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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 신변의 구재인(九才人)

by 중은우시 2015. 1. 14.

글: 장문서(張文瑞)


원세개 일생의 영욕훼예(榮辱毁譽)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죽은지 백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정설이 없다. 원세개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의 도덕이나 문장은 제외하고라고 한 일은 적지 않다. 일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쓰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보아야 한다. 원세개는 만난 사람이 무수히 많다고 할 수 있고, 쓴 사람도 적지 않다. 민국초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대총통은 누구를 가장 신임하고, 누가 가장 능력이 있습니까?" 원세개가 답했다: "내가 가장 믿는 자는 구재인(九才人), 십책사(十策士), 십오대장(十五大將)이 있다." 


사람들이 상세히 묻자, 원세개는 답한다:


구재인: 서국인(徐菊人) 웅재(雄才), 양행성(楊杏城) 일재(逸才), 엄범손(嚴範孫) 양재(良才), 조지암(趙智庵) 기재(奇才), 장계직(張季直) 반재(槃才), 손모한(孫慕韓) 준재(雋才), 완두첨(阮斗瞻) 청재(淸才), 주집지(周緝之) 장재(長才), 양연손(梁燕孫) 민재(敏才).


십책사: 양석자(楊晳子) 선사(善辭), 왕일당(王一堂) 선모(善謀), 장종인(張鍾仁) 선단(善斷), 조윤전(曹潤田) 선계(善計), 육윤생(陸潤生) 선책(善策), 장중화(章仲和) 선치(善治), 왕곤보(汪袞甫), 김백병(金伯屛) 선문(善文), 고거육(顧巨六) 선도(善道), 시학추(施鶴雛) 선사(善事).


십오대장: 복장(福將) 왕빙경(王聘卿), 주장(主將) 풍화보(馮華甫), 중장(重將) 단지천(段芝泉), 유장(儒將) 장금파(張金波), 노장(老將) 장자지(張子志), 맹장(猛將) 장소헌(張紹軒), 수장(守將) 전환정(田煥庭), 용장(勇將) 조중삼(曹仲三), 대장(大將) 예단침(倪丹忱), 전장(戰將) 단향암(段香巖), 건장(健將) 뇌조언(雷朝彦), 승장(勝將) 육랑재(陸朗齋), 강장(强將) 강우징(江宇澄), 효장(驍將) 전온산(田韞山), 무장(武將) 진이암(陳二庵)


이상은 진공일(陳灨一)이 쓴 기록이다. 진공일(1882-?). 강서(江西) 신성인(新城人). 관료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원세개의 막부에서 일한 바 있고, 양사기(楊士琦, 자는 杏城)과 사촌관계이다. 나중에 장학량의 막부에서 기요를 맡는다. 민국17년(1928년) 정계를 떠나 경성,천진에서 교육과 저작활동을 한다. 진공일의 출신이력을 보면, 그가 쓴 원세개의 "구재인, 십책사, 십오대장"이라는 설은 믿을만 한 것을 보인다. 진공일은 이 설을 기록했을 뿐아니라, 원세개가 사람을 정확히 알아보고, 안목이 비범하다고 여겼다.


'구재인'에 관하여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웅재 서국인. 즉 서세창(徐世昌)이다. 천진사람으로, 광서제때 진사이며 한림원 편수의 직을 받는다. 병부상서, 민정부상서, 동삼성총독, 우전부상서, 군기대신 겸 정무대신, 헌정편수관대신, 협판대학사, 체인각대학사를 지내고, 태보(太保)의 직을 받는다. 민국3년에 국무경(國務卿)이 되고, 민국7년에 대총통(大總統)에 오른다. 서국인은 일찌기 부친을 따라 하남에서 타향살이를 한 적이 있으며 원세개와 알게 된다. 서세창은 강유상제(剛柔相濟)하고, 침온연달(沉穩練達)하다. 원세개가 임종전에 오열하며 서세창에게 말한다: "내가 어찌 황제를 칭하길 원했겠는가? 오로지 누군가 총통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부득이 강력한 힘으로 그런 생각을 소멸시키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일패도지할 줄은. 이런 일이 없었더라도, 1,2년후에는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덕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고, 재능이 부족하여 임기응변할 수 없다. 그런 때가 되면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과연 2년후, 서세창은 대총통에 오른다.


일재 양행성. 즉 양사기(楊士琦)이다. 안휘 사현 사람이다. 거인 출신이다. 원세개가 북양대신으로 있을 때 양사기는 막료장을 지낸다. 나중에 상부우참의, 회판전정대신, 독판윤선초상대신, 남양공학감독, 농공상부우시랑, 우전부대신, 민국정사당좌승을 지낸다. 양사기는 상부(商部)에서 오래 동안 일을 했고 규정대로라면 보수로 십여만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받지 않으며 이를 국가에 기부한다. 사람들이 왜 받지 않느냐고 물으니, 양사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지면 부자가 되겠지만, 버려도 가난하지 않다. 돈을 마땅히 유익한 사업에 써야 한다." 경자년, 양사기는 진유철로(津楡鐵路)를 관리한다. 팔국연합군이 천진을 공격할 때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이 날아왔다. 그러나 양사기는 태연자약하게 서탁에 업드려 이해득실을 써서는 문충공 이홍장(李鴻章)에게 보낸다. 이홍장은 양사기의 글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행성의 이 글은 일자일주(一字一珠)이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양사기의 형제가 8명인데, 양사섭(楊士燮), 양사보(楊士普), 양사성(楊士晟), 양사양(楊士), 양사기, 양사균(楊士鈞), 양사전(楊士銓), 양사총(楊士). 이들은 혹은 지방관이거나 능신이거나 준재이거나 명사였다. 누구 하나 평범한 자는 없었따. 부친 양전방(楊殿邦)은 조운총독을 역임했다. 양사섭등의 자식대에에는 양육장(楊毓璋), 양육감(楊毓), 양육전(楊毓), 양육수(楊毓秀), 양육영(楊毓瑩), 양육영(楊毓瑛)등이 있는데 모두 업적을 남긴다. 조손15명은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니, 청말민초의 일대기사라 할 수 있다.


양재 엄범손. 즉 엄수(嚴修)이다. 천진사람으로 광서제때의 진사이고, 한림원편수의 직을 받는다. 학부좌시랑, 탁지부대신, 민국교육총장, 참정원 참정을 지낸다. 과거제도를 고쳐 중국현대교육을 만든 것으로 세상에 유명하다. 장백령을 이끌고 남개학교 및 남개대학을 설립한다.


기재 조지암. 즉 조병균(趙秉鈞)이다. 하남 여현 사람이다. 현위보(縣尉保)에서 도원(道員)까지 오르고, 천진보정순경총판, 민정부(전 순경부) 우시랑, 민국 내무총장, 국무총리, 직예도독을 지낸다. 중국현대경찰제도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원세개가 대총통에 오른 후, 조병균은 사망한다. 어떤 사람은 원세개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지암이 아직 살아있다면, 핵심요직에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자 원세개는 탄식하며 말한다: "지암의 풍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마치 새에게서 날개를 떼어낸 것같다."


반재 장계직. 즉 장건(張)이다. 강소 남통 사람이다. 광서제때 장원을 하고, 한림원 수찬의 직을 받는다. 농공상부대신, 민국농상총장, 수리국총재등의 직을 지낸다. 거액을 모아서 실업을 창업한다. 장건은 글을 써서 판 수입으로 지방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이야 어딜 가든 재물을 모을 수 있지 않으냐. 하필 팔힘을 들여서 돈을 모으느냐?" 그러자 장건이 대답하다: "내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다만 먼저 내가 최선을 다 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지 않겠는가?" (槃, 물을 가득 담은 목반이다.)


준재 손모한. 즉 손보기(孫寶琦)이다. 절강 항현 사람이다. 음사로 관직이 4품에 이른다. 독일대신, 간서산동순무, 민국외교총장, 국무총리대리, 심계원원장, 재정총장, 새무처독판, 초상국총동을 지낸다. 손보기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공은 관직이 높은데 왜 교만해하지 않는가?" 손보기가 대답한다: "다른 사람을 모함할 수 있는 사람이 교만하다. 나는 모함할 줄 모른다. 그런데 어찌 교만하겠는가?"


청재 완두첨. 즉 완충추(阮忠樞)이다. 안휘 합비 사람이다. 도원으로 북양정부 원세개의 막부에 들어온다. 순천부 부승, 민국 총통부 비서장, 내사감을 지낸다. 장태염(章太炎)이 경사 용천사에 연금되어 있을 때, 원세개는 그가 문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혹세무민할까봐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완충추는 원세개에게 간언한다: "당나라의 무조(무측천)이 낙빈왕의 격문을 읽고도 그가 인재라고 여겼으며, 명나라때의 연왕도 방효유의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으려 생각했다. 장태염의 학술은 얻기 힘들 정도이다. 죄없이 죽인다면 공의 지혜가 연왕 무조보다 못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원세개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 포기한다.


장재 주집지. 즉 주학희(周學熙)이다. 안휘 추포 사람이다. 양광총독 주복의 아들이다. 거인으로 공명을 얻어 절강후보지부가 된다. 장호염운사, 직예안찰사, 민국 재정총장을 지낸다. 실업으로 성공한다. 주학희는 재정총장을 지내면서 힘들었다. 일찌기 이런 말을 한다: "국고가 텅비었고 외채를 계속 일으킨다. 한푼을 아끼면 한푼만큼 더 쓸 수 있다." 누군가 그가 너무 절약한다고 하였으나, 주학희는 대답한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어느 집이 가난한데 입고 쓰는데 사치한다면, 한때는 기분이 좋겠지만 조만간 거지로 전락할 것이다."


민지 양연손. 즉 양사이(梁士)이다. 광동 순덕 사람이다. 진사출신으로 한림원 서길사의 직을 받는다. 우전부우참의 겸 경한철로국총판, 우전부부대신겸대신, 민국총통부비서장, 재정차장겸교통은행총리, 국무총리를 지낸다. 


현재의 표준으로 보자면 위의 9명은 모두 장관급 이상의 고관이다. 백년전의 장관급간부는 아직 넘쳐나지 않았다. 이런 직위까지 오를 수 있다면 인재중의 인재이다. '현(賢)'이라는 말을 붙이는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어도, '능(能)'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있는 사람들이다. 청말민초는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때이다. 각지의 호걸등이 다 모여들었다. 무능하고 평범한 자라면 허명을 얻기 어렵다. 하물며 원세개는 인재를 잘 알아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공정하게 역사인물을 평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역사에 대하여, 학계의 태두인 진인각 선생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심사보고서에서 이런 단어를 쓴다. "이해의 동정". 필자의 생각으로 소위 이해라는 것은 전면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어느 일면을 보거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위 동정이라는 것은 역사사건을 존중하고 인물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심리상태와 언행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는 공부의 문제이고, 학술의 범주이니 그래도 쉽게 할 수 있다. '동정'은 개인가치판단 및 수양의 경지이다.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 아마도 동일한 역사사건 혹은 동일한 역사인물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난무하는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