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아(李治亞)
동오는 왜 멸망했을까? 조위(曹魏)와 비교하면 사마의 부자와 같은 권신도 없었고, 유선(劉禪)과 같이 평용한 군주도 없었는데....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조위나 촉한과 비교하면 강동의 오나라는 망국의 이유가 더욱 있었다.
첫째, 손권은 만년에 극단적으로 시기심이 많았다. 손권은 웅재대략의 군주이고, 초기에는 운주유악하면서, 인재를 잘 식멸했고, 여러번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적벽지전을 앞두고 주유를 임명하고, 백의도강에는 여몽을 기용하고, 이릉지전에는 육손을 기용했다. 이들 전투는 모두 동오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조조, 유비, 제갈량등이 하나하나 죽을 때, 강동의 손권은 극단적인 자부심을 지녔고, 시기심도 아주 강했다. 능력없는 자들을 총애하고, 좋은 신하들은 유배를 보낸다. 후궁은 분란이 끊이지 않고, 적서간에 서로 싸웠다. 이런 것들은 그가 제대로 나라를 통치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가 되면서 그 누구보다도 심했다. 여일칙(呂壹則)을 기용하여 무고한 자들을 모함하고, 육손을 믿으면서도 그가 무고를 받아 죽도록 만들었다. 제갈각을 의심하면서도 그에게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고, 황후와 태자를 세우는 일로 궁정이 혼란에 빠진다.
둘째, 종실의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손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제가 화목하지 못하고, 신하들은 부서를 나누지 않고 다투면, 원씨(원소)처럼 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아쉽게도 그도 만년에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적오4년, 태자 손등이 병사한다. 나이 겨우 33세이다. 그후 9년동안 손권은 두번째 태자 손화를 폐출시키고, 넷째아들 노왕 손패를 사사하며, 최종적으로 일곱째아들(막내아들) 손량(孫亮)을 태자로 삼는다. 손량의 모친인 반씨를 황후로 삼는다. 손량은 10살에 등극하니 조정을 주재할 수가 없었다. 260년, 손량은 종실의 장군 손림에 의해 쫓겨나고 살해당한다. 동오의 세번째 황제인 손휴(孫休)도 권신들때문에 고통을 겪고, 재위 7년만에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셋째, 동오의 마지막 황제는 황음무도했고, 포학하기 그지없었다. 손호(孫皓)가 처음 등극했을 때 백성들을 구제해주는 명을 내린다.그리고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한다. 궁녀를 줄이고 궁안에 있던 진귀한 금수를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영명한 군주로 한때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금방 그는 포악하고 교만하게 된다. 그리고 술과 여색을 좋아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 그외에, 그는 자신의 옹립한 가신을 죽여버린다.(알려진 바로는 그들이 손호를 옹립한 것을 후회하자, 그것을 알게 된 손호가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를 무창(武昌, 지금의 鄂州임 현재의 武漢이 아님)으로 천도하며 대거 토목공사를 벌인다.
넷째, 손호와 비교하면, 사마염(司馬炎)은 일찌기 천하통일의 뜻을 세웠다. 그리고 병정양족(兵精糧足)했으며, 병사들은 명을 기다리고 준비가 충분했다. 서진(西晋)은 원래 조위의 의발을 계승했다. 진왕조 태시5년(269년)부터 진무제는 오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운다. 한편으로 내정을 정비하여, 농업을 개발하고,양식을 쌓아두었다. 다른 한편으로 장수를 선발하고 누선을 건조하며, 수군을 훈련시켰다. 그해 십일월, 진무제는 20만의 병사를 모아서, 6로로 나누어 오나라를 공격한다. 다음해 이월초, 단양성(호북성 자귀 동쪽)을 함락시킨 후, 오나라군사들이 강을 가로막은 철쇄철추를 잘라버린다. 그리하여 강을 통행하는데 자유롭게 된다. 나중에 오나라 서쪽전선 총사령관, 도독 손흠(孫歆)을 생포한다. 옹쪽전선에서는 오나라 승상 장제(張悌)가 3만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진나라군대의 협공에 대패하여 돌아간다. 진나라군대는 즉석에서 결정을 내려, 병력을 이끌고 건업으로 쳐들어간다. 오나라군대는 놀라고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투항한다. 병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 도망쳐서 흩어졌다. 그리하여 오나라는 멸망하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서진은 사전준비가 주도면밀하고 충분했으며 기회를 잘 잡아서 싸웠고, 병력을 여러 로로 나누었고, 수군과 육군이 잘 배합되었다. 여기서 수군이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결정하여 일거에 승리를 거둔다. 오나라의 군주는 멍청하고 방어에 느슨하며, 병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며, 통일적인 대책이 없었다. 그리하여 연이은 패배를 자초한다.
삼국연의의 그말 "천하의 큰 일은 나뉘어진지 오래되면 합치고, 합친지 오래되면 나뉘어진다"는 말이 있고 그리고 유우석의 <서새산회고>가 있다. 그러나, 동오의 마지막 황제 손호는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다. 그가 낙양으로 압송된 후, 사마염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손호에게 앉도록 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이 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린지 오래되었다!" 손호도 말로는 지지 않았다. 나도 건업에 있을 때 당신을 위하여 자리를 준비해 두었었다. 손호가 동오에서 한 갖은 악행을 생각하고, 사마염이 손호에게 사람의 피부를 벗기고, 눈알을 파낸 일을 얘기하자, 손호는 그것은 불충한 신하를 처벌하기 위함이었다고 맗한다. 사마염은 이런 폭군이라면 누구나 싫어할 것이고, 만일 자신이 동오를 멸망시키지 않더라도, 하늘이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손호가 그래도 투항해온 점을 봐서, 사마염은 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하고(이 봉호는 풍자적인 의미가 있다), 약간의 전답과 재물을 하사한다. 그러나 대우는 유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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