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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청태종)

청태종과 그의 후궁

by 중은우시 2005. 8. 6.

청태종(1592-1643)의 정실부인은 보통 봉황루(鳳凰樓)의 5대푸진, 일후사비(一后四妃)로 불리우는 다섯 여인이다. 이 다섯 여인은 모두 몽고족이며, 모두 보얼지지터씨이다. 본인이 만주족이면서, 5명의 정실부인을 모두 몽고족으로 그것도 같은 성씨로 취하였다는 점에서 역대의 제왕에게서는 유일한 경우이다. 그러나, 청태종의 이런 혼인정책은 후에 명나라에 대항하면서 막남몽고(漠南蒙古. 현재의 내몽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데 도움을 준다. 몽고는 당시 막남몽고, 막북몽고, 막서몽고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막남몽고의 실력자는 차하얼이고 커일친도 속해 있으며, 막서몽고(현재의 신강)에는 준가르가, 막북몽고(현재의 외몽고)에는 커얼커가 있다.


중궁(中宮) 청녕궁(淸寧宮) 황후(皇后) 보얼지지터씨(博爾濟吉特氏) 저저


동궁(東宮) 관조궁(關조宮) 신비(宸妃) 보얼지지터씨(博爾濟吉特氏) 하이란주


서궁(西宮) 인지궁(麟趾宮) 귀비(貴妃) 나무종(那木鍾)


차동궁(次東宮) 연경궁(衍慶宮) 숙비(淑妃) 바터마 차오(巴特馬 璪)


차서궁(次西宮) 영복궁(永福宮) 장비(庄妃) 보얼지지터씨(博爾濟吉特氏) 부무부타이


첫째, 중궁 황후는 몽고(蒙古) 커얼친(科爾沁)의 패륵(貝勒)인 망구스(莽古思)의 딸로 이름은 저저(哲哲)이다.


커얼친몽고의 왕족인 보얼지지터씨는 징기스칸의 동모동생인 하사얼(哈薩爾)의 후손으로, 비록 몽고 대원제국의 직계는 아니나, 몽고의 혁혁한 귀족집안의 하나였다. 당시 커얼친몽고로서는 서쪽에는 대원제국의 직계인 차하얼(察哈爾)의 세력이 남쪽에는 대명(大明)이 동쪽에는 건주여진이 버티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커얼친몽고는 건주여진과의 연합을 선택하며, 이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


커얼친몽고왕족과 만주황족간의 결혼은 망구스의 둘째 동생인 밍안왕야(明安王爺)로부터 시작한다. 9부연합으로 건주여진을 치러가는데 참여했던 밍안왕야는 누르하치의 무서움을 느끼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와 통혼하게 된다. 1612년에 밍안왕야는 자신의 딸을 누르하치의 부인으로 보내는데, 이것은 커얼친몽고왕족과 건주여진왕족과의 첫번째 혼인이 된다. 이것은 종전까지는 몽고족에게 여진족은 주얼치터(珠爾齊特)로 불리웠는데, 몽고대한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하인 속국이라는 의미였다. 이제 밍안왕야가 누르하치에 딸을 보낸 것은 두 부족이 이제는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밍안왕야가 누르하치에 딸을 보낸 후 3년째 되는 해에 큰 형인 망구스와 셋째 동생인 콩궈얼은 모두 자신의 딸을 건주여진으로 시집보낸다. 콩쿼얼은 자신의 딸을 여전히 누르하치의 처로 보냈으나, 망구스는 당시 22살인 황팔자 황타이지에게 자신의 딸인 15살된 저저를 시집보낸다. 이것은 망구스에게 남다른 안목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당시 누르하치의 15 명의 아들중에서 12명의 아들이 저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귀한 것으로 따지면 둘째 따이샨, 다섯째, 망구타이, 열째, 더거레이와 황타이지가 모두 적출이었으므로 아래위를 따질 수 없었다. 전공으로 따지면 당시의 황타이지는 아직 출중한 정도는 아니었고, 모두 이미 전쟁터에 여러해 참여한 형들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나, 망구스는 황타이지를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11년후와 20년후에 다시 자신의 손녀딸 두명(관조궁 신비, 영복궁 장비)까지 황타이지에게 시집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망구스의 보얼지지터집안은 5대에 걸쳐 대청황조에서 4명의 황후, 3명의 황비와 10여명의 친왕푸진을 배출한다.


1614년 망구스왕야는 친히 딸 저저를 데리고 건주여진의 국경을 넘어들어온다. 이 소식이 들리자, 누르하치는 여덟째아들 황타이지를 수백리 앞까지 보내서 휘파하 유역까지 마중을 하게 하고, 휘파의 후얼치산성에서 환영연회를 베풀어주고, 성대한 결혼식을 거행한다. 그리고, 저저는
황타이지의 정실 부인이 된다.


저저가 결혼하기 전에 황타이지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하나는 뉴구루씨로서 황타이지의 첫 부인이다. 그녀는 누르하치의 생사지교이자 개국오대신중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어이두(額亦都)의 딸로서, 후금의 최고 명문귀족집안의 딸이었다. 저저가 시집가기 이미 3년전에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나았는데 이름은 워보후이(洛博會)이다. 그런데, 이 아들은 7살도 안되어 요절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우라나라씨(烏拉那拉氏)로서, 저저가 시집오기전 5년전에 이미 청태종의 장자인 하오거(豪格, 하오거는 청초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인물로 세습 8대철모자왕중의 하나인 숙친왕이며, 저저보다 9살이 어렸다)를 낳았다. 2년후에 다시 둘째 아들 뤄거(洛格)를 낳았고, 또 장녀도 낳아서 2남 1녀를 두었다. 우라나라씨는 바로 누르하치의 대비인 아바하이의 고모였으므로, 이 두 부인도 집안 배경이 만만치 않은 편이었지만 이들은 1후4비에 들지 못한다. 청태종의 1후4비에 만주족이 한 명도 없고, 몽고족으로만 구성했다는 것은 청태종의 특이한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저는 아들 복은 없어서 딸만 셋을 낳았다. 1625년에 황2녀 마커다(馬喀達)를 낳고, 1628년에는 황3녀를 낳았으며, 1634년에는 황8녀를 낳는다. 그녀는 결국 아들은 낳지 못하고 만다.


둘째, 동궁 신비는 황후 보얼지지터씨의 조카로 이름은 하이란주(海蘭珠)이다.


즉, 망구스의 외아들인 싸이상(塞桑)의 큰딸이다. 싸이상은 모두 4남 2녀를 두었는데, 만주시리(曼珠習禮), 우커샨(吳克善), 쒀눠무(索諾穆), 차한(察罕)의 네 아들과 하이란주, 부무부타이(布木布泰, 차서궁 영복궁 장비)의 두 딸이 그들이다. 하이란주는 부무부타이보다 5살이 많아 1608년생이었데 부무부타이에 비하여 9년 늦게 황타이지에게 시집을 온다.


하이란주는 1634년에 황타이지와 결혼하는데, 그 때의 나이가 이미 26살이었고, 황타이지는 43세였다. 하이란주가 26살이 되어서야 황타이지와 결혼한데 대하여는 명확하게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차하얼부의 린단한이나 그와 관련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차하얼부가 건주여진에 정복당하면서 하이란주는 의지할 곳이 없어 다시 커얼친몽고로 돌아갔고, 아마도 저저와 부무부타이가 황타이지에게 얘기해서 황타이지에게 개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이란주는 황타이지에게 시집을 오자마자, 황타이지의 총애를 독차지해버린다.  만일 황후 저저가 그녀의 고모가 아니고, 황후 저저가 누르하치에 의하여 정실 부인으로 지명된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일찌기 하이란주가 황후의 지위를 차지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중궁은 아니지만 영향력에 있어서는 이미 중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이란주가 시집온 후 3년이 지난 1637년 7월 8일 그녀는 황팔자를 낳는데, 정실부인(1후4비)가 낳은 첫번째 아들이 된다. 황태극은 매우 기뻐하며, 청나라의 기존의 관례를 깨고, 황궁에서 성대한 축하행사를 숭정전에서 거행하고, 청나라의 첫번째 대사면령을 내리며, 황팔자를 황저(皇儲, 차기황제 즉 황태자)에 봉한다. 아이가 금방 태어나자마자 태자로 봉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릴 정도였던 것을 보면 황타이지의 하이란주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고, 조선 등지에서도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절과 공물을 보내왔다.

 

그런데, 이 황태자는 6개월도 살지 못하고, 천연두를 앓아 1638년 1월 28일에 죽고 만다.  그해 망구스의 처(저저의 모친)는 며느리인 차이상의 처(하이란주와 부무부타이의 모친)과 손자 만주시리, 우커샨을 데리고 성경(청나라수도)으로 온다. 청태종은 망구스의 처에게는 화석복비(和碩福妃)에 봉하고, 차이상의 처에게는 현비(賢妃)로 봉하는데, 만주황족이외에 이런 대우를 받은 집안은 보얼지지터씨밖에 없다.


1641년 9월 17일, 자식을 잃은 후 우울해하던 하이란주는 결국 병으로 죽게 된다. 황타이지는 몇날 며칠을 통곡할 뿐아니라 6일 밤낮을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고, 설날에도 가무음곡을 금하여 국상과 마찬가지로 처리하였다. 결국은 졸도까지 하였다. 그리고 청태종은 하이란주를 위하여 초제, 월제, 대제, 동제절령제, 세모제 등등 각종의 제사를 지냈고, 제사때마다 왕공신하는 물론 모든 푸진들도 참여하도록 하였다. 하이란주의 상중에 음악을 즐겼던 관리와 종실은 모두 관직을 삭탈했고, 몽고와 조선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애도했다. 사실상의 국상이었다.


셋째, 서궁 귀비는 나무종이다. 그녀는 원래 몽고 아바하이군왕(阿覇垓) 어치거눠얀(額齊格諾顔)의 딸로서 차하얼(察哈爾)의 린단한(林丹汗)의 부인으로 양양태후(襄襄太后)였다. 린단한이 죽은 후에 후금에 투항하였고, 황타이지는 양양태후를 처로 삼았다. 나무종 귀비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황11자 보모모궐(博穆博果爾)이다.


1635년 청태종은 뚜얼곤, 하오거, 웨투오, 싸하롄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서쪽 정벌에 나서 린단한의 잔여무리를 소탕하였고, 도중에 맞부딛친 린단한의 대푸진 양양태후를 붙잡아 투항시키고, 다시 린단한의 다른 부인 쑤타이태후(蘇泰太后)도 설득하여 투항을 받아낸다. 쑤타이태후는 아들(즉, 린단한의 후계자)인 어저(額哲)을 데리고 왔을 뿐아니라, 원나라에서 전해오넌 전국옥새(傳國玉璽, 화씨벽으로 만든 전국옥새가 아닌 다른 것으로 밝혀지나 청태종은 이를 전국옥새라고 널리 퍼뜨린다)도 바친다.


이 때 양양태후와 쑤타이태후는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왔는데, 양양태후가 1,500호, 쑤타이태후가 1,000호를 이끌고 왔다. 동시에 두 태후는 많은 몽고부인과 딸들도 데리고 왔다. 황타이지는 이미 이 때 더우투먼푸진(차동궁 연경궁)을 처로 취한 상태였고, 이미 선례를 만들어 두었으므로 여러 패륵들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도록 허가하였다.


하오거는 차하얼한의 보치푸진을 골랐고, 아바타이는 차하얼한의 어얼저투 푸진을 골랐으며, 지얼하랑은 먼저 죽은 처의 여동생인 쑤타이태후를 요청했고, 청태종도 허락하였다. 그런데, 대패륵 따이샨도 쑤타이태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청태종이 지얼하랑에게 먼저 허락했고,
지얼하랑은 쑤타이태후의 형부였으므로 보다 적절하였다. 황타이지는 그리하여 따이샨에게는 양양태후를 취하도록 권유하는데, 따이샨은 양양태후가 재산을 적게 가져온 것으로 보고 싫다고 하며 재산을 많이 가지고 온 차하얼한의 딸 타이송거거(泰松格格)를 택한다. 그리고 나서 황타이지는 양양태후를 자신이 가지게 된다.


후에 나무종의 아들인 보모보궐은 부인 동악씨를 형인 순치제에게 빼앗긴 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다(이 부분은 순치제의 후궁을 다루면서 언급할 것임).


넷째, 차동궁 연경궁 바터마 차오이다. 원래 차하얼 린단한의 더우투먼푸진이었다. 린단한이 죽은 후 무리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였으며, 황타이지는 그녀를 처로 삼아버린다. 원래 그녀는 린단한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황타이지는 그 딸을 예친왕 뚜얼곤의 처로 주어버린다.


1634년 린단한이 죽은 후, 차하얼의 귀족인 뚜오니쿠루커(多尼庫魯克)은 떠오투먼푸진을 호송하여 황타이지의 군영으로 와서 황타이지를 배알한다. 그 후 황타이지에게 더우투먼푸진을 받아줄 것을 요청한다. 황타이지가 머뭇거리자, 따이샨과 여러 패륵들은 황타이지에게 이를 허락할 것을 요청하며, 더우투먼푸진을 궁중에 받아들여야 이들의 마음이 비로소 귀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황타이지는 결국 더우투먼푸진을 취하는 것이 차하얼부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결정은 매우 훌륭했다. 뚜오니쿠루커를 비롯한 차하얼부의 호송인원들은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기뻐하였다.


다섯째, 차서궁 영복궁 장비이다. 이름은 부무부타이로 황후 보얼지지터씨의 질녀이고, 동궁 신비의 5살어린 동생이다. 그러나, 황타이지에게 시집을 온 것은 신비보다 9년이 빠르다. 이 여인이 청나라초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후일의 효장태후(孝庄太后)이다.


장비는 딸만 셋을 나은 후에 황구자 푸린(福臨)을 낳게 된다. 그녀는 16세인 1629년에 황4녀 야투(雅圖)를 낳고, 1632년에 황5녀 아투(阿圖)를 낳으며 1633년에 다시 황7녀를 낳는다. 결국, 황타이지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고모인 저저와 질녀인 부무부타이는 딸만 내리 6명을 낳게 된다.


이 때 황타이지에게는 장자 하오거 이외에도, 황4자 예부수(葉布舒)가 있었고, 황5자 숴사이(碩塞)가 있었다. 예부수는 서푸진(庶福晉) 얀자씨(顔札氏)의 소생이었고, 숴사이는 측푸진(側福晉) 예허나라씨의 소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얼지지터씨인 저저, 부무부타이, 하이란주를
비롯한 커얼친몽고에서는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이란주보다 6개월 후에 임신하여 황9자 푸린을 낳게 되는데, 푸린이 태어나기 2일전에 황태자로 봉해졌던 하이란주의 아들은 천연두로 사망하게 된다. 청태종은 황태자의 죽음으로 인한 상심이 커서 푸린을 낳은 장비는 제대로 돌보지 않게 되고, 이후 에도 장비, 푸린 모자는 청태종의 관심밖에 있게 된다.


장비에 얽힌 이야기중의 하나는 장비가 대명의 장군 홍승주를 설득하여 청에 귀순하게 하였다는 것이 있다.

 

이후 장비는 청태종의 사망후 하오거와 뚜얼곤의 대치상태를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인 푸린을 황제로 앉히는데 성공한다. 푸린은 후에 순치제가 된다.


효장과 뚜얼곤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고, 효장태후가 뚜얼곤에게 재가하였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뚜얼곤이 후에 황숙부섭정왕에서 황부섭정왕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바로 뚜얼곤이 순치제의 모친인 효장과 결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둘째,
뚜얼곤이 죽은 후에 황제에 추증되는데, 그것은 바로 황제인 순치제의 모친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셋째, 효장은 죽은 후 남편인 청태종이 있는 심양에 묻히지 않고, 북경의 청동릉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는데, 그 이유는 재가한 것으로 인하여 청태종과 합장되는 걸 꺼렸다는 것이고, 넷째, 강희제는 효장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도, 생전에 효장의 시신을 잠안전에 두고 안장하지 않았는데, 재가한 것에 대한 부담때문이었다는 것이고, 다섯째, 뚜얼곤의 죄상으로 나오는 것중에 '후궁에 임의로 드나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간접적으로 효장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것등의 이유를 든다. 물론, 이에 대하여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결론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다. 결혼한 것에 대하여도 (1) 효장과 뚜얼곤은 원래 사통하는 관계였다는 설에서 (2) 효장이 순치제를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재가함으로써 뚜얼곤이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제어했다는 설과 (3) 뚜얼곤이 강제로 효장을 취하였다는 등의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