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석림(許石林)
노회신은 당나라의 재상이다. 그는 범양 노씨(范陽 盧氏) 출신으로, 하북의 명문거족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집안명성을 아주 중시했고, 조금도 명예를 더럽힐 일을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 문벌을 얼마나 중시하였던가? 황제인 이씨집안은 문벌이 높지 못했다. 그리하여 황제의 딸은 당나라때 시집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나라때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황제의 딸에 대하여 일반적인 명문집안의 자제, 선비들은 모두 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 황실과 인척이 되길 원치 않은 것이다. 반룡부봉(攀龍附鳳)하려 하지 않았다. <신당서>의 기록을 보면,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딸 기양공주(岐陽公主)를 시집보낼 때가 되었는데, 황제는 재상 이길보를 시켜 여러 대신의 자제들에게 구혼하도록 하였다. 다만 이들 명문거족은 중매하러 온 이승상에게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모두 자식에게 병이 있다는 핑계로 혼사를 거절한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능력에 문제가 있다고까지 하였다. 마지막에는 두종(杜悰)이라는 사람이 선택되었다. 그러나 선택되었다기 보다는 두종을 못살게 굴어서 겨우 붙잡은 것이다. 왜냐하면 두종은 이 혼인을 그다지 선망하지도 않았고, 영광으로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첫째는 문벌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씨집안은 황제라는 지존의 신분이지만 문벌로 따지면 당시에 가장 존귀한 성씨가 아니었다. 이것은 당나라의 황제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둘째는 예법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공주나 신분지위가 자신보다 높은 여인을 처로 삼게 되면 예의염치를 중시하던 시대에 반룡부봉하고 승관발재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예법을 잃으면 모든 것은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노회신이 문벌을 중시한 것은 자신의 고향에 호화주택을 짓고 큰 창고를 지어서 물건을 넣어둔 것도 아니고, 직권을 이용하여 자신의 조상의 전기를 써서 죽은 사람의 얼굴에 금칠을 하여 이를 통하여 자신의 관료사회에서의 승진을 돕게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더더구나 지방관과 결탁하여 자신의 형제 아들 조카를 발탁하여 범양일패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아주 중시했다. 고인들이 보기에, 문벌은 문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집이 큰 것도 아니고, 명망이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었다. 문벌을 중시한 것은 통속적으로 말해서 체면있게 사는 것이다. 이 뜻은 나중에 나온 이런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대학이 큰 것은 건물이 큰데 있지 않고, 대가가 있는데 있다. 그 기원은 바로 이것이다.
노회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관직에 있으면서 돈을 버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조정이 관리에게 주는 봉급은 조정의 제도이다. 다만 관리 자신은 성현의 책을 읽었으면, 돈을 중시해서는 안된다. 돈을 중시하게 되면 마음 속으로 반드시 훔치고 차지하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일처리에서 공정해질 수 없다. 그리고 생활히 호화사치스럽게 되면, 더욱 해롭다. 왜냐하면 호화사치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해도해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일단 관리가 호화사치를 즐기게 되면, 봉급이 부족하게 되고, 뇌물을 받게 된다. 국가이익을 팔아먹고, 사회공정을 해친다. 조정과 백성의 전체이익을 해치게 된다. 소위 "거관필회(居官必賄), 거향필도(居鄕必盜)"가 된다. 그래서 그는 주장한다. 처음부터 청빈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호화사치의 가장 강력하고 튼튼한 방화벽을 쌓을 수 있다.
노회신이 기꺼이 청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두뇌가 시시때때로 맑고 깨어있었기 때문이다. 초당후기에 경제사회가 흥성할 때 호화사치의 기풍이 나타난다. 간사한 소인들은 조정과 황제를 속이고, 현재는 태평성세라고 떠들었다. 노회신은 당시 황문감 겸 이부상서를 지냈는데, 관리의 평가와 발탁을 책임진 관직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인정하는 송경(宋璟)과 노종원(盧從願)등에게 말한다: 백성들은 스스로 만족하여 자신이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관리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시시때때로 여리박빙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조금만 느슨해져서, 호화사치에 빠져들게 되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원래 현재 국가가 안정되니 황제도 자연히 느슨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인들에게는 기회가 된다. 내가 듣기로 현재 각지에는 모두 사람을 경성에 파견하여 주둔시키며, 중앙정부의 관리들과 연락하며 인맥을 구축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일을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뚫으려는 것은 분명 나쁜 짓을 하려는 것이다. 일단 소인이 황제의 곁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제거하기가 아주 어렵다. 소인은 이익으로 결당을 하기 때문이다. 결당을 하게 되면 사적이익을 도모하게 된다. 소인은 호화사치스러운 생활과 마찬가지로, 쉽게 사람들을 홀리게 된다. 노회신의 경고는 몇년후 당문종이 깊이 느끼게 되고 확인되게 된다. "하북적(안사의 난을 가리킴)을 제거하는 것은 쉽다. 조정의 붕당을 제거하기는 어렵다."
노회신은 관리의 승진, 이동, 임용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황상에 글을 올린다. 그가 얘기한 것은 언제든지 맞는 이치이다. 관리들이 황제의 앞에서 온갖 방법을 써서 총애를 받고 승진을 하고자 하면서 정력을 일에 쏟지 않게 되면 반드시 뇌물을 추구하고 서로간에 호화사치하려는 마음을 격발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호화사치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에 영합할 기회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실로 국가와 정치에 큰 해이다. 신은 조정의 내외관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뇌물을 받고 부정부패를 하여, 명성이 형편없고, 백성의 이익을 침해하여 황제와 조정이 원망을 사게하는 관리이다. 비록 조사해서 처벌하고 유배하고 강등시키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관직을 갖는다. 심지어 승진까지 한다. 조정은 그저 약간 처벌을 하고 말 뿐이다. 이들 관리들은 어떤 경우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강등되어, 내심으로 자포자기해서, 이상과 건강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일을 더욱 심하게 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전혀 반성이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만일 잘못한 관리를 기용하여 한 지방을 다스리게 하면, 이것은 간사한 자에게 은혜를 함부로 베풀어 한 지방이 백성을 팔아먹은 것과 같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사방의 주군의 어느 곳의 백성도 모두 황제와 조정의 성명교화를 받아야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운이 나쁘면 이런 관리들의 악정을 받아야 하겠는가? 특히 변방지역은 원래 여러 민족이 잡거하고 있어, 상황이 복잡하다. 자고이래로 쉽게 반란을 일으켜 장기안정을 기약하기 어려운 곳이다. 만일 이런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덕행이나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면, 이 지방의 동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만일 이런 곳으로 좌천시킨 관리가 탐욕을 부리고 제대로 다스리지 않고, 조정은 그들이 멀리 변방으로 가 있다는 이유로 엄격하게 대하지 않고, 돈을 쓰는 방면에서 눈감아주고 모른 척한다면, 그들이 호화사치와 탐욕을 부린데 대한 댓가를 국가가 부담하는 꼴이 된다. 다시 승진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탐욕을 부릴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평명한 인재는 써서는 안된다. 하물며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관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신은 이들 탐욕을 부려서 정직되고 파면된 자들은 수십년이 되지 않으면 다시 쓰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상서>에 "식별선악(識別善惡)"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노회신은 평상시에 청빈하게 살면서 만족했다. 심지어 일반백성들보다 못한 생활을 살았다. 그가 죽은지 2년이 지나서 어느 날, 당현종이 장안성의 남쪽으로 놀러갔다. 한 마을을 지나는데, 한 집에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니, 노승상이 죽은지 2주년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집안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려는데 너무 가난하여 손님들에게도 고기없이 야채만 대접하고 있었다. 당현종은 느끼는 바가 많아서 많은 하사품을 내리고, 놀러 가던 것을 중단한다.
전설에 따르면 노회신은 두번 죽었다고 한다. 첫번째로 죽은 후에, 집안의 자녀들이 통곡을 하고, 노부인이 아이들을 위로했다: "너의 부친이 너희에게 남긴 고귀한 재산은 바로 청렴이다. 다만, 우리 집안은 가난하여 너희 부친의 장례를 치를 돈도 없다. 그러나 그들 탐관오리들은 호화사치스럽게 살면서 죽어서도 요란하다....곁에 있던 한 사람이 말한다: 그와 같이 평생 관직에 있으면 무슨 소용이냐. 그렇게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하루도 좋은 세월을 누리지 못했다니. 생각지도 못하게 그날 저녁에 노회신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그는 자신이 저승을 한바퀴 둘러본 이야기를 해준다; 지옥에는 여러가지 형벌이 있는데, 아주 참혹하다. 모두 탐관오리와 호화사치를 누린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내가 가니, 나를 위하여 준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죄는 살아있을 때 이미 면제받았다. 말을 마치고 웃음을 머금고 다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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