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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항전시기 임표가족의 이합집산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인민문적

 

임표의 고향 임가대만(林家大灣)은 황강현성의 동북쪽에 있고, 예전에는 백양산촌(白羊山村)이라고 불렀는데, 임씨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임가대만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의 노인들에 따르면, 임씨집안의 조적은 복건이라고 한다. 임씨족보에 따르면, 임씨는 당,송시기에 복건에서 안휘로 옮겨오고, 송나라말기에 다시 임가대만으로 와서 현지의 망족(望族)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임씨의 조상가운데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다. 바로 호광총독 임칙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임표는 임칙서와 혈연관계에 있다.

 

임표의 집안은 대가족이다. 임표의 할아버지 임시랑(林時郞)은 다섯 아들을 둔다. 셋째 임협보(林協輔)는 바로 열사 임육남(林育南)의 부친이다. 임표의 부친인 임명경(林明卿)은 형제 5명중 넷째여서 사람들이 '임사야(林四爺)'라고 불렀다.

 

임표의 부친은 비록 산골농촌에서 생활하였지만,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집안식구도 많았고, 물려받은 유산도 없었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갔다. 임표의 자형이 사망한 후, 누나 임보주(林寶珠)는 1921년 어린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온다. 임보주가 가져온 약간의 돈으로 부친은 두 대의 직포기(織布機)를 산다. 임표부친 임명경은 직포를 배운 적이 있다. 그는 바깥의 일을 그만두었고, 큰아들 임경불(林慶佛)도 불러들인다. 집안의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모두 매달려서 열심히 일했다. 사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점차 임가대만의 비교적 유명한 부잣집이 된다.

 

임명경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임표는 1907년 12월 5일에 태어났으며, 8살이 되기 전부터 집안일을 도왔다. 나무를 해오는 일이라든지, 물을 길어오는 일등을 했다. 그의 모친은 동네사람들에게 임표는 철이 들었다고 칭찬을 하곤 했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임명경은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임표는 9살에 사숙(서당)에 들어간다. 공부를 좋아해서 집안일을 도우는 외에, 가끔 장난을 쳤지만, 거의 매일 집안에서 책을 읽었다. 저녁에도 등을 켜고 계속 책을 보았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사람들이 그를 '책벌레'라고 부를 정도였다. 임명경은 임표에게 졸업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임표는 나는 학식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자제를 가르칠만하지 못하다. 지금 나라가 태평하지 않으니 나라에 보답하기 위하여 군인이 되어, 백성들을 위하여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말한다.

 

임명경은 깜짝 놀란다. 내향적인 임표는 성격상 군대와는 맞지 않을 것같았기 때문이다. 임명경은 아들이 농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간다. 기실 임명경은 모르고 있었다. 임표가 평상시 산에 나무하러 갈 때면 친구들과 전투놀이를 즐기는데 매번 그는 사령관을 하려고 다투었다. 전쟁놀이를 많이 하다보니 신발이 빨리 닳았고, 부친에게 혼이 났다. 임표는 아주 고집이 셌고, 무엇을 하든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쇠조각을 신발 바닥에 박으면서 신발의 수명을 연장하려 했다. 그래도 전쟁놀이는 그만두지 않는다.

 

1922년 3월, 임표는 무창공진중학에 입학한다. 생활이 힘들어 한동안 휴학을 하게 된다. 임육남은 그를 월한철로자제소학에 보내어 교사가 되도록 해준다. 교사로 있는 동안 임표는 야학을 열었고, 자주 공장으로 가서 노동자들과 접촉한다. 1924년 임표는 공청단에 가입한다. 1925년 5.30참안때 무한의 학생들이 속속 데모를 하고, 수업거부를 하며, 상해의 투쟁을 지원한다. 임표는 진보적인 학생들의 모임에서 연설을 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1925년 11월, 황포군관학교가 제4기학생을 모집할 때, 중공 한구조직의 추천과 당형 임육남, 임육영의 영향을 받아, 임표는 부친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임표가 떠난 후, 십여년동안 고향에는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1936년말이 되어서 집에서는 비로소 임표가 연안에서 부쳐온 편지를 받게 된다. 이것은 임표가 집을 떠난지 10년만에 쓴 첫번째 편지였다. 그는 부친의 환갑을 축하하고, 자신이 홍군학교 교장을 맡고 있으며, 현재는 국공합작으로 전국이 일치하여 항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임표의 부친은 서신을 보고는 아주 기뻐하며 답신을 보내려 하였으나 우편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임표의 동생인 임향영(林向榮)에게 연안으로 가서 사실여부를 알아보게 시킨다. 1937년초, 임향영은 천신만고끝에 연안에 도착하고 10년이나 헤어져 있던 형 임표를 만난다.

 

1937년 10월초, 신문에 이런 뉴스가 실린다: "임표가 팔로군 115사단을 지휘하여 평형관에서 왜군 판원사단 1000여명을 몰살시켰다" 소식은 금방 고향에 전해지고, 고향사람들은 속속 임씨집안을 찾아와 축하한다. 현성의 관리도 찾아와서 축하해주었다. 이제 임표의 신화는 고향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임명경은 잘 알았다. 임표의 명성이 높아지면, 일본인들을 자극하게 될 것이고, 일본인들은 조만간 미친듯이 보복하려 할 것이다. 절대로 임표의 가족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고향에서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것같았다. 1938년 봄, 임씨집안은 떠날 준비를 한다. 큰아들 임경불을 집에 남겨서 전답을 관리하게 하고, 임시는 두 척의 배를 빌려서, 일가족과 직포기를 싣고 무한으로 피난간다.

 

1938년 10월, 일본군이 무한을 공격한다. 무한이 곧 무너질 지경에 처하자 일가족은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서, 홍호, 감리를 지나 원강의 초미진(草尾鎭)에 도착한다. 이 작은 마을에서 임씨가족이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본군이 곧 닥친다고 하여 일가족은 할 수 없이 다시 황급히 짐을 꾸려 피난을 떠난다. 임씨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난 사람은 더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피난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임씨집안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유랑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길은 고생이었다. 일가족은 형양에서 마침내 안착한다. 형양에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낸다. 개략 3년이었다. 임명경은 직포기를 놓고, 중국군대에서 급히 필요로 하는 각반과 면포를 생산하여 일가의 생활을 유지했다. 이렇게 하여 사람도 낯설고 땅도 낯설은 형양에서 3년간 힘들게 살아간다. 1944년 4월이 되어 형세는 다시 불안해진다. 소문에 일본인들이 형양으로 온다고 했다. 임표 일가는 형양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어 일가족은 난민을 따라 운귀(雲貴, 운남귀주)방향으로 피난간다.

 

기차는 광서의 유주(柳州)에 도착한 후 더 이상 가지를 않았다. 일찌기 먹을 것이 없어진 일가족은 나무껍질과 나무조각을 엮어서 판잣집을 만든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하에서, 마음이 선량한 임표의 모친 진씨는 병이 들어 버려진 부녀를 가련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집에서 남은 죽을 그녀에게 먹인다. 진씨는 몰랐다. 그녀의 병이 곽란이고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하여 진씨도 병에 걸리고 설사와 구토로 금방 죽게 된다. 죽기 전에 진씨는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손가락을 두 개 내뻗었다. 임명경은 이해했다. 이것은 둘째 아들 임표가 보고싶다는 말이라는 것을. 임씨가족은 피난가는 길에 국민당에서 만든 영화를 보았고, 거기에서 임표가 지휘하여 전투하는 장면이 있었다. 진씨는 바로 알아보았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원래 일가족이 이렇게 고생하며 피난을 간 것은 둘째 아들을 찾아가려는 것이었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다니, 일가족은 땅바닥에 굻어앉아 눈물바다를 이룬다.

 

임표의 가족들은 여러해동안 피난을 다니면서, 5명이 죽었다. 그때는 모두 이미 죽는 것에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최소한 죽는다면 지금처럼 고생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임명경은 일가족을 모집하여 어떻게 할지 상의한다. 모두 각양각색으로 말했지만 결국은 연안에 연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명경은 셋째아들 임육국(林育菊)을 독산현으로 보내어 임표에게 전보를 치게 한다. 연안의 모택동, 주덕은 임표가족이 보내온 전보를 보고는 중경의 주은래에게 처리하도록 조치한다. 주은래는 풍옥상의 부인인 이덕전(李德全)에게 얘기한다. 풍옥상은 자신의 부관을 독산일대로 보내어 여러 날을 찾아서 결국은 찾아낸다. 큰 눈이 내리기 하루 전날, 트럭 한 대가 임표 일가족을 싣고 귀양의 난민수용소로 보낸다. 한동안 머물다가 가시 팔로군중경판사처로 옮겨진다.

 

임표의 가족은 중경에서 1944년의 설날을 보낸다. 6월이 되어, 조직에서 그들을 연안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동행하는 사람이 200여명이었다. 3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갔다. 차량이 감천(甘泉)에 도착했을 때, 임표와 섭군은 일찌감치 그 곳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택동, 주덕, 강극청도 모두 와서 임표의 가족을 맞이했다. 주덕은 임명경을 위하여 특주(特廚)까지 준비시킨다. 그때는 모택동도 소주(小廚)를 먹었다. 특주는 최고의 예우였다.

 

1949년 2월, 북경이 해방되고, 임표는 일가족을 북경으로 데려간다.

 

임표일가에서 혁명으로 희생된 사람은 동생 임향영, 임자영, 임춘방, 임정화등이 있다.

 

임명경은 북경에 거주하고, 큰아들 임경불은 여전히 고향에 머물렀다. 1959년 5월, 임경불은 뇌일혈로 사망하니, 당시 나이 57세였다. 이 소식을 임표는 계속 부친에게 숨긴다. 임명경은 큰 아들이 여러 해나 계속 자신을 보러 오지 않자, 자주 물었다. 모두 임경불이 업무로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1962년 1월말의 어느 날, 임표일가가 부친을 보러 간다. 임명경은 또 물었다. 이제 설날이 다가오는데, 임경불에게 북경으로 한번 오라고 얘기하라고 말한다. 임입과는 당시에 아직 어려서 큰아버니느 돌아가시지 않았어요?라고 말해버린다. 임명경은 그제서야 멍해지고 급히 임표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본다. 임표는 할 수 없이 말을 한다. 임명경은 바로 통곡을 하고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고, 얼마후 병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북경서교의 복전공묘에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