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요(子繇)
진시황에게 있어서, 파과부청은 태후와 후궁비빈을 제외하고, 또 달리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여성이다. 그 의미는 어떤 점에서는 심지어 그의 후궁들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있다.
파과부청과 진시황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먼저 <사기>부터 얘기해야 한다. 사마천은 진시황릉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수은으로 내와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관을 통하여 서로 흐르게 했다. 위로는 천문에서 아래로는 지리까지 모두 갖추었다." 진시황릉에 수은으로 만든 지하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현대고고학탐측기술로도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진릉지궁의 이렇게 많은 수은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이것을 얘기하려면 파과부청과 그녀의 방대한 가족기업을 얘기해야 한다.
파과부청은 진나라때 파군(巴郡)의 청(淸)이라고 불리던 과부이다. 청은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났고, 원래 보통여자였다. 어른이 된 후에는 단사(丹砂)무역을 하는 상인에게 시집간다. 아쉽게도 부부가 함께 지낸 나날이 길지는 못했다. 청의 남편은 곧 죽고 만다.
그 후, 청은 남편에게서 전체 가족기업을 넘겨받았고, 계속 키워간다. 사서에는 비록 청이 고심하여 경영한 과정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일개 여인이 자신의 힘으로 전체 가족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의 가족은 현지에서 노비만 천명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무장한 인원만도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 수량은 거의 전체 현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이를 보면 그 산업이 얼마나 컸는지 알 구 있다. 이들 인원을 먹여살리는데만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를 보면 그녀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을지도 짐작이 간다.
청의 명성과 실력은 진시황의 관심을 끈다.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황제는 그녀를 손님으로 대우했고, 고향에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어준다." 이는 전체 진나라에서 유일무이한 대우이다. 심지어 후세라 하더라도 이같은 영광을 누린 여성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수천의 개인무장세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진나라때도 한 지방에서 할거할만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중앙집권이 고도로 이루어진 진왕조에서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정권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실은 진시황이 이런 개인무장의 존재를 인정했을 뿐아니라, 그의 가족의 우두머리인 파과부청을 표창하고 우대해주었다.
진나라는 상앙변법이래로, 법가사상을 따른다. 중농억상이 그 중의 중요한 내용이다. 진나라때의 상인지위는 계속 낮은 편이었다. 심지어, "칠과적(七科謫)"에도 명확하게 상인을 열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파과부청이 이렇게 대우받은 원인은 더더욱 미스테리하다. 설마 단순히 사서에서 말한 것처럼 "정녀(貞女)로 보아 손님으로 대우했다."는 것일 뿐일까?
진,한시기에, 부녀의 지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여자가 개가하는 일도 아주 많았다. 한무제의 모친은 바로 한경제에게 개가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의 정절관념은 비교적 약했다. 파과부의 정절이 아마도 그중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다만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보면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파군지역은 원래 진나라의 땅이 아니다. 기원전316년, 지나라가 이곳에 군을 설치한다.
파군의 지리위치는 비교적 편벽되다. 그리고 수비하기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어렵다. 설사 진나라가 이곳에 군을 설치한 후에도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파촉지역은 자고이래로 물산이 풍부하고, 천혜의 험준함을 지니고 있어 아주 중요한 전략요충지이다. 또한 진나라와 초나라를 잇는 교통요지이다. 파촉지구는 진나라에 있어서, 초나라와 통하는 교통요지일 뿐아니라, 초나라를 공격하는 후방기지이기도 하다. 전략물자공급의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파촉에 대하여 우대정책을 썼다. 적극적으로 지방세력을 회유한다. 진나라는 심지어 소수민족지역과 맹약을 맺어, 진나라가 소수민족지역을 침입하면 금룡한쌍을 주어야 하고, 소수민족이 진나라땅을 침범하면, 술 한종(鍾)만 주면 된다. 이를 보아도 진나라가 이들을 회유하는데 얼마나 힘썼는지 알 수있다.
진나라는 육국을 병합하기 위하여 부득이 파(巴) 지역의 인심을 회유한다. 파 지역에 우대정책을 쓴다. 그리고 파과부청의 가족기업은 그 지역에서 명망이 비교적 높았다. 자연히 회유대상이 된다. 청에 대한 표창은 실질적으로 파지역에 대한 우대이다.
파지역은 지리위치가 중요할 뿐아니라, 광산자원도 아주 풍부했다. 그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단사이다.
단사는 우리가 평소에 주사(朱砂)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사는 절대로 단순한 안료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에 기능이 아주 광범위했다.
첫째, 단사는 여러 약용효과를 지니고 있다. 열을 내리고 독을 해소시킬 뿐아니라,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사가 상처를 치료하는데 좋은 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사가 전쟁터에서 필수 군사약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국을 통일하려던 진나라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둘째, 단사는 방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단사는 끓이면 수은이 되는데, 수은은 다시 일정한 방식을 통하여 단사로 환원된다. 고인은 이를 보고 단사에 기사회생과 장생불사의 희망을 건다. 그러므로, 단사는 도가에서 단약을 제련할 때 필수성분이 된다. 진시황은 말련에 신선이 되기를 꿈꿨고, 지궁도 수은으로 만든다. 단사에 대한 수요와 의존은 더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단사의 광범위한 효능으로 단사는 중요한 물품이 된다. 파과부청의 가족이 경영하는 것은 바로 단사산업이다. 심지어 진나라제국내에서 단사자원을 가장 많이 장악한 인물이기도 하다. 진시황은 과부청의 가족이 개인무장을 보유한 것을 묵인한 것도 일정한 정도에서 제국의 단사산업에 대한 보호를 묵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에 대한 예우는 마찬가지로 단사산업에 대한 지지라고도 할 수 있다.
설사 우리가 이런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당시의 환경하에서, 청이 일개 여자로서 전체 가족의 기업과 국가의 사명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완전히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여 가족기업을 강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진나라 최고의 전설적인 여인이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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