 전문가들은 믿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인다. 검측결과, 화살촉의 3개 호면은 거의 완전히 같다. 이것은 완벽한 유선형화살촉에 가깝다. 이런 화살촉의 윤곽선은 총알의 외형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총알의 외형은 비행과정에서 공기의 압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진나라사람들이 설계한 이런 삼각마름모형화살촉도 동일한 목적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진나라사람들은 경험으로 현대공기역학의 법칙을 알았던 것이다. 이런 오래된 화살촉은 초기비행기의 모델이 되고, 그것은 오늘날의 총알과 일맥상통한다.
병마용갱의 4만여개 삼각마름모화살촉은 제작이 아주 통일적이다. 수만개의 화살촉을 어떻게 동일한 표준으로 주조할 수 있었을까? 진군이 사용한 노는 제작이 아주 표준화되어 있었다. 부품은 서로 호환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진군사병은 손괴된 노에서 완벽한 부품을 얻어내 다시 쓸 수도 있었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진인의 표준화는 더욱 중요한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진인은 아마도 병기의 기술표준을 고정시키고, 국가는 법령을 통하여 이들 기술표준을 모든 무기공장에 내려보냈을 것이다.
진나라병기의 제작은 아주 정교하다. 청동검에는 3줄의 90센티미터길이의 마름모선이 있다. 이렇게, 가늘고 긴 검신을 8개의 면으로 나눈다. 수공으로 이런 표면가공을 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과(戈, 창)의 원호부분가공도 아주 정교하다. 화살촉의 3개 유선형표면도 완전히 대칭적이다.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떤 천재장인이 이런 병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병마용갱의 수만개 병기는 모두 같은 품질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표준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대량생산을 할 수 있었을까?
연구자들은 병기에 일부 문자가 적힌 것을 발견한다. 대부분은 사람이름이다. 그중 출현회수가 가장 많은 것은 "상방여불위(相邦呂不韋)"이다. 여씨춘추는 진나라의 가장 중요한 역사문헌이다. 그것의 편찬자가 여불위이다. 여불이는 당시의 진나라 승상이다. 여씨춘추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물륵공명(物勒工名). 그 뜻은 기물의 제조자는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새겨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 평범해보이는 문자에서 진나라의 군사공업의 관리비밀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여불위는 승상으로서, 병기생산의 최고감독관이다. 그의 아래에 공사(工師), 즉 각종 병기공장의 공장장이 있다. 이 과(戈)의 제조를 감독하는 공장장은 "즙(蕺)"이라고 한다. 공장장의 아래에는 승(丞)인데, 이는 생산라인감독에 해당한다. 이 감독의 이름은 "의(義)"이다. 친히 이 과를 제작한 장인의 이름은 "성(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하여 추단한다: 진나라의 군사공업관리제도는 4급으로 나뉘어 있다. 상방, 공사, 승, 장인. 이렇게 층층이 책임지는 구조이다. 품질문제가 생기면 병기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책임을 진다.
진나라의 여러 병기공장은 통일된 기준에 따라 대량의 무기를 품질좋게 만들어낸다. 파리마드식의 4급관리제도는 이것을 보증했다. 세계의 대부분 지방이 야만과 몽매상태로 있을 때, 진나라사람들은 독특한 사고방식과 지혜로 그 시대에 최강의 병기제조업을 창조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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