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구(吳鉤)
함풍11년(1861년) 칠월 십칠일, 이게 겨우 이립(而立, 30)의 나이가 된 함풍제는 열하행궁(熱河行宮)에서 병사한다. 임종때, 그는 구두로 두 가지 유지(諭旨)를 남긴다.: "봉주유(奉朱諭): 황장자 어명(御命) 재순(載淳)을 황태자로 세운다.", "봉주유: 황장자 어명 재순을 황태자로 세우고, 재원(載垣), 단화(端華), 경수(景壽), 숙순(肅順),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翰), 초우영(焦佑瀛)은 진심으로 보필하며 일체의 정무(政務)를 찬양(贊襄)하라." 즉, 함풍제는 우선 곧 황위를 계승할 어린 황제를 위하여 8대신 보정(輔政)의 권력구조를 짜준다.
고명대신(顧命大臣) 보정의 체제는 함풍제가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대청이 개국한 초기에 이미 선례가 있다. 청세조 순치제가 6살때 즉위하자,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얼하랑이 보정했다. 그러나, 보정대신은 "거천척오(去天尺五, 하늘에서 오척만 떨어져 있다)"이다. 쉽게 권력을 잡고 전권을 행할 수 있고, 조정의 "참주(僭主)"로 변신할 수 있다. 찬양단의 구성원이 적을수록 권력은 쉽게 한 사람에게 옮겨질 수 있다. 도르곤이 보정을 한 후에, 과연 정친왕을 배제하고, 대권을 독점하여 말그대로 숨은 황제가 된다. 나중에 순치가 병사(일설은 출가)하자, 청성조 강희제가 8살때 등극한다. 태황태후 효장은 다시 아오바이(鰲拜)등 4대신이 보정을 한다. 비록 그녀는 도르곤이 권력을 찬탈했던 화를 감안하여, 찬양단의 규모를 배로 늘였다. 다만 최종적으로 아오바이가 권력을 독점하여 전권을 행사한다. 현재 함풍제는 찬양대신을 다시 8명으로 늘였다. 방대한 의사결정고문단을 구성한 것이다.
이 8명의 고명대신중, 함풍의 총신 숙순은 서열 4위였다.그러나 실제로 이 보정단은 숙순이 우두머리였다. 당시 숙순의 직무는 내각협판대학사, 어전대신, 호부상서였다. 협판대학사는 허함(虛銜)이다. 어전대신은 황제의 근신이어서, 이론적으로 그다지 큰 정식권력은 없었다. 호부상서는 실권이 있는 직이었따. 그러나 그저 중앙정부의 장관일 뿐이다. 다만, 숙순은 함풍의 총애를 받아, 열하에 와 있던 왕공대신은 모두 그의 말만 기다렸다.
함풍제는 그 사후의 권랙배치에서 다시 후비의 권한을 강화한다. 이를 통하여 찬양단의 권력을 견제했다. 그는 황후 뉴후루씨(자안황후, 동태후)에게 "어상(御償)"이라는 인새를 주고, 소황제에게는 "동도당(同道堂)"이라는 인새를 준다. 이 두 개의 인새는 최고권력의 상징이다. 황제의 명의로 발하는 일체의 상유(上諭), 주비(朱批)에는 반드시 앞부분에는 "어상"인을 뒷부분에는 "동도당"인을 찍어야 했다. 그래야 효력이 발생한다. 함풍은 이런 분권설계를 통하여, 정무의 최종결정권과 부결권, 법령의 심의권과 서명권을 황실에 남겨두고자 했다. 찬양단의 권력은 '보필'의 성격에 제한되도록 했고, 직접 황제의 명의로 명을 발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찬양단이 황권을 잠식하는 것을 방지했다. 황제의 나이가 어려서, '동도당' 인새는 다시 그의 생모인 의귀비 나라씨(자희태후, 서태후)가 대신 관장하도록 한다.
단, 함풍제가 남긴 이 '노신 + 신주'의 권력배치는 잠재적인 충돌을 내포하고 있었다; 찬양단은 집정대권을 양궁태후와 나누어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태후도 찬양단이 조정을 독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열하행궁내에 대행황제(선황)의 장례라는 비통한 분위기하에서, 권력쟁탈의 도광검영(刀光劍影)이 드러난다.
함풍제의 유조에는 문자 자체로는 알 수 없는 한 가지 헛점이 존재했다. 유조에서는 공친왕(恭親王)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약간은 엄이도령(掩耳盜鈴,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다. 즉, 눈가리고 아웅하다)식으로 공친왕을 고명대신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공친왕은 함풍제 혁녕(奕詝)의 여섯째 동생이다. 재능과 견식은 모두 함풍제보다 나았다. 나중의 소위 "동치중흥(同治中興)"은 바로 공친왕을 우두머리로 한 양무파(洋務派)가 개창한 것이다. 함풍제의 부친 도광제(道光帝)는 후계자문제에서, 한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넷째인 혁녕으로 할 것인지, 여섯째인 혁흔(奕訢)으로 할 것인지. 나중에 함풍제가 비록 대통을 승계했지만, 그는 공친왕에 대한 양유(亮瑜, 제갈량과 주유) 컴플렉스를 끝까지 떨치지 못했다.
그 해(1860년)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가고, 함풍제는 "북수(北狩, 북쪽으로 사냥가는 것. 실제로는 도망)"를 떠나면서, 황급히 공친왕을 "흠차편의행사전권대신(欽差便宜行事全權大臣), 독판화국(督辦和局)"에 임명한다. 즉, 엉망이 된 국면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으로 함풍제가 도성을 떠나 멀리 있는 동안, 경성을 지키는 중앙정부를 기실 공친왕이 주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주선으로, 연합군은 철수하고, 화국(和局, 화해국면)을 위한 협상을 완성한다. 그리하여 그는 '참주'와 같은 권위를 얻게 된다. 함풍제의 권력배치는 '고의로' 이 웅재대략의 여섯째 동생을 '잊었다' 그러나 공친왕이 모은 권세는 즉시 사라지지 않는다. 만일 공친왕과 연맹을 맺으면, 서태후는 완전히 숙순집단과 대항하거나 누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구월 이십삼일, 찬양단과 태후는 상의를 거쳐 "대행황제의 재궁(梓宮, 관)을 모시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날"을 확정한다. 재궁이 북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번잡한 의례가 필요했다. 서태후는 황제의 나이가 어려서 힘든 일을 견디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찬양단과 변통의 방식을 상의한다. 숙순등은 태후와 소황제는 찬양단의 재원, 단화가 호송하여 먼저 떠나서 북경으로 돌아가 대행황재 재궁이 오기를 기다리도록 결정한다.
그래서, 서태후는 성공적으로 숙순의 세력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전에 공친왕과 '회사(會師)'하는 것은 관건적인 한 걸음이다. 누가 알았으랴. 경성의 정치국면은 태후의 시동생이자 맹우(盟友)인 공친왕이 장악하고 있었다. 서태후가 회궁하자 이는 용이 바다로 들어간 겻이다.
구월 이십구일, 양궁태후와 소황제가 북경성으로 돌아온 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즉시 공친왕 및 기타 조정대신을 접견한다. 그리고, 삼간(三奸, 숙순, 재원, 단화)이 어떻게 양궁태후와 소황제를 무시하고 멸시했는지의 죄상을 열거한다. 말하면서 통곡을 했고, 눈물 콧물을 다 흘렸고, 아름다운 용모가 다 망쳐질 정도였다. 여러 신하들도 분기탱천했다. 한때 숙순에게 모욕을 당한 바 있던 대신 주조배(周祖培)는 공친왕의 암시를 받아 앞장서서 일어나 말한다: "왜 그 죄를 중하게 처벌하지 않습니까?" 서태후가 말한다: "그들은 찬양왕대신인데 어떻게 죄를 묻겠습니까?" 주조배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말한다: "태후께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먼저 해임하는 명령을 내리고, 다시 붙잡아서 책임을 물으면 됩니다." 공친왕은 이때 미리 준비해놓은 치죄조서를 태후에게 내밀고, 태후는 기꺼이 날인한다.
다음 날, 군신의 조회(朝會)때, 공친촹이 '삼간'을 체포하는 조서를 읽는다. 재원, 단화는 그 자리에서 체포된다. 그날 밤 늦게 관을 호송하는 행열이 밀운현에 이르렀을 때, 숙순도 잠을 자다가 끌려간다. 밤을 새워 북경까지 압송된다. 가련한 대행황제가 아직 흙에 묻히기도 전에, 임종때 지정한 고명8대신은 순식간에 권력을 박탈당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권력배치는 바로 와해된다.
찬양단의 보정권력은 신속히 거사에 공을 세운 공친왕이 이어받는다. 십월 초하루, 팔대신보정의 다음날, 서태후는 유지를 내린다. 공친왕을 "의정왕(議政王)", "재군기처행주(在軍機處行走)"로 임명한다. 군기처는 청나라때의 권력중추이다. "재군기처행주"는 공친왕이 정식으로 권력중심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궁태후를 권력핵심으로 하고, 공친왕을 집정대신으로 하는 "쌍두마차"가 정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후세인들이 놀리듯이 부르는 명칭인 "숙수공화(叔嫂共和, 숙수는 시동생과 형수)"이다. 다음 해, 청나라조정은 연호를 "동치(同治)"로 고친다.
함풍-동치 교체기에 일어난 이 권력재분배는 마침 청나라의 자아혁신을 위하여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만청의 첫번째 개혁인 "양무변법"은 바로 "숙수공화"체제하에서 서막을 연다. 공친왕의 건의 및 함풍제의 유명에 따라, 완선히 새로운 정부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 동치원년에 성립된다. 새로운 기구는 공친왕이 통제하고 양무의 처리를 책임지고, 철로를 만들고, 광산을 채굴하며, 공장을 만들고, 새학교를 건설하며, 국비로 유학생을 파견시킨다. 그 성과는 '동치중흥'의 새루로운 국면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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