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남방(王南方)
정육수(1891년 3월 20일 - 1959년 12월 16일). 별명 소매(蘇梅), 여성, 광동성 광주부 신안현(현재의 선전시) 사람. 청나라말기, 중화민국시대의 혁명가, 정치가, 법관, 변호사. 그녀는 여러번 만청 정부요인암살에 참가했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박사이며, 최초의 여성변호사이고, 최초의 여성 성급정무관리이며, 최초의 여성 방법원원장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1,2달동안 정육수는 여러번 혁명당인을 위하여 군수물자를 비밀리에 운송하고, 정보를 전달했다. 전설적인 색채의 여성으로서, 정육수는 두번이나 혁명당인의 만청요인암살활동에 참가한다.
1912년 1월, 만청황제가 퇴위하지 않는 것은 원세개가 지지하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듣고, 경진동맹회는 원세개암살을 결정한다. 이 암살계획은 정육수가 주요책임자였다.
암살조는 모두 12명이고, 선택한 시간은 1월 16일 아침이었다. 장소는 원세개의 마차가 매일 집에서 떠나 원수부로 갈 때 반드시 지나가는 도중이었다. 1912년 1월 15일 저녁, 각 조는 이미 각자의 위치로 배치되었다. 정육수는 돌연 동맹회 북경분회로부터 긴급명령을 받는다: 원세개암살을 포기하라. 남북의화를 진정으로 막는 것은 양필(良弼)이지, 원세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육수는 급히 약속장소로 달려가 계획포기를 통지하려한다. 그녀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시간이 긴박하다. 만일 이번 행동을 저지한다면 동지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암살행동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대로에서 놀란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다른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육수는 옷소매에 숨겨두었던 권총을 꺼내어 하늘을 향해 두 발을 쏜다. 곧이어 원세개의 마차를 향하여 한 발을 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그 총알은 날뛰고 있던 말에 맞고, 말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진다. 그녀가 다시 총을 들어 원세개를 쏘려고 했을 때 방아쇠에 문제가 생긴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살이 방아쇠에 끼인 것이다. 그리하여 손바닥에는 선혈이 가득했다.
그 아픔에 정육수는 정신을 차린다. 자신이 이 위험한 장소를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급히 권총을 한쪽으로 버리고, 손을 소매 속에 감춘 뒤, 고의로 경찰에 접근한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한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혁명당이 감히 백주대낮에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리고 신속히 황포차를 차고 현장을 벗어난다. 경찰들은 아마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자가 원세개암살의 주요책임자중 하나라는 것을.
원세개암살후 십여일이 지나서, 정육수는 다시 양필을 암살하는 제2차암살행동에 가담한다. 양필을 만주족이다. 그는 일정 수량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종사당(宗社黨)의 핵심인물이다. 그는 청황제의 퇴위를 극력 반대하고 있었으며, 완고하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혁명당의 철천지원수가 된다. 정육수는 임무를 받은 후, 원세개암살시의 교훈을 살려, 암살방법을 바꾼다. 1명을 보내어 먼저 양필에게 접근하게 한 후, 근거리에서 그를 폭사시킨 것이다. 암살임무를 담당한 혁명당인은 팽가진(彭家珍)이다. 당시 가진 정육수의 언니와 열애중이었다. 생이별을 하게 되니 정육수의 언니는 상심하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정육수도 아주 슬퍼했다. 그러나 혁명사업을 위하여, 여전히 팽가진의 암살활동을 지지한다. 정육수등의 주도면밀한 안배로, 양필암살활동은 마침내 성공한다.
같은 해 정육수는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儉學)을 하러 떠난다. 1914년, 그녀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우고,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는다. 그후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한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중국대표단이 압력을 받아 바르세이유조약에 서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대표단의 수행원인 정육수는 서명일 전날 즉 6월 27일, 유학생 수백명을 동원하여 수석대표 육징상이 병을 치료하고 위해 입원하고 있던 생 크루더병원을 포위하고, 중국이 서명을 거절하도록 요구한다.
귀국후, 그녀는 유학시대의 친구인 위도명(魏道明)과 상해 공공조계에 변호사사무소를 공동으로 개설한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된 것이다. 1926년(중화민국25년), 남방정부가 파견한 대학교수 양행불(楊杏佛)이 상해당국에 체포될 때, 정육수는 그의 변호사가 되어, 석방되도록 해준다. 같은 해 4월, 그녀는 서산회의파의 국민당 제2기 후보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된다.
1927년(민국16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이 되고, 연말에는 상해임시법원 원장이 된다. 그러나 취임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상해법정대학 학장도 겸임했다. 같은 해 8월, 그녀는 위도명과 결혼한다. 1928년, 그녀는 국민정부 주유럽특사가 되어 중국과 프랑스의 쌍방우호사무를 책임진다. 같은 해에 귀국하고 11월에는 입법원 입법의원이 된다. 그 동안 그녀는 민법편찬위원이 되어, 민법초안을 만들 때 여성권리보호에 관한 몇 가지 조문을 추가시킨 바 있다.
그후 정육수는 건설위원회 위원, 진재위원회 위원을 맡는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그녀는 교육부 차관을 겸직한다. 1942년, 남편 위도명이 주미대사가 되고, 그녀는 그를 따라 미국으로 간다. 1943년 그녀는 각국원화회(各國援華會)의 명예주석이 된다. 전후 그녀와 위도명은 같이 귀국하여, 다시 입법위원이 된다.
대만성정부주석을 사임한 후인 1948년(민국37년)말, 부부는 함께 브라질로 가서 사업활동을 한다. 그러나 경영부진에 인맥이 생소하여, 정육수 부부는 브라질에서 수년간 머문 후 다시 미국으로 간다. 이때의 정씨부부는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대만으로 가고 싶었으나, 장개석이 그들의 통행증발급을 계속 미루었다. 이국땅을 떠돌던 정육수는 영웅낙백을 통감하며 자신의 재주를 쓸 곳이 없었다. 그저 종일 친구들을 모아서 마작이나 하고 옛날 일을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1954년 정육수는 왼팔에서 암증이 발견된다 그리하여 왼팔을 어쩔 수 없이 자르게 된다. 이는 일세영명의 정육수에게 큰 타격이었다. 객지에서 적막함을 느끼던 정육수는 말년에 질병을 몸에 달고 하루를 일년처럼 보낸다. 그러다가 1959년 12월 16일, 정육수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시에서 사망하니 향년 68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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