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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진)

항량(項梁)의 사후 초군(楚軍) 내부의 권력투쟁

by 중은우시 2013. 12. 21.

작자: 미상 

 

초군(楚軍)은 잡탕밥같아서, 각종 세력이 모두 있었다. 항량이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통일시킬 수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 지휘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했다. 항량이 돌연 전사했고, 그 자신이 아마도 나이가 많다고 생각지 않아서인지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해 놓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그의 직계친족으로, 아들, 형제, 조카등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 함게 거병한 원로 혹은 중간에 초군에 가입한 대파벌의 지도자이다. 당시 초군이라는 대집단이 성립된 시간이 길지 않고, 파벌이 나뉘어 있어서, 당시에 어느 한 사람도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세력이 좀 더 큰 연맹을 결성해서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항씨집안은 세력이 강한 대가족이었고, 초군은 항량이 영도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유대관계가 있어서 다른 성의 장수에 비해서는 쉽게 단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량의 사후 초군의 권력투쟁에서 항가의 세력이 우세를 점했다고 본다. 이런 우세는 아마도 몇몇 항가의 중요인물을 통하여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항량의 아들, 형제로 형성된 영도집단이 의사결정하고 통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항우는 초기에 초군내에서 전적이 뛰어난 장수였고, 전투에서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항우가 초군의 2인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경력이 아직 얕고(가족과 동맹군내에서 나이도 많고 지위도 높은 인물과 비교하여), 절대적인 설득력을 지닌 후계자격(예를 들어 항우의 아들이라는 등)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두뇌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항가의 새로운 영수로 추대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항우의 개성이다. 그가 이후에 한 행위를 보면 그는 천하에서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항량을 제외하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야심이 큰 인물이다. 항량이 살아 있을 때는 그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항량이 죽은 후에는 이런 인물은 기피대상에 속하게 된다. 누구든지 후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항우의 세력을 약화시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설사 항가의 세력이 우위를 점하더라도, 항우는 마찬가지로 배제될 상황이었다.

 

그리고 항씨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항우에 불복한 증거도 있다. 그것은 홍문연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바로 항백이다. 당시 홍문연에 대하여 배울 때, 첫번째 반응은 "항백은 항씨집안을 배신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든 생각은 바로 "항백이 일을 망치지만 않았더라면, 항우는 아마도 유방을 죽이고 중국을 통일했을 것이다." 오늘날 다시 되돌아 생각해보면, 본인의 옛날 생각은 아주 유치했었다고 느껴진다. 다만 항백의 행위는 정말 의심이 들게 만든다. 당시 초한 양군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함곡관으로 쳐들어간 것은 이미 직접적인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방은 초회왕의 약속을 믿고 고개숙이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쌍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미 불과 물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장량은 항백에게 구명지은이 있다. 항백이 장량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장량을 만난 다음 다시 유방을 만나서, 혼인을 약속하고, 다시 돌아가서 유방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한 것은 도대체 자기가족의 이익(즉,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중요했는가, 아니면 유방이라는 외인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중요했는가. 만일 이것들을 항백이 장량과의 의리를 중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가 연회때 항장과 검무를 추어 유방을 보호한 것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이때 유방등은 도마위에 오른 고기인 셈이다. 유방을 죽이고 장량을 보호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자기가족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친구의 구명지은에도 보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 양쪽을 모두 돌보는 일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우리는 항백이라는 사람이 머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항백의 행위는 그와 항우가 근본적으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다. 항백은 항씨가족중 항우를 배척하려는 세력중이 일원이었을 것이다. 항우가 송의(宋義)를 죽이고 병권을 빼앗았지만, 항백등 다른 항씨가족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무장세력의 지휘권을 항우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초군내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하여, 항우는 부득이 이들을 계속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항우와는 다른 길을 걸었고, 전투때는 부득이 항우의 지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겉으로 속으로, 이들은 항상 항우와 반대편에 섰다. 그렇다면 항우가 당시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초군의 서열에 들어 있는 유방을 제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책략이다. 유방이 항우를 멸한 후에, 항씨집안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제후에 봉해진 것을 보면(항우본기: "항백을 사양후에 봉했다. 도후, 평고후, 현무후는 모두 항씨이다"), 항씨가족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항우를 따르지 않았음을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그래서 필자는 항량이 죽은 후 초군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항우를 대표로 하는 소장파장교들과 항씨집안의 기타 배분이 높은 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원로파간에 투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조본기에 따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항량이 죽었다. 패공은 항우와 진류를 공격하고 있었다. 항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력을 이끌고 여장군과 모두 동쪽으로 간다. 여신의 군대는 팽성의 동쪽에, 항우의 군대는 팽성이 서쪽에, 패공의 군대는탕에 있었다." "진이세 3년, 초회왕은 항량의 군대가 패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우대로 옮기고 팽성을 수도로 삼는다. 여신, 항우의 군을 합쳐서 스스로 이끈다. 패공을 탕군장으로 하고 무안후에 봉하며 탕군병을 이끌게 했다. 항우를 장안후로 하고 노공이라 한다. 여신을 사도로 삼고, 부친 여청을 영윤으로 삼았다."

 

항량은 장한과 전투를 벌일 때, 그가 데리고간 부대는 분명 초군의 주력일 것이다. 항량이 패전하여 사망한 후, 이 부대는 즉시 소멸한 것이 아니라, 궤멸하였다고 할 것이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때 항우, 유방이 이끈 "진류공성군"의 부대는 여신이 이끄는 또 다른 부대는 아마도 당시 항량의 초군이 패한 후 유일하게 남은 강대하고 건제가 완비된 부대일 것이다. 항,여,류의 세 사람이 이끄는 병력이 팽성부근에 주둔하며 방어진지를 건립한다. 이때부터 국면이 안정되고, 군심을 안정시킨다. 항,여,류의 세 사람 및 그들이 이끄는 부대는 초군이 신속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지휘관이 피살된 불리한 국면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하였고, 이어서 병력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돕고 서진하는데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 그중 항우가 담당한 역할은 가장 중대했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유방은 부수(副手)였다. "여신이 군대는 팽성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후방이다. 이를 보면 병력,군대의 전투력에서 항우와는 차이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아쉽게도, 항우는 이미 항가의 기타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완전한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아마도 패잔병도 적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병권을 빼앗긴다.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아마도 권력투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결과에서인지 몰라도 그에게 장안후라는 명목상의 작위를 내린 것이다. 여성도 병권을 빼앗긴다. 다만 그의 세력은 항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친에게는 명목뿐인 관직과 작위를 주어 보상했다. 세 사람중 유일하게 이득을 본 것은 유방인 것같다. 빌고 무안후라는 것이 실권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는 항우의 부수에서 일약 명목상 항우와 대등할 수 있는 제후가 된 것이다.

 

초회왕이 이 권력투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고, 얼마나 큰 권력을 얻었는지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소위 괴뢰를 세우려면 선택받는 사람은 당연히 재능이 없거나 실권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항량이 초회왕을 세운 것은 범증의 의견을 들은 것이다. 범증과 같이 노모심산의 인물이 아무렇게나 웅심(즉 초회왕)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웅심이라는 인물이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양을 키웠다"는 문구로 볼 때, 지위나 신분이 없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무슨 정치적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항량이 초회왕을 세운 것은 진이세 2년 육월이고, 항량이 피살된 것은 같은 해 구월이다. 1달후에 초회왕이 송의, 항우에게 조나라를 지원하도록 명한다. 짧은 4개월동안 초회왕은 아무 것도 없던 괴뢰(허수아비)에서 권력이 커져서 항우의 병권을 빼앗을 정도로 성장했다. 나아가 전체 초군을 호령하는 지위에 이른다. 이는 실로 너무 빠른 느낌이다. 항량이 웅심을 괴뢰로 삼으려 했다면, 분명히 그에 대하여 대비를 했을 것이다. 쉽게 그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그런 상황하에서, 누가 얼마의 권력을 지녔는가는 그가 얼마의 병력을 지녔느냐와 일치한다. 병권이 없으면, 근본적으로 "항우,여신의 군대를 합쳐서 스스로 지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초회왕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다만 초군내에는 다른 강대한 세력이 있다. 특히 항가의 기타 인물들이다. 그들은 연합하여 권력을 쟁탈할 실력도 있고 동기도 있었다(전체 가족의 이익). 다만, 초군 내부의 파벌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항우를 제외한 항씨가족이 우세를 장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기타 세력과 연합하여, 초회왕이라는 명목상의 주군의 지지를 받는 것이 더욱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추측한다. 항량이 죽은 후, 항씨의 기타 사람들은 다른 세력과 연합하고, 초회왕과 결탁하여, 하나의 느슨한 연맹을 만든다. 그렇게 하여 성공적으로 초군의 지휘권을 장악한다. 항우가 너무 출중하였고, 인맥이 좋지 않고 정치적 두뇌가 없어 배제되고 병권을 빼앗긴 것이다.

 

당연히, 초회왕은 이 정치투쟁에서 적극적이었다. 그가 전선으로 가서 설명했다는 것은 그가 약간의 담량과 기백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초회황이 항우와 여신의 군대를 합쳐서 스스로 거느린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항우와 여신이 통솔하는 일부 초군에 대한 지휘권을 박탈한 것이다. 왜냐하면 항우가 당시 데리고 간 병력이 모두 자신의 개인무장세력이라면, 누구도 그의 병권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초회왕은 항우로부터 이 잡탕같은 부대의 지휘권을 빼앗아 올 수 있었고, 초회왕이 스스로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초회왕이 직접 그들을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명목상으로 거느리는 것뿐이다. 그들은 어쨌든 비교적 독립적이고,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지는 초화왕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이것은 아마도 나중에 항우가 송의를 죽인 후 순조롭게 병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원인일 것이다). 다만 동시에, 초회왕도 이익을 적지 않게 얻었다. 비록 항우와 여신의 군대가 그의 말을 완전히 듣지는 않더라도, 이 기회에 일부 소세력을 자신의 무장세력으로 삼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다. 아마도 항씨가족등의 세력이 그와 합작한 데 대한 보수일 것이다.

 

우리는 유방이 이번에 초군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먼저 유방의 초기병력현황을 보자. 항량에게 투신하기 전에 9천명이 있었다(한서에는 "탕병을 거두어, 6천명을 었었고, 옛부하와 합하여 구천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항량을 만난 후 즉시 5천명을 얻고("항량은 패공에게 졸 5천인과 오대부장 10인을 준다. 패공이 돌아가서, 병력을 이끌고 풍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항량이 준 이 5천인은 아마도 유방의 말을 잘 듣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항량은 5명의 오대부장도 같이 보냈기 때문이다. 그저 병력을 빌려주어 전투를 하는데 도와준 것일 뿐일 것이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이 오천의 인마는 항량에게 돌여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설명해야 할 것이 있다. 오대부는 중급군관의 작위이다. 아쉽게도 일반적으로 오대부장이 몇 명의 부하를 거느렸는지는 찾아낼 수가 없다. 다만, 사기와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항량이 피살되기 전에, 나중에 유방의 중신들 예를 들어 조참, 주발, 하후영과 같은 사람들은 당시에 겨우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번쾌는 나중에 유방과 항우가 함께 이유를 격파한 후 다시 '동군을 포위공격'하고나서야 비로소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다.(사기 한서의 이 몇 명의 열전을 보라). 여기에서 항량은 한꺼번에 10명의 이 급의 장수를 보낸 것이다. 항량의 동기를 의심해볼 수밖에 없다. 이들을 파견하는 것은 섞어놓기 위함일 것이다.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유방은 진군(秦軍)과 대치하고 있었고, 항량에 투신한 것은 그의 도움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항량은 자연히 이 기회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두게 되면 유방을 통제하기 더욱 편리해진다.

 

유방이 항량에 투신한 후, 기본적으로 항우와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 이를 보면 추측할 수 있다. 유방은 비교적 독립된 파벌로 항우의 지휘를 받은 것이다. 그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은 그가 원래부터 데리고 다닌 9천명에 한정되었을 것이다. 전투손실과 항량이 섞어넣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더욱 적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기에서 유방이 병권을 빼앗겼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개인무장세력을 제외하면 그가 기본적으로 다른 부대를 지휘할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방은 당시에 강대한 실력을 지니지 못했다.그러나 항우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것은 음미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사항이다.

 

한가지 해석은 유방이 항우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이다. 항씨의 기타 세력과 연합하여,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측이 작위를 댓가로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항씨의 기타세력이 승리한 측이 되었지만, 절대적인 우세는 점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 항우에게 다시 병권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방의 정치적 안목은 이런 상황하에서 자신의 미약한 세력으로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좌우에서 모두 득을 보는 것이다. 유방은 여러번 항우를 따라 전투에 참가했으므로 항우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그와 싸우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 뿐아니라, 쉽게 항우의 보복을 불러온다. 항우는 보기에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다. 만일 항우가 이때 그에게 해꼬지한다면, 홍문연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일지 말지를 놓고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추측으로 유방은 이번 권력투쟁에서 중립을 유지했을 것이다. 혹은 근본적으로 권력투쟁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항우세력을 제약하고 약화시킬 목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는 특별히 일부 원래 항우의 밑에서 일하던 장수를 발탁했는데, 유방도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항량이 죽은 후, 초군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된다. 항씨의 기타 세력 특별히 항우보다 배분이 높은 사람들은 항우를 배척하고, 외성세력과 연합하여 초회왕의 지지를 받아내고, 잠시 초군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한다. 항우는 병권을 박탈당한다. 다만 여전히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전히 한편으로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유방, 영포(英布), 포장군(浦將軍)등 일부 비교적 독립적인 장군들은 일정한 중립을 지켰고, 그중 유방등 원래 항우의 아래에 있던 장군들이 발탁된다. 이렇게 하여 항우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초회왕은 항씨의 기타 사람들의 지지를 통하여 항우의 병권을 빼앗고 일부 소규모 집단을 흡수하여,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을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허수아비의 지위를 벗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