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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 항성원씨집안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작산낙화(鵲山落花) 

 

원세개의 자는 위정(慰亭), 호는 용암(容庵)이다.  1859년 하남성 동남부의 항성(項城)이라는 작은 현성에서 출생했다. 항성은 청나라때 진주부(陳州府)에 예속되어 있었고, 경제문화가 모두 낙후된 지역이었다. 항성의 토지는 9천여(頃)이고 지대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았다. 동남부에는 늪지대가 있었다. 도랑은 여러해동안 수리하지 않아서, 홍수가 아니면 가뭄이었다. 비록 강수량이 충분한 지역이었고, 기온이 따스한 아열대지역이었지만, 항성지역은 토지가 척박했다. 양식작물은 보리(小麥), 고량(高梁), 조(穀子), 대두(大豆)등을 위주로 했다. 경제작물은 더욱 적었다. 이곳 땅은 땅콩조차 심을 수 없었다. 선통3년에 편찬한 <항성현지>에 따르면, 전체 현내의 경제작물중 가장 가치있는 것은 면화와 참깨였다. 토지는 척박하고, 자연재해도 빈번하여 항성의 백성은 일년내내 일하고 근검절약해도 힘들게 살았다.

 

아무리 빈곤하고 척박한 땅이라도 부자는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양극문화이다. 원세개는 비록 이 상점도 2,3십개밖에 없고, 토지도 척박한 작은 현성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조금도 힘들게 자라지 않았다.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다. 원세개가 태어난 항성 현지에서 원(袁)씨는 망족(望族) 가정이었다. 부친대에도 여러명이 과거에 급제했고,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다. 조부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항성원씨가족은 5대의 서향세가(書香世家)였다. 원세개의 어린시절은 '사대동당(四代同堂)'의 대가정 속에서 보냈다.

 

원세개의 부친인 원보중(袁保中)은 도광초년에 태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성이 총명하고, 근면하며 공부를 좋아했다"고 하였지만, 일생동안 얻은 최고학력은 수재에 상당하는 양생(痒生)이었다. 원보중은 집을 지켰다. 그는 젊었을 때 돈을 내고 동지(同知)의 벼슬을 받았지만, 부임한 적은 없다. 그는 일생동안 집안에서 장남, 장손의 지위로 집안일을 처리했다. 항성은 회남(淮南)에 위치하고 있어, 백성들의 기질이 강인하고 사나웠으며, 싸우기 좋아했다. 당지에 이런 습속이 있었다. 재난이 닥친 해 전호 빈민들이 곡식을 전혀 거두지 못하고, 입을 옷과 먹을 거리가 없으면 무리를 지어서 부자 지주의 집에 있는 양식을 털었다. 그것을 "검묘(撿苗)"라고 불렀다. 지주,부자들은 지방무장을 조직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이 조직은 "청묘회(靑苗會)"라고 불렀다. 청묘회는 도광 함풍연간에 염비(捻匪)가 성행하여 계속 조직을 확대한다. 그리하여 단련(團練)과 비슷한 지방무장조직이 된다. 이런 무장조직은 하남지역에더 대부분 "연장회(連莊會)"라고 불렀다. 원보중은 이 시기에 항성 현지에서 실력이 있는 단련무장조직을 만들었다. <항성현지>에 따르면 이 시기에 원보중은 여러번 단련을 이끌고 조정의 염비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실력이 커지고, 허리가 굵어지니, 자연히 말에도 힘이 들어간다. 원보중은 항성 현지에서 쌓은 염비소탕의 공을 내세워 지방의 정무에도 많이 간여했다. 강룡불압지두사(强龍不壓地頭蛇). 현지 관리들은 대부분 원보중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사람을 보내어 부탁하는 일은 대부분 들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씨자제는 항성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고, 아무도 말리지를 못했다. 그래서 "항성의 관리로 가는 것은 장사지내는 것이지 좋아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원보중에게는 형제가 2명 있었는데, 동생의 이름이 원보경(袁保慶)이다. 학력은 형보다 높아서, 원씨가족의 군계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보경은 함풍8년의 거인(擧人)이다. 과거급제후 숙부인 원갑삼(袁甲三)을 따라 안휘로 가서 염비를 소탕한다. 전공이 탁월하여, 거인이 된 해에 광록시서정즉보(光祿寺署正卽補)가 된다. 광록사서정은 궁정의 음식을 책임지는 육품관리이고, 즉보는 실제직위는 없고 자리가 비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함풍10년 모창희를 따라 하남으로 가서 단련을 독판하여 염비를 소탕한다. 이때 모창희에게 인정을 받아 사품경의 직함을 하사하고, 화령을 달 수 있도록 추천받는다.

 

동치5년 원보경은 산동제남후보지부의 신분으로 제남으로 가서 부임한다. 나중에 산동에서 염비를 소탕한 공로가 탁월하여, 동치7년 도원의 신분으로 산동에 주둔한다.

 

이때 원보경의 친한 일당이 먼저 성공을 거둔다. 그는 바로 양강총독으로 있던 마신이(馬新貽)이다. 그는 원보경을 강녕으로 데려오고, 후보도원의 신분으로 좌안독표영무처에서 일하게 한다. 주로 강녕방어군의 후방조달업무를 책임지는 것이다. 청나라관료사회에서 '후보도,만금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후보도원의 직위를 가지면 관운이 도래한다는 뜻이다. 후보도원의 신분을 얻은 후에는 개부건아(開府建衙)하고 봉강대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외에, 2품이하의 직위는 모두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당시에 '늑대는 많고 고기는 적은' 청나라관료사회에서 후보도원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실직을 가지거나 승진하는데 더 많은 기회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청나라관료사회는 부패했고 어두웠다. 특히 청나라말기의 관료사회는 돈으로 관직을 사고, 추천해주는 기풍이 성행했다. 당시의 사회에서 약간의 사회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왕왕 후보관원의 신분을 걸었다. 원보경이 있던 강소를 예로 들면, 당시 전체 성에 원보중처럼 후보도원의 지방고급관리가 이백여명에 이르렀다. 전체 대청왕조에서 실제 필요한 도원(道員)은 겨우 120여개이다(청나라의 행정도원 98개, 특수도원 20여개). 이렇게 관리가 붕어보다 많고, 곳곳에 붉은 관모를 쓴 사람이 돌아다니는 상황하에서 원보경이 다른 사람들보다 두각을 나타내려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만 원보경은 마신이라는 배를 탔고, 관운도 당연히 잘 풀렸다. 얼마후 원보경은 좋은 직위를 받는다. 서리강녕염순도(이 직위는 염법도라고도 한다). 강녕염순도는 강소지구의 소금업무를 주관한다. 강소절강지구는 자고이래로 염상이 모여있는 곳이다. 원보경이 이 직위를 받은 것은 좋은 직위중에서도 가장 좋은 직위를 받은 셈이다.

 

원보경이 강녕염순도에 부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역사상 유명한 자마안(刺馬案)이 일어난다. 마신이가 칼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비록 마신이는 죽었지만, 이 일은 원보경의 관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더욱 대단한 줄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마신이가 죽은 후, 증국번이 양강총독으로 온다. 증국번은 공명이 있고,전공이 있는 부하 원보경을 아주 아꼈다.

 

원보경은 증국번을 도와 이세충, 진국단사건등을 처리한 바 있었고 증국번의 말년에 중요막료가 된다. 동치12년, 원보경이 염순도의 자리에서 병사하자, 후사는 친한 친구인 오장경(吳長慶)과 친척 유명전(劉銘傳)이 처리한다. 그리고 사자(嗣子) 원세개로 하여금 영구를 고향으로 운구하게 한다.

 

원세개의 조부인 원수삼(袁樹三)은 형제가 4명이었다. 첫째가 원수삼이고, 둘째가 원갑삼(袁甲三), 셋째가 원봉삼(袁鳳三), 넷째가 원중삼(袁重三)이다. 원수삼은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신다. 둘째 원갑삼을 제외하고 나머지 동생들과 여동생들은 어려서 철이 없었다. 집안의 부담과 형제를 교육시킬 책임이 모두 원수삼의 어깨에 짊어지워지게 된다. 원수삼은 일찌기 우수한 성적으로 현학에 합격했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늠생(廪生)의 자격을 얻는다(이는 현재로 말하자면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다). 그러나 원수삼은 장남이어서, 학업을 해야할 뿐아니라, 집안일도 처리해야 했다. 그리하여 정력이 분산되어 이후 원수삼은 더욱 큰 공명을 얻지는 못한다.

 

어른이 된 후 동생 원갑삼과 같이 고향에서 사숙교사로 지내며 고향아이들을 가리킨다. 나중에는 진류현 훈도가 되어 현지의 교육업무를 담당했다. 그의 직위는 현재로 말하면 교육국 국장에 해당한다.

 

비록 지방의 낮은 관직을 맡았지만, 원수삼은 여러해동안 관직에 있었고, 일도 잘 했으며 사람됨이 근면하고 부지런했다. 그리하여 현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1843년 황하가 범람하여 개봉현이 물에 잠긴다. 원수삼은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성벽보수공사를 책임지는 직위를 맡는다. 원수삼은 전체 공사기간동안 업무를 잘 처리한다. 그러나 이때 너무 신경을 쓰고 피로하여 병이 들고, 일하던 도중에 사망한다. 이리하여 그는 원씨집안의 모범이 되고 사람들의 찬양을 받게 된다.

 

원수삼의 사람됨이 선량하고 언행거지가 올바르기 때문에, 원씨형제들이 밖에서 행동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원씨형제들은 큰형 원수삼을 아주 존경했다. 원갑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형이 길러주어서 클 수 있었다."

 

원수삼의 둘째동생 원갑삼은 원씨가족이 일어서게 만든 대표적인 인물이다. 원갑삼은 도광15년 진사가 되고, 북경에서 예부주사, 군기장경, 낭중, 어사, 급사중을 맡는다. 북경에서 모두 18년간 관직에 있었다. 원갑삼은 일생동안 정주이학을 신봉하고, 성리학서를 읽기를 좋아했으며, 성현의 학문을 연구했고, 실용과 실행을 중시했다. 원갑삼이 북경에서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고 올바르며 근면성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여 당조의 권력귀족을 많이 탄핵했다. 예를 들어 강서순무 진천의 뇌물죄를 탄핵하고, 호북순무 공유우를 엄벌하도록 탄핵했으며, 더더구나 정군왕 재전이 권세를 농단하는 것을 탄핵하여 이름을 중외에 떨친다. 그는 증국번과 같은 해에 과거급제하여, 동년의 우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주이학을 신봉하고 북경에서 18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친한 친구가 된다.

 

증국번이 강서성 주고(主考)로 쫓겨나서 가는 도중에 모친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북경에 있던 13살짜리 아들 증기택(曾紀澤)에게 집안 일을 부탁하며, 가산을 처분하여 온 집안이 이사를 하여 호남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지내고 법도를 지키라고 하였다. 증국번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고 나에가 후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보내며 찾아가서 도움을 부탁하고 여비를 마련하라고 하였는데, 그 명단에 "원오교동년(袁五橋同年)"이 있다. 오교는 원갑삼의 호이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 수 있다.

 

함풍연간, 태평군과 염군이 대강남북에서 굴기하고, 대청조의 반벽강산을 점령한다. 청나라정부는 조정대신을 지방으로 보내어 지방단련을 처리하고 비적소탕업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1853년 즉 함풍3년, 청정부는 공부좌시랑 여기현으로 하여금 안휘단련을 독판하게 하고, 강남도감찰어사 겸 병부급사중 원갑삼을 방판으로 삼는다. 안휘로 가서 염비를 소탕한다. 원갑삼은 이때부터 군대생활을 하게 된다.

 

원갑삼은 군공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후 십여년간, 강회대지를 전전하며 점차 관직이 조운총독으로 승진하고 안휘군무를 독판하는 1품의 흠차대신이 된다. 그는 증국번은 한 명은 북쪽에서 염비를 소탕하고 한 명은 남에서 태평군을 막았다.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며 대청의 국면을 지켜낸다. 그래서 원갑삼이 승보(勝保)에게 배척당해 북경으로 옮겨갈 때 증국번은 일찌기, "원오교가 북경으로 불려가니, 중주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라는 탄식을 한 바 있다.

 

원씨가족은 원갑삼이 염비소탕의 독판을 맡은 때부터 가족구성원 대부분이 염비소탕에 참가한다. 셋째동생 원봉삼은 큰형인 원수삼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교육업무에 종사했다. 우주에서 훈도를 맡았다. 비록 이 원봉삼은 교육업무를 하는 문직인원이지만, 원봉삼은 담량과 박력이 있는 인물이엇다.

 

이때 하남의 대지에는 염군의 주요활동지역이었을 뿐아니라, 많은 토비들이 기회를 틈타서 각지에서 백성을 노략질했다.

 

한해는 도적무리가 우주의 경내로 들어와 약탈을 했다. 그리고 '연장회'의 이름으로 우주경내의 남양산 골짜기에 모여서 난을 일으키고자 꾀했다.

 

당시 하남지방 단련과 군대는 모두 염군과의 회전에 참가하고 있어서,우주에서 토비를 소탕하는데 인력을 뺄 수가 없었다. 우주현령은 이 토비로 인하여 골치를 썩였다. 일찌감치 토벌하지 않으면 점차 세력이 커져서 양호위환(養虎爲患)이 될 수 있다. 이 토비들이 상당한 규모를 이루게 되면 처리하는데 훨씬 더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서 토벌하려니 자신의 수중에 병력이 없었다.

 

우주현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원봉삼이 앞장서서 나선다. 그는 단기필마로 토비의 소굴로 들어가서 말재주를 가지고 여러 토비들을 설득하여 해산시킨다. 원봉삼이 도대체 이들 토비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수수께끼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원봉삼의 기지와 용감을 알 수 있다. 옛날 설인귀가 단기로 회흘에 들어간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나중에 원봉삼은 우주성벽을 강화하는 일을 맡는다. 염군이 습격할 때, 그는 앞장서서 성문을 열어 우주의 사방에 흩어져 살던 빈민을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염군의 약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원봉삼은 관직이 낮았지만, 우주 현지에서 명성은 아주 높았다. 백성들은 그를 많이 칭송했다. 원수삼과 원봉삼은 간직이 낮아도 백성을 위해서 일했다. 관직이 낮더라도 백성을 위하여 일하면 백성들이 보기에는 하늘보다 높다. 아무리 관직이 높아도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똥보다 못하다.

 

넷째인 원중삼은 일생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집안에서 원씨집안을 돌보았다. 원씨집안이 나중에 지방에서 부유하게 된 것은 둘째 원갑삼이 고관을 지낸 영향이외에, 원중삼의 뛰어난 경제적 두뇌때문이다.

 

그가 집안 살림을 사는 기간동안, 형들이 지방에서 관직에 있으면서 보내오는 생활비를 그는 함부로 쓰지 않고 잘 모아두면서 전답을 구매했다. 그리고 남는 돈이 있으면 성안에 점포를 열었다. 이뿐아니라 그는 영향력과 관계를 이용하여, 항성 주변에 고리대를 놓았다. 원씨는 몇십년후 전답 4,5십경을 보유하고, 집 수백칸을 보유하게 되며, 부동산이 십수곳에 이르게 된다. 진주에 전당포를 두고 고리대를 놓는 외에 업무를 북경까지 확장했다. 북경천성형전장에도 지분참여를 한다. 원씨집안의 흥성에 원중삼의 공로가 적지 않다.

 

원세개의 증조부 원요동(袁耀東)은 양생이다. 일찌기 부친 원구지(袁九芝)를 따라 고향에서 사숙 선생으로 있었다. 나중에 임회의 망족 곽여정(郭汝廷)의 딸 곽씨를 처로 삼는다. 곽씨가 원씨집안에 시집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구지는 병사한다. 원구지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는데, 장남이 이진(利震), 차남이 요남(耀南), 삼남이 요선(耀先), 넷째가 요동이었다. 원구지와 형제 원구능(袁九能)은 젊었을 때 원각파(袁閣播)에서 장영(張營)으로 이사를 온다. 이 형제 두 사람은 모두 치부에 밝았다. 그들이 장영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전답 삼백여무로 늘인다. 원씨집안은 항성 현지에서 유명한 부잣집이 된다. 이때부터 원씨집안은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든다. 원구지가 죽은 후, 형제 4명은 각각 전답 팔십여무씩을 나눠가진다. 원요동은 일생동안 과거시험을 쳐서 공명을 얻으려 했고, 일생동안 글을 읽은 선비이므로 가업을 관리하는데 소홀했다. 그리하여 집안형편이 날로 나빠졌다. 그러나 그가 중년이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급한 마음에 폐병에 걸려 집안 재산을 많이 날리고 사십세에 세상을 떠난다.

 

원요동이 죽은 후, 남은 4남1녀는 곽씨가 기른다. 그중 장남 원수삼이 13세이고, 차남 원갑삼이 10살인 것을 빼면, 나머지 원봉상과 원중삼은 아직 어려서 철이 없었다. 가장 어린 딸은 아직 강보에 쌓여 있었다. 이때부터 곽씨가 집안일을 책임진다. 그리고 자녀를 교육시킨다. 몇몇 자식들은 관직에 나가게 되는 것이다.

 

곽씨는 오래 살았다. 건륭, 가경, 도광, 함풍, 동치, 광서의 여섯 황제가 재임하는 기간동안 살다가 광서원년 향년 99세로 세상을 떠난다. 만일 옛날 나이로 치면 100살까지 산 셈이다. 곽씨는 일생동안 근검절약했다. 그들 가족이 부귀하게 된 후에도 매일 간소하게 식사했다. 그리고 비단은 절대 입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선량하여 하남에서 청나라때 재난이 많았는데, 가뭄이나 홍수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곽씨는 죽집을 지어서 이재민에게 죽을 나눠주어서 현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원씨가족이 굴기한 것은 곽노부인의 가르침이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원씨가족 구성원중에서 원세개의 일생에 가장 영향을 크게 준 것은 생부 원보중도 아니고, 사부(嗣父) 원보경도 아니며, 그의 두 당숙(堂叔)인 원보항(袁保恒)과 원보령(袁保齡)이다.

 

원보항은 자가 소오(小午)이고, 원갑삼의 장남이다. 도광30년에 진사가 된다. 일찌기 부친을 따라 안휘에서 염비토벌을 한다. 나중에 이부시랑, 형부시랑, 호부시랑을 거치며, 이홍장 회군의 익장(翼長)이 된다. 그리고 친히 산동염군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기획한다. 좌종당이 회강을 정벌할 때, 원보항은 섬감양대(陝甘糧臺)를 맡아서, 서정대군의 조달업무를 책임졌다. 이 기간동안 유명전의 명군(銘軍)은 명을 받아 섬서로 들어온다. 그러나 좌이지쟁(左李之爭)의 영향으로 유명전의 명군은 서북에서 난을 일으켜 일시에 조야를 뒤흔든다.

 

원보항은 유명전등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단기로 명군대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말재주를 가지고 대의를 얘기하여 난을 일으킨 군인들이 조정에 귀순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북국면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원보항은 상군 회군 양쪽을 이십여년간 종횡하며 증국번, 이홍장등의 신임을 얻는다. 원보항은 부친 원갑삼의 뒤를 이어 항성원씨의 대외적인 대표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원보령은 자가 자구(子久)이고, 동치연간의 거인이다. 원갑삼의 차남이다. 원보령은 비록 관직은 형만큼 높지 않았지만, 그도 증국번과 이홍장의 신임을 얻는다. 동치4년 십월 원보령은 서주에서 결혼한다. 당시 증국번은 서주에 있으면서 비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원보령은 두번이나 증국번의 집을 방문하여 증국번의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국사(國士)"라는 말까지 듣는다. 증국번이 그를 '국사'라고 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햇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보령의 일생은 중국근대해군건설에서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찌기 청나라의 해군건설에 대하여 이홍장에게 6책을 건의한다. 거기에는 해군부를 두어 중국해군의 지휘권을 통일하는 것, 여순을 해군기지로 하고, 위해를 보조로 하는 것, 해군군사학교를 두어 인재를 배양할 것, 그리고 중국해군기계창의 포의 규격을 통일시킬 것등을 건의한다. 이는 모두 이홍장에게 채택된다. 나중에 우리가 잘 아는 북양해군의 모델은 모두 원보령의 해방육책에서 나온 것이다. 원보령이 친히 여순군항을 건설하였을 뿐아니라, 그것을 아시아제일의 해군기지로 만들었다. 원보령은 대련 및 요동반도의 개발과 건설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대련의 근대도시건설의 아버지를 선정한다면, 필자의 생각으로 원보령이 대련의 아버지가 되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여러가지 역사적 원인으로 그의 공적은 역사에 매몰되었고, 얘기하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원씨가족은 원세개가 출생하기 전에, 이미 청말의 명문망족이다. 가족은 비록 군공으로 성공했지만 원씨는 여러 대에 걸쳐 정주이학을 숭상했고, 경세치용을 추구했다. 가족은 부호라고 할 수 있지만 가풍은 순박했다. 자녀교육도 아주 중시했다. 원갑삼은 자주 원보중, 원보항, 원보령, 원보경등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요구했다. 공명을 얻어 조상을 위자하자고 한다. 원보항 원보등이 원세개등 형제들에게 이렇게 가르친 것은 오고간 서신에서 여러 모로 잘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원세개는 한묵서향의 가정분위기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법도를 지키고 근면하고 부지런한 우량소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대의 근신지중, 근간내로의 우량한 전통은 원세개에게 전혀 유전되지 않앗따. 소년시기의 원세개는 놀기를 좋아하고, 경박하며, 부잣집 패가자녀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