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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세가지 정치적 실수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황작비비(黃雀飛飛) 

 

265년 8월, 사마소(司馬昭)가 병사한다. 아들 사마염이 부친의 자리를 이어 상국(相國), 진왕(晋王)에 오른다. 이 해에 그의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십이월, 사마염은 위나라의 황제 조환(曹奐)이 물러나서 선양하도록 강제하고, 스스로 등극하여 진(晋)왕조를 개창한다. 연호를 고쳐 태시(泰始) 원년으로 한다.  사마씨의 이 경력에 대하여 서진 말기의 노예황제(後趙) 갈(羯)인 석륵(石勒)은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사대대장부라면 일처리를 광명정대하게 해야 한다. 해와 달이 밝게 빛나는 것처럼. 조맹덕, 사마중달부자처럼 고아과부를 괴롭히고, 여우처럼 홀려서 하여 천하를 얻어서는 안된다." 이때부터 사마의와 그의 자손들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고아과부를 괴롭히는" 야심가로 굳어진다. 필자의 생각으로 사마의가족에 대한 이런 평가는 아주 불공정하다.

 

사마가족은 삼국시기에 가장 재능을 지닌 가족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부자 3인은 모두 도략이 뛰어나고, 정치적인 재능이 출중했다. 3대의 노력을 거쳐, 삼국분쟁의 국면은 최종적으로 사마염의 손에 통일된다. 다시 통일을 이룩한 공로는 어떻게 하더라도 말살할 수가 없다. 사마염으로 말하자면, <진서>에서는 그를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 개국지군으로서 그는 비록 명군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그에게는 확실히 뛰어난 점이 많이 있었다. 첫째, 그는 관대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넓었다. 자신과 다른 의견도 잘 들었다. 조위의 원로대신들은 대부분 그가 기용한다.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하여 정국의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여기서 설명해야할 것은 혜강, 완적은 모두 조위의 충신이다. 사마씨와의 합작을 거부했다. 그리고 혜강을 죽인 것은 사마소이다. 사마염이 즉위했을 때, 혜강, 완적은 이미 죽었다). 둘째, 그는 피를 보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통일(오나라)과정에서 과도하게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위왕 조환, 촉의 후주 유선, 오주 손호 및 한왕조의 종실후인은 모두 그의 치하에서 선종(善終)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마염이후 3백년간 보기 드문 일이다.셋째, 그는 지방을 다독이는 정책을 잘 했다. 오나라를 평정한 후, 그는 원래 오나라의 관리를 등용하여 그 지방을 다스렸다. 가혹한 정치는 없애고, 정령을 간소화했다. 북방으로 이주한 오나라사람들에게는 각각 요역부세를 10년(장리)과 20년(백성백공)간 면제했다. 그리하여 오나라사람들은 크게 기뻐한다. 이를 통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므로, 진나라초기 사마염이 통치하던 20여년의 기간동안,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치방략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천하는 비교적 태평했고,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사서에서는 이 시기를 "민화속정(民和俗靜), 가급인족(家給人足)"했다고 적었는데,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진왕조(265-420)의 155년 역사중에서, 사마염의 이 시기를 제외하고, 황권은 계속 약화되었다. 황권의 약화는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야심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고, 살인약탈방화등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결국 국가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지고 대내전에 빠진다. 결국은 강산을 잃어버린다. 이런 국면을 조성한 원인은 바로 사마염이 3가지 아주 저급한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첫번째 아주 저급한 잘못은 제후왕을 분봉한 것이다. 사마염은 황제에 즉위할 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경력이나 견식에 한계가 있었다. 강산을 안정시키지 못할까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조손3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위종실의 역량이 박약했고, 강한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주나라의 분봉제도를 답습하여, 종실의 제후왕을 대거 임명한다. 이렇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다. 즉위초기, 한꺼번에 종실 27명을 왕에 봉한다. 봉지의 대소에 따라 제후왕에게 수량은 서로 다르지만 군대(읍2만호를 대국으로 하며, 병력 5천인; 읍만호는 차국으로 하여 병력 3천인; 오천호는 소국으로 하여 병력 천오백인)를 가질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스스로 지방관을 임명할 수 있게 한다. 오나라를 멸한 후, 다시 조서를 내려 주군병(지방군)을 해체하고, 지방정부는 더 이상 군대를 관할할 권한이 없게 만든다. 비록 그후 사마염이 제후왕을 방비하려는 노력을 한 바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주, 서한의 역사는 이미 증명했다. 봉건제는 일단 확립되면, 반드시 제후왕의 경제, 군사실력의 확장을 불러온다는 것을. 중앙정부가 그들을 제어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과연 사마염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후왕은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16년에 걸친 내전을 벌인다. 국가는 졸지에 피비린내나는 투쟁에 말려든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도 된다. 설사 사마염의 사후에 즉위한 것이 백치황제 사마충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후왕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구나 이와 동시에 그는  두가지 심각한 실수도 저질렀다.

 

두번째 아주 저급한 실수는 태자를 잘못 고른 것이다. 사마염의 후궁희첩은 아주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재위때는 한창 젊은 나이여서 아들도 많이 두었다. 이름을 남긴 아들만 18명이다. 성인이 된 자는 9명이다. 진나라 태시3년(267년) 정월, 사마염은 나이 겨우 8살의 둘째아들 사마충을 황태자로 앉힌다. 사마염은 이때 스물을 갓 넘긴 때였다. 몸이 아주 튼튼했고, 정권도 안정적이었다. 황급히 태자를 앉힌 것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사마염은 마치 자신의 태자가 그다지 총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희(李熹, <자치통감>에서는 이익(李獈)이라고 함)를 태자태부로 함고, 이밀을 태자세마로 하여 이 두 사람이 태자를 잘 교육시키기를 희망했다. 이밀은 촉한의 옛신하이다. 사마씨를 위하여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정표>를 써서 직위를 거절한다. 이희는 아주 재능있는 인물이었다. 지식이 넓고, 품덕이 출중했다. 다만 그도 마찬가지로 사마씨가족의 행위를 멸시했다. 내심으로 사마씨를 위하여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진서>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당초 사마의가 여러번 이희에게 조정에 들어와 관직을 맡으라고 했으나, 그는 항상 몸이 좋지 않으며, 모친이 병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사양한다. 나중에 사마사가 보정으로 대장군에 있을 때 그를 불러서 대장군부막료로 삼는다. 그는 부득이 부임한다. 사마사는 그에게 물었다: "옛날에 내 부친이 너를 불렀을 때는 네가 부임하지 않더니, 지금 내가 부르니 너는 오느냐?" 이희가 대답했다: "당시 선군은 나를 예로 대했으므로 나는 예로 진퇴를 결정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법으로 나를 구속하니, 나는 법이 두려워 부득이 온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희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와서 관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심리상태로 일을 하니, 지방을 다스리게 하거나,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하면 아마도 힘을 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태자를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아들을 나는 것은 부친만한 사람이 없다." 이 말은 사마염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마충은 백치이다. 국가대사를 처리할 수 없었다. 이 점을 모든 문무대신들이 다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사마염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대신 위관(衛瓘)이 술취한 김에 어좌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사마염에게 말한다: "이 자리가 아깝다." 사마염도 무슨 말인지 알았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고 말한다: "너는 정말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나." 그는 알았다 자신의 아들이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러나 아들이 얼마나 멍청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제대로 된 부친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문제를 내서 태자를 시험해보고자 한다: 한번은 사마염이 사람들에게 몇 개의 상소문을 가지고 오게 하여 태자에게 처리하게 한다. 사마충이 어찌 그것을 처리할 능력이 되겠는가? 그래서 가비(賈妃)는 곁에 있던 심복에게 대신 비시(批示)를 쓰게 한다. 비시에는 많은 고문이 들어 있었다. 급사 장홍이 보고나서 말한다: "태자는 글을 읽지 않습니다. 그것은 폐하도 아십니다. 지금은 그저 일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고, 쉬운 말로 쓰면 되지, 고전의 성어를 인용할 필요가 없습니다."그리하여 장홍이 다시 초고를 쓰고, 사마충이 베껴쓴 후에 올린다. 사마염은 태자가 쓴 비시를 보고 아주 기뻐한다. 이때부터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버린다. 이것은 함녕4년의 일이다. 이때 사마충의 나이 이미 19살이었다. 즉 한번의 시험부정이 진왕조의 강산을 철저히 끝장낸 것이다.

 

사마염이 범한 세번째 실수는 아들에게 며느리를 잘못 골라준 것이다. 태시7년 정월, 사마염은 태자에게 앞당겨 관례를 행해준다. 이 해에 사마충은 겨우 12살이었다. 관례를 행했다는 것은 이미 성인이 되었다는 말이고, 결혼을 시킬 것을 생각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양황후는 가충(賈充)의 딸을 태자비로 들일 것을 청한다. 사마염은 말한다: "위공(衛公)의 딸은 오가(五可)가 있고, 가공(賈公)의 딸에게는 오불가(五不可)가 있다. 위씨집안은 현혜(賢惠)하고, 자손이 많고, 용모가 좋고, 키도 크며, 피부도 하얐다. 가씨집안은 사납고, 아들도 적고, 용모도 추악하며, 키도 작고, 피부도 검다." 이를 보면, 사마염은 전혀 멍청하지 않았다. 고려할 문제는 모두 고려했다(가정환경, 생식능력, 용모).

 

위관은 당시 가장 재능있는 대신중 한 명이었다. 일지기 종회의 반란을 진압했고, 대장 등애를 참살했다. 그는 명문사족출신으로 집안에 법도가 있었다. 자손들도 많았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위관과 그의 자손은 모두 하나같이 박학다재했다. 그리고 모두 저명한 서예가였다. 아들 위선(衛宣)은 사마염의 딸을 처로 맞이하고, 손자 위개(衛玠)는 당대의 미남자였다. 이와 비교하면, 가충의 가족은 손색이 많았다. 가충은 전왕조 태위 가규(賈逵)의 아들이다. 비록 일정한 정치적 재능은 있으나, 학문이나 기술은 없다. 그의 최대공적은 사마소를 도와서 위황제 조모(曹髦)를 죽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그를 멸시했다. 망국지군인 손호조차도 그의 면전에서 그를 모욕할 정도였다. 가충은 원래 두 아들을 두었다. 처인 곽괴(郭槐)는 질투심이 심하여, 가충이 유모와 사통한 것으로 생각하여 선후로 그녀들을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가충의 두 아들은 어려서 요절한다. 가충은 일찌감치 후손이 끊겼다. 괵괴가 사마충에게 시집보내려는 것은 바로 자신이 낳은 친 딸이다. 그녀와 성격이 아주 유사한 가남풍(賈南風)이다.

 

사마염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지만, 마에 씌인 양황후는 그래도 가씨집안의 딸을 들이자고 고집한다. 가충이 심복인 순의(荀顗), 순욱(荀勗), 풍침(馮紞)이 모두 가충의 딸이 꽃처럼 예쁘고 덕과 재능을 겸비했다고 칭찬했다. 태시8년 이월, 사마염은 태자를 위하여 15살된 가남풍을 태자비로 들인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가남풍은 교만하고, 질투심이 강하며 권모술수에 능했다.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한 사마충은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무서워했고, 완전히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 사마염은 아주 정확하게 보았다. 그러나 원칙을 견지하지 못했다.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진왕조를 망칠 사람을 황실에 들인 것이다.

 

사마염의 집권후기에 부친대가 남겨준 현신숙장(賢臣宿將)은 하나하나 세상을 떠난다.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는 주색에 빠지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놀았으며, 간신과 소인배를 등용했다. 정치는 나날이 황폐해진다. 태희원년(290년) 사월 기유일, 사마염이 병사한다. 황태자 사마충이 황제위에 오른다. 그리고 영희(永熙)로 연호를 고친다. 그가 진혜제(晋惠帝)이다. 사마충은 31살에 즉위하고, 광희원년(307년) 동해왕 사마월에게 독살당한다. 합쳐서 17년간 재위했다. 한 명의 백치황제와 한 명의 무치한부(無恥悍婦), 한 무리의 간신소인배, 군대를 장악한 일군의 야심가, 이것이 바로 사마염이 남겨준 정치적 유산이다.

 

사마염이 죽은 후 130여년동안(서진,동진), 중국은 대혼란, 대분열의 역사시기로 접어든다. 전후로 건립된 정권이 이십개가 넘는다.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피바람이 분다. 진왕조는 이때부터 다사다난한 시기로 접어든다. 사마가족은 14명의 괴뢰황제, 가후난정, 팔왕지란, 오호난화, 문벌정치를 겪으며, 정권은 시종 외인의 손에 쥐어진다. 결국은 신흥군벌세력인 유유(劉裕)가 사마씨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조 송나라를 개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