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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진왕(秦王) 자영(子嬰)은 어떤 사람인가?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이치아(李治亞)

 

망국지군(亡國之君)을 얘기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갈면서, 그런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나라의 망국지군은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애(仁愛)하고 절제(節制)하였으며, 총명하고 근신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망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진왕 자영은 가련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자영은 인애롭고 절제했다. 진이세 호해가 시해된 후, 조고(趙高)는 자영을 맞이하여 즉위시킨다. 당시의 상황은 진왕조의 영토가 통일이전보다 더욱 작아져 있었다. 그래서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황제를 칭하지 말고, 왕을 칭하도록 한다. 그래서 진왕이다. 자영이 즉위한 오일후 그는 계책을 세워 조고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결한다. 이는 진이세를 위하여 복수한 셈이다. 유방이 먼저 관중으로 들어온 후 패상에 도착한 후 자영에게 투항을 권한다. 그리고 자영의 동의를 얻는다. 자영은 밧줄로 자신을 묶고, 황제어용의 옥새와 병부를 휴대하고 친히 유방의 군으로 나아가 투항한다. 진나라는 자영이 투항하는 순간 정식 종결되었다.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고, 그를 수행한 관리에게 넘겨주어 돌봐주게 하였다. 항우가 함양성에 들어온 후 즉시 자영을 죽이고, 대도살을 진행한다. 이제 진나라의 여러 대에 걸쳐 축적된 것들은 모조리 불태워진다.

 

자영은 지혜있는 사람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진이세 호해가 즉위한다. 진이세는 환관 조고를 총애하여 부소를 사사하고, 많은 엣 신하들을 죽였다. 여기에는 몽염, 이사등이 포함된다. 진2세가 몽염을 해치려고 할 때, 자영은 진이세에게 이렇게 권한 적이 있다: "조왕천(趙王遷)은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취(顔聚)를 임용했고, 제왕건(齊王建)은 그의 전대충신을 죽이고 후승(後勝)을 임묭하였는데, 그 결과 모두 국가의 멸망을 가져왔다. 몽씨는 진나라의 대신이고 모사이다. 폐하께서 일시 그들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신은 개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충신을 주살하고 아무런 덕행이 없는 자를 기용하는 것은 조정 안의 신하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바깥의 장병들의 의지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진이세는 그의 간언을 듣지 않는다. 진이세는 3년간 재위하다가 조고에게 피살당한다. 조고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지지해주지 않자, 자영을 맞이하여 즉위시킨 것이다. 그리고 옥새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조고는 민변이 일어난 후 진나라의 땅이 통일전보다 축소되었으니, '황제'라고 칭하지 말고, '왕'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자영은 자세를 낮추는 사람이다. 기원전207년 구월, 조고는 자영으로 하여금 재계(齋戒)를 하도록 시킨다. 종묘로 가서 예를 행하고, 전국옥새를 받도록 한다; 5일이 지난다. 자영은 그의 두 아들 및 신하 한담(韓談)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승상 조고는 이망궁에서 진이세를 죽였고, 여러 신하들이 그를 주살할까봐 겁이 나서 거짓으로 덕이 있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하여 나를 왕으로 세웠다. 내가 듣기로 조고는 초나라와 약정을 했다. 우리나라의 종족을 소멸시킨 후, 토지를 나눠받아 관중에서 왕이 되기로 했다. 현재 나에게 재계를 하라고 하여 종묘로 가서 조상에게 제사지내게 했는데, 이는 종묘에서 나를 죽여버리기 위함이다. 내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면 승상이 반드시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가 오면 나는 그를 죽여버리겠다." 조고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요청했지만, 자영은 종묘로 가지 않았다. 과연 그는 친히 재궁으로 온다. 자영은 한담에게 조고를 암살하도록 명령하고, 곧이어 그의 가족들도 모조리 처형한다.

 

자영은 아주 시류를 아는 사람이었다. 유방이 진나라말기의 반란군을 이끌고 관중으로 진입했다. 자영은 장병을 보내어 요관에서 유방의 군대를 저지하게 시켰으나,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요관을 우회한다. 귀산을 넘어 남전일대에서 두번이나 진나라군대를 격패시킨다. 기원전206년 십월, 무관으로 진입하고, 패상에 도착한 후 사람을 보내어 자영에게 투항을 권한다. 그리고 자영의 동의를 받는다. 자영은 처자식과 밧줄로 자신을 묶고, 백마가 끌고 가는 흰색 마차에 앉았다. 몸에는 장례식때 입는 흰색옷을 입었다. 그리고 황제의 어용물품(전국옥새와 병부를 포함함)를 휴대하여 지도(軹道)에서 친히 유방의 군대 앞으로 나아가 투항한다. 자영은 모두 46일간 진왕으로 있었다. 진왕조는 자영이 투항하는 순간 정식 멸망한다. 번쾌는 자영을 죽이자고 하지만, 유방은 자영을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수행한 관리에게 넘겨서 보살피게 한다. 그러나 결국, 항우가 함양성에 들어온 후, 즉시 자영을 죽이고, 대도살과 방화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왜 망국지군이 되었을까? 심지어 다른 사람의 도하귀(刀下鬼)가 되었을까?

 

첫째, 진시황의 포학. 진시황은 비록 천하를 통일하였고, 육국을 멸망시켰지만, 아주 잔폭했다. 일찌기 끝도 없이 세금을 거두고 부역을 시킨다. 장성을 쌓고, 궁전을 건설하며, 능침을 만들었으며.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전란의 고통에서 막 벗어난 많은 농민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힘든 노역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아방궁과 여산묘를 만들기 위하여 진시황은 전국각지에서 모두 70여만명의 민공을 소집한다. 무수한 재물을 쏟아부었으나, 전국인민의 반발에 부닥친다. 기원전211년, 동군에서 진시황을 욕하는 엄중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해에, 운석이 동군에 떨어졌다. 어떤 사람은 진시황을 미워하였으므로, 그 위에 몰래 7개의 글자를 새겨 넣는다: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진시황은 누가 운석에 글을 새겼는지 조사하도록 시킨다. 어사대부가 그곳으로 가서 조사하였으나 밝히지 못한다. 그래서 아예 운석 부근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둘째, 진이세의 혼용(昏庸). 진시황의 웅재대략과 달리, 진이세는 혼용한 군주였다. 즉위초기에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그 후에 조고의 건의를 받아, 승상 이사를 죽인다. 그리고는 지록위마의 조고를 기용한다. 마침내 스스로 조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결국은 조고의 무리에 의하여 핍박받아 자결하게 된다.

 

셋째, 항우의 포학. 항우는 비록 진왕조를 무너뜨렸지만, 진왕조의 통치와 비교하면, 그는 지나치면 지나치지 덜하지 않았다. "신안성의 남쪽에서 밤에 공격하여 진나라병졸 이십여만명을 갱살시켰다." 같은 반란군지도자이지만, 유방은 함양에 들어간 후 전혀 주민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함양을 도살한다. 투항한 진왕 자영을 죽이고, 궁전을 불태운다. 불은 석 달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재물과 부녀를 마차에 싣고 갔다. 그가 지나간 곳은 부서지고 망가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반고는 자영을 아주 동정할만하고 존중할만하다고 말한다. "내가 <진기(秦紀)>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車裂)에 처한 것을 보고는 그의 결심과 그의 뜻이 가상하다. 자영은 생사의 도리를 알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만일 부친과 형이 남긴 극악한 유산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하는 최후는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대왕조에는 모두 창업때는 전전긍긍 극근극검하다가, 일단 대권을 손에 잡으면, 왕왕 백성을 도적처럼 여기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후손들이 일패도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