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의나(意娜)
차마고도에 대하여 들은 사람은 아주 많을 것이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주요 노선의 방향과 경과지점까지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중 대부분은 "봉차"라는 업종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것은 단지 강정(康定)이라는 지방에만 존재했었다. 그리고 설사 강정 현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업종이 한 때는 묵묵히 성행했다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정 현지의 문화전문가 궈창핑(郭昌平) 선생은 그의 진한 사천서부의 사투리와 바리톤음색으로 얘기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런 직업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마고도로 운송되는 차는 내지에서 전문적으로 티벳지구에서 마시는 용으로 재배하여 눌러서 차전(茶塼)으로 만든 차엽(茶葉)이다. 변차(邊茶)라고도 불리운다. 옛날 이름은 타전로(打箭爐)였던 강정성은 청나라 순치제때부터 점차 차마(茶馬)를 거래하는 장소로 바뀐다. 그리고 금방 조정에서 명문으로 규정하여, 남로변차 거래의 집산지가 된다. 내지의 변차는 먼저 강정으로 운송된 후, 다시 티벳지구로 나뉘어 팔린다. 가장 멀리 가는 경우에는 부탄과 네팔까지 갔다. 청나라말기, 강정은 이미 전국변차판매의 최대시장이 되었다.
내지의 차창(茶廠)에서는 차엽병(茶葉餠)을 죽멸(竹篾)로 16 시근(市斤)씩 길쭉하게 쌌다. 사람들이 등에 지고 보행으로 강정까지 온다. 다만, 강정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려면 산 길을 올라야 하고 사람들이 드물며, 날씨는 춥고 땅도 얼어있으며, 말도 통하지 않는다. 다시 사림이 등에 지고 가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말, 소, 당나귀로 운송한다. 다만 죽멸은 이렇게 덜컹거리며 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차엽은 강정까지 운송된 후, 다시 티벳으로 운송되기 전에, 새로 포장을 해야 한다. 소가죽으로 싸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강정에는 소가죽으로 차엽을 다시 포장하는 봉차업이 나타나게 된다.
봉차공은 티벳어로 "갑주왜(甲朱娃)"라고 부른다. 그들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생활했고, 처음애는 대부분 티벳, 한족지궁서 도망쳐서 강정에서 구걸하던 사람들이다. 이 업계는 문턱이 낮고, 그저 힘들게 일만 하면 되고, 힘만 쓰면 된다. 역사상 강정의 봉차공은 가장 많았을 때, 12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봉차공의 도구는 간단하다. 소가죽을 자르는 칼 한 자루, 소가죽을 꿰매는 두 개의 약간 기능이 다른 침이다. 소가죽은 면포나 비단과 달라서 이 침은 수놓는 침과는 다르다. 지금처럼 가죽을 가공하는데 힘을 적게 들이는 방법도 없다. 가늘게 자른 소가죽을 실로 하여, 완전히 사람의 힘에 의지하여 소가죽을 찔러서 꿰매는데 쓰는 십여센티미터 길이의 강철침이다.
봉차공 외에, 봉차업종에 따라 다른 관련업종도 나타난다. 하나는 피당(皮塘)이다. 이것은 강정성에서 가장 많을 때 20여곳에 이른다. 소가죽을 무두질하는 장사이다. 티벳상인들이 관외에서 가져온 소가죽은 모두 말린 것이다. 강정에 도착한 후, 피당에서 1주일가량을 담궈놓는다. 부드럽고 축축하게 되어야 차엽을 싸게 된다. 또 다른 직업은 전문적으로 소가죽을 자르는 사람이다. 소가죽으로 새로 포장할 때, "화포(花包)"와 "만포(滿包)"의 두 가지로 나누는데, 각각 단기운수와 장기운수의 차이이다. 물에 잘 담궈두었던 소가죽은 소가죽을 자르는 사람이 긴 털을 제거하고, 화포와 만포의 필요에 따라 소가죽을 조각으로 자른다. 그들은 소가죽의 굵기를 균일하게 하는 것을 책임지고, 길이가 적당한 가죽실을 만든다. 만포를 만드는 가죽실은 가늘고, 화포를 만드는 가죽실은 굵다. 이들 작업이 모두 끝나면 봉차공에게 넘겨주오 차를 싸도록 한다. 꿰맨 차포는 3개의 차엽을 하나의 포(包)로, 두개의 포를 하나의 타(馱)로 한다. 한 봉차공은 매일 5타의 차엽을 소가죽으로 싸야 비로소 장양(藏洋) 절반을 벌 수 있다.
이들은 1950년대에 티벳진입부대의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인원이 된다. 티벳으로 들어간 적지 않은 물자는 모두 그들의 손에 의하여 포로 꿰메어진 후 다시 티벳으로 운송했다. 나중에 생산방식, 사회조건과 운수방식이 신속히 바뀌면서, 봉차공은 역사의 기억으로 된다. 우리에게는 문화의 감탄만이 남았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종이 봉차업처럼 묵묵히 존재했었는지 모른다. 오늘날은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는 변화의 시대이다. ㅈ품과 업종은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일찌기 흥성했고 휘황했으나 아마도 후세에는 부지불식간에 가볍게 사라졌을 수 있다. 사람들은 그래도 여전히 앞으로 전진해야만 한다. 이들 문화의 기억은 일부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방식으로 민족문명역경의 종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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