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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청태종)

청소릉(淸昭陵, 청태종의 능)에 얽힌 네가지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07. 2. 1.

"소릉은 청태종 황태극(皇太極, 홍타이시)의 능이잖아. 안에는 궁전과 능묘를 제외하면 볼 게 아무 것도 없다" 청소릉을 가본 심양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런, 소릉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가 있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첫번째 수수께끼: 효장황태후는 왜 소릉에 묻히지 않았는가?

 

최근들어 청나라 역사드라마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청나라때의 걸출한 여자정치가인 효장황태후(효장 또는 장비라고도 함)는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태종의 부인인 효장은 남편과 함께 청소릉에 묻히지 않고, 준화의 소서릉(昭西陵)에 묻혔다. 심양의 청소릉청사연구소 부주임인 서훼(徐卉)는 "이 문제에 대하여, 청사학계에는 세 가지 주장이 있다. (1) 효장이 임종전에 말하기를 태종이 이미 성경(盛京, 심양)에 안장된지 오래 되었으니, 다시 나때문에 지궁을 열어서 합장을 하지 말고, 자신은 효릉(순치릉)의 곁에 있으면 된다고 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설, (2) 효장이 이미 섭정왕 도르곤에게 재가하였으므로 태종릉에 다시 묻히기 곤란해서 그렇다는 설. 다만, 효장이 개가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다. (3) 청나라 초에 성행하였던 화장제도를 효장만년에는 이미 폐지하였는데, 소릉에 묻히려면 화장(火葬)을 하여야 하였고, 효장은 화장하는 것을 겁내서 관내에 개장할 것을 요청했다는 설이 있다" 세가지 중에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아직 사학계에서 더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두번째 수수께끼: 왜 하필 "소(昭)"를 능의 이름으로 삼았는가?

 

청태종의 묘는 왜 "소(昭)"로 이름을 정했는지에 대하여, 이러한 이름은 순치원년(順治元年) 8월 9일, 청태종이 사망한 1주년에 화장하면서 확정된 것이다. 능이름의 내력에 대하여 사학계에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첫번째 견해는 당태종의 소릉을 본뜬 것이라는 것이다. 건륭제가 성경을 동순할 때, 소릉에 제사를 지내면서 이런 견해를 밝혔었다.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릉의 석마(石馬)가 당태종 이세민의 '육준도(六駿圖)'를 본떠 만들었다는 것이다. 육준이 새겨진 것은 이세민이 생전에 타던 여섯 필의 보마인데, 청소릉의 석상중에도 두 필의 석마가 있다. 바로 대백(大白)과 소백(小白)이다. 이것은 청태종이 생전에 타던 말이며, 전쟁터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웠었다. 또 하나는 청태종과 당태종은 모두 두번재 개국황제이고, 두 사람의 묘호도 다 '태종'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견해는 '소'를 고른 것은 그 글자 자체의 의미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태종의 문덕과 무공이 세상을 밝혔다는 의미에서 밝을 소를 고른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여전히 확정하기 힘들다.

 

세번째 수수께끼: 호릉수(護陵獸)는 왜 쇠줄로 묶여 있는가?

 

청소릉의 융은전(隆恩殿)의 뒤에는 유리기와를 한 석주문이 있다. 문의 양측에는 방형의 석주가 있는데, 꼭대기에는 남쪽에 앉아서 북쪽을 바라보는 석수(石獸)를 조각해놓았다. 전설에 의하면, 능침의 지궁문은 바로 돌제단의 아래에 있고, 두 마리의 석수는 능을 호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호릉수의 몸에 쇠줄이 있고 석주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두 기둥의 석수를 조각할 때, 석장의 손이 상처를 입었고, 피가 석수의 몸에 떨어졌다. 몇년 후, 석수는 영기가 있어, 자주 능앞의 호성하까지 나와서 물을 마시곤 하였다. 그리고 자주 능을 지키는 관병들을 상하게 했다. 일시에 능을 지키는 관병들의 인심이 흉흉해 졌다. 능을 지키는 관리들이 조정에 보고하였고, 황상은 석수를 쇠줄로 석주에 묶어두라고 하였다. 당연히 이것은 전설일 뿐이다. 왜 석수의 몸에 쇠줄을 묶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네번째 수수께끼: 사신묘(蛇神廟)는 누가 만들었는가?

 

청소릉의 정홍문(正紅門)에서 동쪽으로 약 40미터 떨어진 곳에 사신묘가 있다. 원래 사신묘는 청나라 말에 이미 무너졌었고, 현재의 사신묘는 1926년을 전후하여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누가 사신묘를 세웠는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번째 견해는 당시 요녕성장이던 막덕혜(莫德惠)가 청소릉을 보러 왔을 때, 사신묘가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는 돈을 내서 사신묘를 새로 짓게 하였다는 것이다. 두번째 견해는 한 장군과 처가 북릉의 별장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의 처가 꿈에 뱀 한 마리가 신발에서 탁자위로 올라와서는 거망(巨)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았다. 망사(蟒蛇)는 그녀에게 "나는 이미 신선이 되어 득도하였다. 그런데 머물 장소가 없다. 만일 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내가 장군을 도와 부친의 원수를 갚게 해주겠다"라고 하였다. 처는 잠을 깬 후에 이 꿈얘기를 해주고, 장군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처가 자꾸 권하고, 그도 복수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서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신묘를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