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청태종)

청태종 홍타이시의 특이한 혼인관계

by 중은우시 2010. 6. 28.

글: 유계흥(劉繼興)

 

청나라초기의 황제들은 혼인에서 정략결혼의 색채가 충만했다. 누르하치의 처첩중 사서에 기록된 자는 모두 14명이다. 그중 7명의 처첩은 정략결혼의 결과이다. 나머지 처첩들도 대부분 서로 다른 부락에서 왔다. 청나라초기에는 만주족-몽고족의 정략결혼이 성행했다. <<청황실사보>>권2의 기록에 따르면, 청태종 홍타이시는 몽골족 처가 7명으로, 그의 후비들 중에서 절반을 차지한다; 순치제 푸린의 몽골족 처는 6명으로 그의 후비들 중에서 1/3을 차지한다.

 

그중 청태종 홍타이시의 혼인은 가장 기이하다. 홍타이시의 처첩중 명호가 있는 후비는 15명이다. 이 15명의 후비들 중에서, 7명이 몽골초원에서 왔다. 후비들 중 지위가 가장 높았던 "숭덕오궁후비(崇德五宮后妃)"는 모두 몽골족여인이다. 게다가 두 명은 과부이다. 나머지 3명은 커얼친(科爾沁)부의 멍구스(莽古思) 집안의 고모조카관계인 3명이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을 왔다. 홍타이시의 혼인에서 기이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와의 사이에 딸을 낳은 적이 있는 측비인 보얼지지터씨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 적도 있다.

 

그렇다면, 천자의 고귀한 자리에 있던 청태종이 왜 과부를 두 명이나 부인으로 받아들였을까? 원래, 이 두 여인은 신분이 특수했다. 그녀들은 모두 몽골부락의 맹주인 찰합이(察哈爾)의 린단칸(林丹汗)의 부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린단칸이 죽은 후에 청태종에게 투항하였고, 천총8년과 천총9년에 차례로 청태종의 후궁에 들어왔다.

 

1632년(후금천총6년), 청태종은 팔기대군을 이끌고 몽골여러부락을 공격한다. 린단칸의 찰합이로 진격하여, 격전을 벌인 끝에 린단칸의 부대는 거의 절반이 사상당하며 대패한다. 린단칸은 대패후에 청해초원으로 도망간다. 2년후인 1634년, 민심이 이반된 린단칸은 청해에서 병사하다. 그의 부하들은 점차 와해되고, 그의 부인들도 새로운 살길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1634년 팔월, 린단칸의 후비중 하나인 두토문(竇土門) 푸진이 도니쿠루크의 호송하에 일행을 이끌고 청태종의 군영으로 찾아와서 귀순한다. 그리고 무후르 이지야르지방에 머물며 목축을 한다. 사실 당시 두토문푸진은 청태종에게 시집가고 싶어했으나, 스스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을 잘 헤아리는 대패륵 다이샨이 그 모습을 보고는 두토문푸진이 온 뜻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청태종에게 말했다. 이 여인은 하늘에서 내린 여인이니,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두토문 푸진은 아주 예쁜 여인이었다. 청태종은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았다는 악명을 들을까봐 우려했다. 그래서 계속 사양했다. 대패륵 다이샨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몽골 사람들의 투항을 얻어낼 수 있고, 우리의 동맹군이 될 수 있다. 다른 패륵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린단칸의 부하들의 투항을 받아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청태종의 마음도 움직였다. 사흘간 생각한 후에, 두토문 푸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청태종은 패륵들에게 그가 겪은 기이한 일도  얘기한다: 그가 행군도중에 나리트강에 주둔했는데, 꿩 한마리가 그의 군영막사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보기에 이는 미인이 들어올 길조였다. 두토문 푸진이 그에게 개가하는 것은 바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 하늘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청태종은 파크시시 푸진등을 보내어 두토문 푸진을 맞이하게 한다. 두토문 푸진을 호송한 도니쿠루크는 아주 기뻐하며 그들이 온 목적은 바로 두토문 푸진을 청태종에게 바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도니쿠루크는 사명을 완수했고, 청태종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

 

청태종이 두토문 푸진을 받아들인후 1년도 되지 않아. 1635년 삼월, 린단칸의 다라대푸진(多羅大福晉) 즉 정실부인인 낭낭태후(囊囊太后) 나무종(那木鍾)이 1천5백호의 무리를 이끌고 귀순한다. 사월, 린단칸의 또 다른 대푸진인 소태태후(蘇泰太后)가 그녀의 아들 어저(額哲), 즉 린단칸의 계승자 및 1천호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한다. 그리고 전국옥새를 바친다. 두명의 존귀한 태후와 함께 온 것은 또 다른 두 명의 측실인 백기태후(伯奇太后), 아이철의도(俄爾哲依圖)태후 및 린단칸의 여동생인 태송공주(泰松公主)등이 있었다.

 

이들 여인들 중에서, 자격이나 지위로 보면 낭낭태후가 가장 높다. 그녀는 몽골군왕의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아니라, 린단칸의 '정실부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존귀한 낭낭태후를 취해야 하는가?

 

당연히 지위각 자장 높았던 청태종이다. 청태종은 처음에는 이를 사양한다. 그러나 여러 패륵들이 권함에 따라, 청태종도 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나무종의 지위가 고귀했으므로 1636년 청태종 숭덕원년에 후비를 책봉할 때, 그녀를 서궁 인지궁귀비에 봉한다. 그녀보다 1년먼저 청태종에게 개가했던 두토문 푸진은 지위가 나무종에 미치지 못하여, 차동궁연경궁숙비에 봉해진다. 일찌감치 1625년에 이미 청태종에게 시집와있던 서궁비 부무부타이는 차서궁으로 밀려나서 영복궁 장비에 봉해진다.

 

청태종의 후궁들 중에서, 지위가 가장 존귀한 것은 "숭덕오궁후비"이다. 그녀들은 모조리 몽골족여인이었다. 상술한 두 명의 린단칸의 미망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몽골 커얼친부 망구스집안에서 나왔다. 이 세명의 비는 친고모조카간이다.

 

몽고의 커얼친부는 후금에 가장 먼저 귀순했다. 커얼친부 좌익의 수령인 밍안 패륵의 형인 망구스는 1614년에 딸을 청태종에게 보내어 처로 삼게 한다. 그녀가 바로 청태종의 중궁황후 효단문황후이다. 저저황후(哲哲皇后)로 불리는 여인이다. 만몽간의 혼인은 정략결혼으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1629년 청태종은 병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는데, 커얼친부의 23명의 패륵이 무리를 이끌고 뒤따른다. 그리고 명나라군대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1625년(천명10년), 커얼친 패륵 자이상의 아들인 우크산(吳克善)은 여동상 부무부타이를 청태종의 비로 보낸다. 이 여인이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장비(庄妃)이다. 자이상 패륵은 멍구스의 아들이다. 중궁황후인 저저황후와 형제간이다. 그러므로 장비는 중궁황후의 친조카딸이 되는 것이다. 장비는 순치황제 푸린의 생모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청나라의 세 황제를 거치는데, 바로 난세에서 태평성대로 들어서는 역사적 시기였다. 그녀는 황제를 보좌하여, 청나라궁중내부의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여 청나라초기 사회질서의 안정을 이루는데 기여한다. 후세에 그녀는 청나라의 국모라고 불리운다.

 

1634년, 우크샨은 다시 여동생 하나를 심양으로 보내어 청태종의 비가 되게 한다. 이번에 보내온 여인은 장비의 친언니인 하이란주이다. 그녀는 청태종이 신비(宸妃)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멍구스의 집안의 고모부터 조카까지 3명의 여인이 모두 청태종에게 시집가게 된다.

 

신비 하이란주는 청태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 그는 <<시경>>에서 애정을 노래한 싯구인 "관관조구, 재하지주, 요조숙녀, 군자호구"에서 이름을 따서 하이란주가 거주하는 궁을 '관조궁'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녀의 지위를 5궁 중에서 2번째로 높게 자리하게 한다. 그러나 하늘이 미인을 시기해서인지 신비 하이란주는 33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청태종은 비통해하며, 침식을 폐한다. 그러다가 혼절하기까지 한다. 청태종은 신비를 위하여 융중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혜공화원비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녀는 청나라의 후비들 중에서 시호가 가장 긴 여인이다.

 

신비를 잃은 후부터, 청태종은 조석으로 비통해하며, 먹는 것도 줄어든다. 신체가 갈수록 나빠졌고, 말에 두서가 없어졌다. 나중에, 여러 왕와 대신들이 그를 포하에 사냥하도록 권해서 데려간다. 그런데, 지나는 길에 신비의 묘를 지나게 되는데, 다시 가슴이 아파져서 대성통곡을 한다. 신비가 죽은 후 2년도 되지 않아 청태종도 저세상으로 가버린다. 청태종의 신비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는 역대황제들 중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다.

 

청나라 정권초기에, 통치자들은 유가의 사상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다. 청태종의 후비중에 이미 그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낳은 측비인 몽골 자루트부의 다이칭 패륵의 딸 보얼지지터씨가 있었는데, 청태종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킨다. 에허부의 더얼거이 타이지의 아들인 난추의 처로 보낸 것이다. 청태종은 일대의 제왕으로서 자신의 후비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키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고, 중국의 봉건왕조에서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