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관첩(關捷)
청태종이 한때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의 비를 공이 있는 대신에게 하사한 적이 있는가?
여러해동안 이런 주장이 있었고, 마치 진짜같이 들린다:
홍타이시(청태종)의 측비(側妃)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는 예허(葉赫)의 패륵(貝勒) 아나부(阿納布)의 딸이다. 처음에 정황기(正黃旗) 카르카마(喀爾喀馬)에게 시집간다. 카르카마 패륵은 우라나라씨(烏拉那拉氏)로 부잔타이(布占泰)와 같은 일족이다(만주어 옛기록에 따르면 부잔타이의 동생이라고 한다), 나중에 예허부로 도망쳐서, 진타이스(金台石) 패륵이 길러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둘째아들은 우누춘(烏努春)이다. 천명4년, 예허부를 정벌하고, 카르카마 패륵은 홍타이시에게 죽임을 당한다. 예허나라씨는 홍타이시의 후비가 된다; 천총2년 십이월, 황오자 슈어사이(碩塞)를 낳는다. 그후 일찌기 내대신(內大臣)을 지낸 잔.투세투(占.土謝圖)의 처가 된다. 그 일자는 미상이다. 잔.투세투는 사냥때 호랑이게게 물려서 죽는다. 그리고 다시 다르후(達爾琥)에게 시집간다. 다르후는 하다부(哈達部) 거부루(格布祿) 패륵의 일족이고, 일찌기 상황기(鑲黃旗) 경거도위(輕車都尉)를 역임한다. 예허나라씨는 나중에 다르후의 집에서 죽는다. 죽은 날짜는 미상이다.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마치 막장드라마같다. 역사같지가 않은 것이다. 필자는 왜 이렇게 평가하는가? 이유는 아래와 같다.
만일 정말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사(正史)의 홍타이시 후비열전(后妃列傳)에 아예 이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어버린 예허나라씨의 전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사고>이든 아니면 <청황실사보>이건 이 비의 이름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홍타이시의 15명의 여인중 8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만일 이 예허나라씨의 운명이 그렇게 비천하다면 그녀가 낳은 아들 즉 홍타이시의 다섯째 아들 슈어사이가 나중에 그렇게 높은 작위에 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홍타이시의 11명의 아들 중에서 단지 3명만 봉한 친왕중 하나 그것도 철모자왕(鐵帽子王)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2003년 선양 북릉(北陵)의 고고성과는 예허나라씨가 홍타이시와 함께 묻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2003년 7월 29일의 <심양만보>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밀림 깊은 곳에, 선양시 문물고고연구소의 고고인원들은 땀을 비오듯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전당의 북쪽에 11기의 후비묘가 있다. 묘장은 4개씩 한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두 줄이다. 앞줄의 서쪽에 남북향으로 두 개의 묘가 매장되어 있다; 동쪽에는 하나의 묘장이 있다. 비록 360여년의 비바람에 침식되었지만, 묘장의 '봉토'는 여전히 존재하여 신기하게 여겨진다. 단지 가득 차 있는 수목은 묘장의 위, 침원 안에 어지럽게 자라고 있어, 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황실후비의 안식처를 덮고 있다. 선양고궁박눌원 연구실주임, 사학가 퉁웨(佟悅)는 마침내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그는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에, 홍타이시는 해서여진(海西女眞)의 만주족부락과 정략결혼을 많이 했다. 나중에 몽골족과 정략결혼한다. 선양고궁 봉황누대에 오궁양전(五宮兩殿)의 황후, 비자는 모두 몽골족이다. 그중 황후 보얼지지터씨 저저(哲哲), 장비 부무부타이(布木布泰)를 제외하고, 나머지 비는 모조리 귀비침원에 매장되었다.
청나라초기 만조족은 화장(火葬)을 했다. 강희연간이후 토장(土葬)을 실행한다. 1643년 홍타이시는 "아무런 질병없이 단정하게 앉아서 붕어한다."; 1644년, 장비는 순치제를 보좌하여 베이징으로 간다. 홍타이시의 비도 같이 베이징으로 간다. 청나라초기의 장례제도규정에 따르면, 황제보다 먼저 죽든, 후에 죽든, 황후, 비는 모두 황제와 합장한다. 이들 비는 지위가 비교적 낮아서, '직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죽은 후에 화장을 했고, 유골을 "혼관(魂罐)"에 넣은 후, 다시 홍타이시 서쪽의 귀비침원에 매장했다. 귀비침원은 소릉(昭陵)의 일부분이므로 황제와 합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웨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귀비침원에서, 매장된 홍타이시의 비는 다음과 같다: 신비 보얼지지터씨 하이란주, 귀비 나무종, 숙비 바터마, 원비 뉴후루씨, 계비 우라나라씨, 측비 예허나라씨, 자루터씨, 서비 나라씨, 치레이씨, 얜자씨, 이얼건줴뤄씨. 분석에 따르면, 이 침원은 순치연간이후에 만들어졌다. 11명의 비는 차례로 이곳에 매장된다; 매장된 사람의 연령으로 추단하면, 강희연간까지 여전히 비는 이곳에 매장되었다."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두번 외인에게 시집간 여인이 죽은 후에 다시 데려와서 전남편과 합장되는 것을. 일반 백성의 집안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황실에서야.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홍타이시는 측비 예허나라씨를 대신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은 청나라황실에 관련된 모든 헛소리들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근거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청태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태종 홍타이시의 특이한 혼인관계 (0) | 2010.06.28 |
---|---|
청소릉(淸昭陵, 청태종의 능)에 얽힌 네가지 수수께끼 (0) | 2007.02.01 |
청태종이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바꾼 이유는? (0) | 2007.01.10 |
청태종의 딸들 (0) | 2006.05.01 |
청태종과 그의 후궁 (0) | 2005.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