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 금전의거(金田起義)의 몽매와 황당

중은우시 2013. 11. 10. 00:23

글: 여쟁(呂峥) 

 

과거에 연속 낙방한 홍수전이 '독존상제'설을 창조하다.

 

도광23년, 1843년, 광주의 길거리에 영남인의 무리중에 군계일학의 남자(키가 약 1.78미터)가 국자감 밖에 붙어 있는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런 얼굴은 음울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쑥 들어간 이 30세의 남자가 바로 홍수전이다.

1814년 1월 1일, 홍수전은 광주 화현에서 태어난다. 본명은 홍화수(洪火秀)이며, 형제자매가 5명이다. 그는 넷째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여, 홍수전은 부친 홍경양(洪鏡揚)이 아꼈고, 7살때 사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도광9년부터, 16세된 홍수전은 연이어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언젠가 "조위전사랑(朝爲田舍郞), 모등천자당(暮登天子堂)"을 꿈꾸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주 잔혹했다. 도광16년, 17년의 연이은 실패와 도광23년까지 전후로 4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였다. 15년간 하루종일 글을 읽었지만, 시험은 연이어 낙방이었다. 마음 속에는 원망의 불씨가 생겨났고, 점차 가슴 속에서 불타오른다.

네번째 낙방후 홍수전은 분노하여 이를 악물고 마치 미친 것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그는 하루종일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마당을 미친듯이 오갔고 입으로는 계속하여 중얼거렸다: "다시는 청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 다시는 청나라의 의복을 입지 않겠다. 어르신은 이후 스스로 과거를 열어 선비를 뽑겠다." 광분한 나머지 그는 손에 호미를 들고, 집안에 모시던 공자의 위패를 박살내 버린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 화현의 낙방청년이, 나중에 청나라를 묻는 묘를 파는 최초의 인물이 될 줄은.

기실 일찌감치 도광16년에 홍수전이 두번째로 광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은 시작되었다. 하루는 하릴없이 돌아다니다가, 용장가의 공원(貢院) 문앞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권세양언>이라는 소책자를 얻는다. 작자는 기독교도인 양발이었다.

양발은 광동 고명현의 보통 조판인쇄공이고, 문자를 약간 알았다. 1811년, 그는 영국선교사 마례손(馬禮遜)에게 수냥의 은자를 받고 위험을 무릅쓰고 중문판 <성경>을 인쇄한다. 당시에 이는 죽을 죄였다.

말손은 모험정신을 지닌 기독교선교사였다. 그의 권유와 계발하에 1923년 양발은 중국인 최초의 목사가 된다. 그때부터, 양발은 더 이상 땀을 비오듯 흘리며 조판인쇄를 하지 않는다.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옷을 입고 암중으로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 런던성공회에서 월급을 받는다. 1832년, 양발은 <권세양언>을 쓴다. 그의 은사인 마례손이 검토하고 출판했으며, 저자는 "학선자(學善者)"라고 한다.

<권세양언>은 기실 <성경>의 '편사본(編寫本)'이다. 절반은 원문을 인용하고, 절반은 양발이 스스로 쓴 것이다. 양발이 인용한 것은 신약,구약성서의 약 9분의 1이다. 원서의 신화같은 이야기부분은 모조리 삭제했고, 기독교의 기본교의는 남겨둔다. <권세양언>에는 조금도 '혁명'의 뜻이 없고, 주로 독자들이 하나님을 신앙하도록 격려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안빈낙도하며 살인과 탐욕을 경계하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천국은 내세에 있고, 사후에 영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책에서 유일하게 극렬한 부분이라면,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이다. 유교에 대하여도 약간의 비난이 있다. 다른 방면에서는 무슨 '화약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홍수전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없애고, 절을 만나면 절을 철거하며, 경전을 불태우라고 한다. 이것은 <권세양언>의 종지에 위배되는 것이다.

홍수전은 <권세양언>을 통독하였지만, 과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번째 과거시험에 실패한 후에 그는 병으로 쓰러진다. 열이 사십도가 넘는 날이 연속 4일간 지속되고 그의 눈앞에는 적지 않은 환상이 보인다.

큰 병이 낫고나자 홍수전은 연화당촌에서 사숙의 선생 자리를 얻는다. 그리하여 약간의 양식을 얻어 호구지책으로 삼는다. 이 기간동안, 우울하게 지내던 그는 다시 <권세양언>을 꺼내서 자세히 읽는다. 점차 "여러 신을 쫓아내고, 하나님만을 받든다"는 사상을 가지게 되고, 개략적인 이론체계를 갖추게 된다.

비록 이 체계는 기독교의 겉옷을 입고 있지만, 교의를 잘 모르고, <성경>조차 읽은 적이 없어서, 홍수전은 그저 지름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유가경전에서 '상제(上帝)'의 문구를 찾아내어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맞춘다.

<시경>에는 "상제임여(上帝臨汝)"라는 말이 있고, <역경>에는 "천지상제(遷之上帝)"라는 말이 있으며, <서경>에는 "유황상제(唯皇上帝)"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모두 기독교의 '상제(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홍수전은 창조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중국의 역사책을 살펴보니 반고로부터 삼대에 이르기까지 군신일체로 모두 상제를 경배했다." 동시에, 그는 제3차과거시험을 치른 후 고열이 있을 때 본 환상을 가지고 엉터리 경력을 만들러낸다. 자신은 그때 '죽어서' 기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다. 명을 받고 다시 '하범'하여 요괴를 죽여서 세상을 구하려 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적수인 '염라요(閻羅妖)'를 만들어내서 언제든지 이 가상적을 그의 반대자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런 짝퉁 '기독교'에 대하여 영국인인 부례사(富禮賜)는 <천경유기>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이렇게 적었다: "교황이 만일 그 홍수전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면, 일찌감치 그를 불태워 죽여버렸을 것이다!" 홍수전은 이런 의문제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 친구인 풍운산, 동생인 홍인간과 함께, 이를 사업으로 삼아서 추진한다. 신도를 모으고, '교의'를 선전하며, 모임을 갖고 예배를 한다.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화현지구에는 적지 않은 신도가 모여든다.

신도가 생기니, 홍수전은 담량이 커졌다. 그는 교도들이 기부한 돈을 가지고 철장으로 하여금 "참요검(斬妖劍)"을 하나 주조하게 해서, 그의 뜻을 명확히 한다.

 

양수청은 급한 와중에 지혜를 짜내어, 풍운산을 구하다.

 

침을 마구 튀기면서 "선교"하면서, 홍수전은 힘을 다하여 공자의 위패를 곳곳에서 파괴한다. 이러한 조치는 현지에서 평지풍파를 불러온다. 비록 광주는 비교적 일찍 개화되었고, 사람들이 새로운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공자를 추앙하고 있었다. 홍수전의 이런 조치는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오고, 결국 그는 사숙선생의 밥그릇을 잃고 만다.

일자리를 잃은 홍수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풍운산 및 몇몇 젊은이와 함께 고향을 떠나, 주강델타지구를 돌아다니면서 포교를 한다.

아쉽게도 몇달간의 포교활동은 길거리에서 붓과 벼루를 팔아서 약간의 돈을 번 것을 제외하고, 포교의 성과는 거의 없었다. 겨우 오십여명이 입교했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종이와 벼루를 할인받아 사기 위해서 말로만 가입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실망한 나머지, 일행은 광서로 가서 포교하기로 결정한다.

1844년, 홍수전과 풍운산은 귀현의 사곡촌으로 간다. 이곳에 자리잡은 이유는 홍수전의 사촌형 왕성균(王盛均)이 이곳에 거주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입주한 후에 한편으로 사숙선생으로 돈을 벌고, 다른 한편으로 전도했다. '독존상제'는 현지인들이 제사지내는 '토신(土神)'을 배척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겨우 몇 달을 머물고는 더 이상 지내지 못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부득이 사곡촌을 떠난다.

홍수전이 화현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사숙선생의 신분으로 밥을 먹고 살았다. 이년여의 시간동안, 그는 붓을 들어 글을 쓴다. <원도구세가>, <원도성세훈>등의 글을 쓴다. 내용은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민가풍의 타유시(打油詩)였다. 예전에 공자의 위패를 부숴버리던 미친듯한 행동은 고치고, 홍수전은 단지 불교와 도교만을 사교로 배척한다. 오히려 공맹지도에 대하여는 좋은 말을 약간 한다. 일을 해나가면서 지혜도 느는 법이다. 홍수전은 중국인의 마음 속에 공맹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어 흔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통열한 비판"에서 "이용"으로 방향을 바꾼다.

홍수전이 머리를 처박고 창작을 하는 동시에, 광서에 남기로 결정했던 풍운산은 자형산지구로 가서 선교를 하여 점점 효과를 발휘한다. 교도가 날로 늘어났을 뿐아니라, '배상제회(拜上帝會)'라는 정식명칭도 갖게 된다. 자형산은 광서에서 가장 낙후한 산골중 하나이다. 골짜기가 깊어서 유격전에 적합했다.

풍운산도 낙방서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사를 깊이 읽고,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했으며, 정치적인 두뇌도 있었다. 그리고 조직에도 재능이 있었다. 태평천국의 초창기에 가장 핵심적인 기획자라고 할 만하다. 그의 중요성은 심지어 홍수전보다 크다.

1847년 가을, 홍수전이 두번째로 광서에 올 때, 풍운산이 이미 이천여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음을 알게 되어 아주 기뻐한다. 이들 새로운 신도들 중에는 석달개, 양수청, 소조귀등이 있었다. 모두 나중에 태평천국의 핵심인물이 된다. 영향력을 늘이기 위하여, 풍운산은 상주 현지의 유명한 '감왕묘(甘王廟)'를 상대로 손을 쓴다. 광서의 민간에서, '감왕'은 남녀노소가 모두 알고 있는 제사대상이다. 역사상의 '감왕'은 오대시기의 상주사람이다. 남한은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사후에 고향사람들이 토신으로 모셨다. 그를 모시는 사당을 '감왕묘'라고 한다.

1847년 10월, 홍수전, 풍운산등은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감왕묘로 쳐들어간다. 그 안의 우상금신과 향로제기를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감왕묘내의 흰 벽에 시를 써서 '감왕'은 사신이라고 선포한다.

상주사람들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홍수전에게 따지려 할 때 길거리에 돌연 12살짜리 현지 사내아이가 쓰러진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스스로 '감왕'이 몸에 붙었다고 말하며 크게 소리친다: "나를 때린 자들은 신성불가침이다. 그들을 해쳐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하나하나 흩어진다. 그후, 그 사내아이는 홍수전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는다.

득의한 나머지, 홍수전 등은 연이어 우상파괴활동을 벌인다. 자형산지구에서 사방으로 사당을 찾아서 우상을 찾고, 일단 찾으면 바로 부숴버린다. 광서에서 이들을 '신성'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들을 부수고도 아무런 보응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점차 '상제'가 왔다고 믿게 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상제회'에 가입한다.

그러나, 사당을 부수는 것은 역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1847년말, 석인촌의 사신(士紳) 왕작신(王作新)이 가솔을 이끌고 사당을 파괴하고 요서를 선전했다는 죄명으로 풍운산을 최포한다. 금방, 풍운산의 사촌형 노육(盧六)이 다시 일부 신도를 규합하여, 풍운산을 빼앗아 온다. 왕작신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평현 아문에 고발을 한다. 풍운산이 불법집회를 열고, 결맹하여 혹세무민하며, 사직과 신명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고발자로서 왕작신은 이유와 증거가 있었다. 불법집회와 공공건축파괴는 청나라에서 확실히 범죄였다. 풍운산과 노육은 관아로 압송된다. "배상제회"는 일시에 군룡무수(群龍無首)의 상태가 되어 사상유례없는 위기에 처한다.

홍수전은 광동으로 돌아가, 양광총독 기영(耆英)에게 청원할 준비를 한다. 그는 천진하게 기영이 신앙의 자유를 승락한 바 있으므로 풍운산을 풀어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쉽게도 현실은 영원히 관청에서 약속한 것처럼 아름답지 않다. 이때 이름없던 한 인물이 사실의 진상을 파악하고는 앞장서서 일어나 배상제회를 구한다. 그 인물이 바로 양수청이다.

양수청은 5살때 부친을 잃고, 9살때 모친을 잃는다. 백부가 그를 길러주었다. 성인이 된 후, 양수청은 목탄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고 아주 곤궁했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으며, 수염도 몇가닥 없었다. 그리고 눈도 하나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포부가 원대했다. 널리 친구를 사귀고 의리를 지키겨 재물을 베풀었다. IQ와 EQ가 모두 아주 높았다.

풍운산이 구금된 기간동안, 배상제회는 인심이 흩어지고 거의 붕괴지경에 이른다. 1848년 3월 3일, 마음이 급해진 양수청은 돌연 스스로 "천부(天父)"가 자신의 몸에 붙었다고 말하며, 강신(降神) 놀이를 시작한다. 그는 돌연 사람들 앞에서 쓰러진 다음 벌떡 일어난다. 모습을 숙연하게 한 다음 스스로 '천부상제'를 대신하여 말을 전한다고 한다. 신도들중 마음이 동요하고 있던 황씨가족을 배상제회에서 쫓아낸다. 광서일댕서는 귀신이 몸에 붙는 풍속이 유행하여, 신도들은 이를 사실로 믿었다. 양수청은 극도로 높은 위망을 얻었을 뿐아니라, 배상제회 내부의 공황심리를 가라앉힌다. 금방, 양수청의 목탄을 굽는 동료인 소조귀도 따라서 돌연 바닥에 쓰러진다. 벌떡 일어난 후에 그는 '천형예수'가 몸에 붙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양수청과 함께 이인극을 벌인다.

동시에 양수청은 뇌물제공을 통해서 풍운산을 구해내자고 주장한다. 그는 목탄을 굽던 신도들에게 1백근의 목탄을팔 때마다 일부의 목탄세를 '성고(聖庫)'에 납부하라고 명령한다. 이를 '과탄(科炭)'이라고 부르며, 풍운산을 구해내는 자금으로 삼는다.

5월, 계평지현은 양수청의 뇌물을 받은 후, 풍운산을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광동 화현으로 압송해서 보낸다. 원적지의 지방관리가 단속하도록 넘겨주고 그후에 석방되도록 한 것이다. 풍운산을 성공적으로 구해낸 것은 태평천국 발전사상 중요한 전환점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만일 양수청이 없었더라면, 이때의 태평천국은 이미 요절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태평천국이 남경을 점령하고 난 다음, '과탄구풍(科炭救馮)'에서 공로가 있던 사람은 모조리 승진한다.

 

'내토지쟁'이 금전의거를 불붙이다.

 

일이 끝난 후, 홍수전과 풍운산은 양수청과 소조귀의 처리방법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만일 양수청과 소조귀의 '천부', '천형' 대언권(代言權)을 인정한다면, 신도들은 이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두 사람이 나중에 종교적으로 홍수전, 풍운산 두 사람의 권위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만일 승인하기 거절하면, 신도들간에 내분이 생길 것이다. 이리 저리 생각해본 다음, 양수청과 소조귀는 당시에 무슨 야심이 없었으므로, 홍수전, 풍운산 두 사람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홍수전은 자신은 상제의 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하니, 천부, 천형의 "대언인' 지위는 자연히 '상제'의 친아들을 초월할 수 없게 된다. 그후 태평천국의 '야강절(爺降節)'과 '가강절(哥降節)'은 바로 양수청, 소조귀 두 사람의 '하범'을 기념하는 날이 된다.

1850년이 되어, 홍수전은 배상제회에서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진다. 여러번의 '예언'이 들어맞으면서(어느날 누가 병을 얻을 것이라는 것과 간은 '신언'), 그리고 그 본인이 일부 병치료의 약방문을 알고 있는 것으로 하여 점차 시도들에게 '눈먼 사람은 눈뜨게 하고, 벙어리는 입을 열게하는' 신인으로 선전된다. 동시에, 금전촌의 큰 부자인 위창휘도 온 가족을 이끌고 배상제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배상제회에 많은 물질적 도움을 준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오랫동안 끌어온 '내토지쟁'은 금전의거의 가장 직접적인 촉진제가 된다.

계속하여, 광서의 일부지구는 모두 대규모의 무장계투가 있어왔다. 소위 '내인'은 광동에서 광서로 이주해온 객가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소위 '토인'은 주로 광서 현지의 토착주민이다. '내토지쟁'은 절대로 민족간의 싸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광서 현지의 장족, 요족은 선명한 입장이 없었고, 일부는 '내인'을 지지하고, 일부는 '토인'을 지지했다.

광서는 '화외지지(化外之地)'로 민간계투가 계속 유행해왔다. 특히 도광말기 토지겸병이 극렬하고 내부모순이 격렬한 상황하에서, 대규모로 광동, 복건 및 호남에서의 유민이 광서로 흘러들어온다. 그리하여 광서는 땅은 적고 사람은 많은 국면이 형성된다. 관청은 자주 암중으로 현지 토착민과 유민간에 땅을 놓고 싸우도록 종용했다. 그래서 원한은 더욱 깊어진다. 우물 하나를 차지하기 위하여, 밭 하나를 차지하기 위하여, 며느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하여, 전체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고 상대방을 죽였다. 어떤 때는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도록 싸웠다. 무수한 사람이 이 대규모이 싸움 속에 죽어갔다.

이런 배경하에서, '금전의거'가 발생한다. 1850년 7월부터, '내토지쟁'에서 패배한 객가인무리들이 노인과 어린이를 데리고 금전촌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움직여도 청나라의 지방정부는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저 피난한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

배상제회는 여기서 시기를 잘 잡는다. 한편으로 위창휘의 집에 제련설비를 만들어 무기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 각지의 신도들에게 금전으로 집결하게 하여 거사를 준비한다. 이와 동시에 홍수전은 곧 전염병이 돌 것이라고 말한다. 오로지 배상제회 신도들만이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양수청도 내가 큰 재앙을 세상에 보낼 것이며, 8월이 지나면, 밭이 있어도 경작하는 사람이 없고, 집이 있어도 사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나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의 생일축하를 하는 틈을 타서 금전의거가 발발한다. 1만여명이 금전촌에 운집하여, 배기의식(拜旗儀式)을 거행한다. 땅 위에 꽂아놓은 태평천국의 깃발은 기적처럼 '자동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바람을 맞아 펄럭인다. 당엲 이것은 의거기획자들이 정교하게 짠 것이다.

배기의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흥분한다. 홍수전의 지휘하에, 신도들은 서우담으로 간다. 이곳에는 무기를 감추어 두었었다. 신비한 종교역량은 다시 한번 작용을 발휘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도와 호미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부대는 이미 호호탕탕하게 출발한다.

처음에, 일부 사람들은 후회하기도 했다. 이는 나중의 이수성의 자술서에도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다만 대오가 출발한 후 수백리를 돌아갔고, 많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죽기를 각오하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태평천국은 파죽지세였다. 안경을 함락시키고, 무창을 공격하고, 장사를 점령한다. 짧은 2년만에 남경까지 차지하고, 태평천국정권을 건립한다. 그후 그들은 대거 북벌, 서정을 전개한다. 전후로 두번에 걸쳐 청군의 봉쇄선을 돌파한다. 강남대영, 장강이남의 반벽강산은 금방 태평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오랫동안, 청군 장령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왜 태평군의 전투력이 이렇게 강하냐는 것이다. 원래,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장병들에게 모두 한 폭의 '소천당'의 목표를 그려주었다. 즉, 장래 반란이 성공하면, 너는 반드시 영화부귀를 누린다. 천국과 같은 생활을 지낼 수 있다. 이런 정신아편으로 그들을 끌어들였으니, 자연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전력으로 따랐다. 어쨌든,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은 모든 중국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한번도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천당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농민해방을 부르짖는 감동적인 구호의 영수들도 용상에 앉은 후에는 신속히 등급이 분명한 관노야(官老爺)로 바뀐다. 이렇게 하여, 파죽짓으 정권은 중천에 뜬 해와 같을 때 돌연 급전직하하고 신속히 쇠락하고 와해된다.

의거때, 눈을 부릅뜨고 전진했다; 남경에 들어간 후, 먼지에 눈이 가리고, 생활은 부패한다. 유일하게 역대농민반란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 의거군은 '시대에 맞게' 서양에서 온 외래품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환상을 포장한 것이다. 다만 그 실질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전목(錢穆)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그저 서방 기독교의 개략적인 이야기를 원용하여 우민을 끌어들였으나, 서방민주정신에 근거하여 새로운 기반을 창건하지는 않았다."

 

태평천국운동은 반제국주의도 아니고 반봉건주의도 아니다.

 

독일에 있던 마르크스는 대청국의 남방성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으로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중국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에서 8년동안 영국자산가의 인화포의 영향하에, 이미 사회변혁의 직전상태가 도래했다. 이번 변혁은 반드시 이 국가에 아주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우리 유럽의 반동분자들이 얼마후의 장래에 아시아로 도망쳐서, 최후에 만리장성에 도달하고, 이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보루의 대문에 도착하면, 그들은 아마도 이런 글자를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중화공화국 -- 자유, 평등, 박애."

그러나 겨우 12년이 지나서, 1862년(당시는 아직 태평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중국기사>라는 글에서 붓끝을 완전히 돌려서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태평천국)은 개조환대이외에 자신에게 아무런 임무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구호도 없다. 민중에게 놀라움을 준 것이 구통치자들에게 준 놀라움보다 훨씬 크다. 그들의 모든 사명은 마치 추악한 파괴로 정체체와 부패에 대립한 것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파괴는 아무런 건설의 조짐도 없다....태평군은 바로 중국인의 환상이 묘사한 그 마귀의 화신이다. 다만, 중국에만이 이런 마귀가 있다. 이것은 정체된 사회생활의 산물이다!"

기뻐 날뛰다가 악독한 저주를 퍼부은 것을 보면 마르크스가 동방고국에서 생장한 사악한 괴물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민감하여 정확한 판단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손중산은 태평천국에 대하여 역시 숭앙에서 비판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는다. 1907년, 그는 동맹회에서 발간하는 <민보>에 <애태평천국(哀太平天國)>이라는 글을 쓰는데, "어진 자가 봉기한다는 것은 태평(천국)의 뜻이었다." 다만, 사상이 점차 성숙해진 손중산은 태평천국의 흥망성쇠역사를 깊이있게 연구한 후, 이렇게 지적한다: "홍씨의 멸망은 민족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민권이 있는 줄을 몰랐고, 군주가 있는 줄을 알았지만 민주가 있는 줄을 몰랐기때문이다."

그러나 장기간, 극좌사조의 영향하에, 태평천국은 '반제반봉건'의 혁명활동으로 분식된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역사적 사실에 위배된다. 1858년, 영국군함 Lee는 금릉을 지나, 태평군 장병의 오인포격을 받는다. 액이금(額爾金)은 반격하도록 명령한다. 홍수전은 발포한 장병을 참수한 후, 영국인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죄한다. 그리고 조서를 보내어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서양인들과 손을 잡고 청나라를 같이 무너뜨리자고 말한다. 그후 홍수전을 우두머리로 하여,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서양인들을 중시여긴다. 왕궁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던 홍수전까지도 서양인선박에 석탄과 물을 가져다주는 것과 같은 자잘한 일을 직접 챙겼다. 설사 서양인들과 안면을 바꾼 태평천국 후기에라 하더라도, 충왕 이수성과 모왕 담소광은 여전히 영국프랑스연합군사령관 고든과 통신한다. 군수물자를 매매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명백히 말한다: "우리 왕조는 청왕조와 강토를 놓고 싸우고 있다. 외국에 대하여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 1862년 4월의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상해의 서양회사는 태평천국에 소총 3,046정, 총탄 18000여발을 판매한다. 천경(남경)이 포위된 기간동안, 서양인들은 계속하여 양식, 군수물자, 심지어 아편까지 공급한다. 이를 보면 소위 '반제'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봉건'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함풍제는 명호를 부여한 비빈이 겨우 18명이었다. 홍수전은 그러나 88명이나 된다. 등급제도, 복식규정, 관리품급, 작위세습등을 보더라도, 태평천국은 청정부보다 지나치면 지나치지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나라 공식문건의 통계를 보면, 태평천국의 초기지도자 200여명중 출신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50명이다. 절대다수는 지주, 상인이고, 진정한 농민출신은 겨우 14명이다(부농을 포함하여). 동시에 태평천국은 범법관리에 대한 처벌중 하나가 바로 '벌위농(罰爲農, 놈인으로 되게 하는 벌)'이다. 농민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농민혁명노선'을 얘기할 수있단 말인가. 아마도, 양계초의 평가가 아주 정곡을 찌른 것인지도 모른다: "소위 태평천국, 소위 사해형제, 소위 평화박애, 소위 평등자유는 모두 외부의 헛된 명목일 뿐이다. 그 진상을 보면, 실로 중국고래역대의 유구(流寇)와 전혀 다를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