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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의 보물은 어디로 갔는가?

by 중은우시 2012. 6. 10.

글: 소풍(小楓)

 

역사상 최대규모의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은 탄식을 불러온다. 그러나, 태평천국의 거액의 보물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이 역시 유감으로 남는다.

태평천국은 남경에서 십년간 힘들게 운영앴고, 각지의 기진이보를 궁내로 가져왔다. 각 왕부에도 모두 금은보화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경성이 함락되는 날, 증국번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아무런 보물도 얻지 못했다고 보고한다. 돈을 보관하는 창고도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태평천국의 재물은 얼마나 많았을까?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이것은 졸지에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남경 부자묘 첨원에 있는 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서 태평천국사 전문가인 장테바오(張鐵寶) 연구원은 웃으며 말한다: "태평천국 보물에 관한 전설은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하려면 먼저 천경이 함락되는 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1864년 여름,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전이 지휘하는 상군이 천경을 함락시킨다. 소식은 북경까지 전해지고, 동치제는 크게 기뻐한다. 당시의 청정부는 국고가 비어있었고, 재정이 부족하여, 군자금조차도 지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천경을 함락시킨 후, 태평천국의 재물을 가지고 시급한데 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략 1개월후, 증국번의 보고에 동치제는 크게 실망한다.

 

장테바오는 증국번의 보고서를 보여준다. 보고한 내용은 대체로 이와 같다: "여러해동안, 중국과 외국에 홍수전이 아주 부유하다고 소문이 났다. 그는 금은을 바다처럼 가지고 있고, 온갖 물건을 가득 쌓아두고 있다고 했다. 나는 증국전과 미리 협의를 해놓았다. 성이 함락되면 창고를 봉쇄한 후, 만일 돈이 많으면 호부로 보내고, 작으면 남겨서 군자금으로 쓰고, 난민을 구제하는데 쓰겠다고. 천경을 함락시킨 후, 우리는 3일간이나 수색했는데, 잔류한 반군은 홍수전의 천왕부를 스스로 방화하여 불태웠다. 2일후 우리는 자세히 알아봤는데, 소위 전고(錢庫)는 아예 없었다."

증국번의 보고서가 올라간 후, 조정은 금방 답신을 보낸다. 성안에 재물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조정에 바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사건은 끝이 난다.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과 외국에 널리 알려졌던' 태평천국이 부유하다는 것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증국번 형제는 원래 전고가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헛소문이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하단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장테바오는 이렇게 분석한다. "태평천국시기에 '성고(聖庫)제도'가 있었다. 이 성고는 국고에 상당한다. 그래서 증국번은 전고가 없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성고'제도는 민중들이 개인적으로 재물을 보관하지 말고, '천조성고'에 바치고, 다시 통일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의 관철을 위하여, 태평천국은 엄격한 법률를 만든다. 구제척인 집행표준은 오냥은자를 한도로 하여 숨긴 은자가 오냥을 넘으면 벌하는 것이다. 심지어 사형에까지 처한다.

1853년, 태평천국이 천경을 수도로 정한 후,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한다. 여기서 '성고'제도를 더욱 명확히 했다. 전체도시주민과 군대에 공급하는 '성고'에 재물이 많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성고내에 얼마나 많은 재물이 있었는지는 간첩 장계경(張繼庚)이 청나라 군대총사령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개략을 알 수 있다.

 

장테바오는 이렇게 소개한다: "장계경은 강녕 사람이고, 당시 많은 정통적인 독서인과 마찬가지로, 태평천국에 대하여 극단적인 원한을 지니고 있었다."

장계경은 도광연간에 진사가 된다. 나중에 호남포정사 반탁(潘鐸)의 막료를 지낸다. 당시 남경이 태평천국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강녕포정사는 장계경이 재능있다고 보고, 급히 그를 자신의 집으로 부른다. 태평군과 싸우는데 도움을 받으려 한 것이다. 장계경은 남경으로 온 후 한편으로 사병을 모집하고,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남경을 지킬 것인지의 계책을 세웠다. 얼마후, 남경성은 태평군에 점령당하고, 장계경 본인은 성내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태평천국에 귀순했지만, 실제로는 태평군내에서 반란을 책동하고 바깥의 청군과 호응하여 청군이 천경을 함락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장계경은 태평군내부로 들어가서, "동왕은 광동사람은 우대하고, 호남사람은 홀대한다"는 말을 퍼트려 수군장병의 반란을 교사한다. 동왕 양수청이 적시에 그의 거동을 발견하는 바람에 반란을 신속히 평정할 수 있었다.

 

잠복해있던 몇 달동안, 장계경은 청군 강남대영의 총사령관에게 7통의 서신을 써서 보낸다. 태평천국의 성내의 정부기구, 재산배치, 지형건축, 그리고 병력배치를 알려준다. 첫번째 서신에서 장계경은 명확히 언급한다. 태평천국이 막 남경을 점령했을 때, 대량의 은량을 운송하여 성고 안에 보관했으며, 모두 1800여만냥백은이라고. 몇개월후에는 겨우 800여만냥이 남았다 .장계경은 일단 청군이 성내로 진입하면 즉시 사람을 보내어 성고를 봉쇄하고, 재물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한다. 몇 달 후, 장계경은 또 다른 서신에서 다시 한번 성고의 상황을 보고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장계경의 보고는 별 작용을 하지 못한다. 1856년, 태평군이 청군의 강남대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천경의 3년에 걸친 포위망을 뚫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3년동안 성고는 재물적인 면에서 태평천국의 발전에 강력한 보장이 되었다. 그리고 장계경의 기록에 따르면, 성지의 위치는 수서문의 등롱항(燈籠港)이다.

성고의 위치도 확실하다. 장계경의 문자로 증명이 된다. 그렇다면 증국번이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원래 성고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러나, 실제로 태평천국 후기에 성고제도는 이미 이름뿐이었다.

1856년, 태평군이 청군의 강남대영을 격파했을 때, 천경성내에는 내부상잔의 '천경사변'이 벌어진다. 태평천국은 상승에서 하강으로의 전환점이었다. 1864년, 천경이 함락된 후, 충왕 이수성이 청나라군대에 생포된다. 그가 감옥에서 친필로 쓴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경사변후 국고에 은량과 쌀의 재고가없었다" 그는 자기 집의 양식을 가지고나와서 난민을 구제했다. 부대도 공급이 끊겼다. 그는 할 수 없이 집안 여인들의 악세사리를 팔아서 썼다.

남경대학 역사학과의 모가기(茅家琦)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천경사변전에 성고제도는 이미 파괴되었다. 장계경이 향영(向榮)에게 보고한 또 다른 서신에서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적의 성고는 이전 구월에 보고할 때 아직 800여만이 남았다고 했는데, 지금은 겨우 100만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장계경은 향영으로 하여금 하루빨리 천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도록 재촉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돈을 다 써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성고의 돈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하여 장계경은 서신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적의 동왕부에 1만여냥이 있고, 적의 천부에 칠천여냥이 있다. 적의 북구에 1천여냥이 있고, 나머지 대소 관아에서 보관하는 은량이 적지 않다. 의복은 더욱 부지기수이다."

"확실히, 소위 성고는 이미 태평천국 내부의 크고 작은 장수와 관리들에 의하여 나눠가져졌다." 모가기의 말이다. "이것은 일찌감치 태평천국이 수도를 정한 초기에, 성고제도는 집행과정에서 형식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소위 성고는 태평천국 후기에 심지어 형식조차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먼저 영왕 진옥성의 왕부로 된다. 상군이 천경을 함락시킨 후, 양강총독 증국번은 일찌기 등롱항의 전 영왕부내에 거주한 바 있다.

1970년대, 수서문 등롱문의 남경의약회사안에 고고인원들은 성고유적지를 발견했다. 나중에, 이곳의 석주기초는 현재 당자가에 있는 태평천국벽화전람관으로 옮겨져 있다. 두 개의 유금용봉조량은 태평천국박물관 내로 옮겨졌다.

 

성고내의 재물이 모조리 나눠가져졌을 뿐아니라, 태평천국후기에 대량의 재물이, 홍씨가족의 수중으로 모인다.

이수성은 형을 받기 전에 공술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홍수전의 큰형인 홍인발, 둘째형 홍인달은 모두 가렴주구했다. "형벌과 법으로" 재물을 긁어모았다. 천경이 청나라군대에 포위된 기간동안, 일반백성들은 옷과 식량이 없어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 이수성은 성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밀명을 내려, 백성을 성 바깥으로 내보내 살길을 찾게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홍씨가족의 사람들이 각 성문에 관문을 설치하고 도망가는 백성의 몸에서 돈과 재물을 모조리 빼앗았다.

이렇게 긁어모은 돈과 재물은 모두 그들의 사치향락에 썼다.

 

홍수전 본인은 천경을 수도로 삼은 후, 수만의 군민을 동원해서 백성의 집을 대거 철거하게 하고, 원래 양강총독의 관청부지에 다시 지어, 호화로운 천왕부를 짓는다. 완공한 후 천왕부의 성 주위 10여리는 성의 높이가 수장이고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외성은 태양성이라고 부르고, 내성은 금룡성이라고 불렀다." "조각이 정교하고, 금벽휘황했다" 나머지 각 왕도 천경성내에 왕부를 짓는다. 서로 경쟁하고, 온갖 향락을 누렸다.

이와 동시에, 태평천국은 위로는 천왕 홍수전에서 아래로는 각 수령에 이르기까지, 속속 생일축하활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천경을 수도로 삼은 후, 동왕 양수청은 특별히 각급 관리들에게 통보하여 천왕의 생일날에 천왕의 생일축하를 위하여 기진이보를 많이 준비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갑인년 사월 구일, 홍수전의 넷째아들이 출생한다. 동왕 양수청은 전선의 장수들에게 넷째아들의 만월(滿月)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진이보를 모아서 보내도록 명령했다.

 

장테바오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 간단한 사례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태평천국의 왕후장수들의 생활은 아주 호화사치스러웠다."

그러나, 쾌락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천경이 함락된 후, 태평천국의 장수들은 대부분 전사한다. 그중 홍인발은 난전가운데 죽고, 홍인달은 청나라군대에 포로로 잡힌 후 사형이 집행된다.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이 차지했던 재물도 함께 사라진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태평천국의 후기 실제권력자인 홍수전이 긁어모은 재물은 거대할 것이다." 장테바오의 분석이다. "후인들의 태평천국 보물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홍수전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금은재물은 홍수전에게 향락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거대한 재난도 가져온다.

1864년, 청병이 천경을 포위공격할 때, 성을 더 이상 방어하기 힘들다는 것이 눈에 보일 때, 홍수전의 정신은 철저히 붕괴된다. 이때 내외로 곤경을 당해, 성안에 탄약은 기본적으로 다 떨어졌다. 홍수전은 계속 신령을 소환하고 하늘에 먹을 것을 내려주어 자신의 병사들이 배불리 먹고 적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효과가 없었다. 공포와 절망의 이중고통하에서, 홍수전의 몸은 갈수록 악화된다. 그리고 6월 1일 천왕부에서 병사한다. 7월 19일, 상군은 금릉성을 함락시킨 후, 증국전이 사람을 시켜 홍수전이 묻힌 곳을 파내게 한다. 시신을 우화대 대영으로 파낸 후 신분을 확인하고 화장해버린다.

 

홍수전이 죽은 후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이 황급히 즉위한다. 막 '용상'에 앉자마자 청군이 천경을 함락시킨다. 천경을 함락당하는 날 밤에, 충왕 이수성은 어둠을 엄호삼아 유천왕 일행을 호송하여 성을 빠져나간다. 청군의 추격 속에 유천왕은 도왕 황문금이 지키는 호주(湖州)로 도망친다.

호주의 포위망이 약간 풀어지자, 소왕 황문영은 유천왕등 일행을 호송하여 안휘 광덕까지 간다. 호주성이 함락된 후, 황문금은 포위망을 뚫고 광덕으로 가서 유천왕과 회합한다. 그리고 유천왕을 호송하여 영국(寧國)으로 간다. 도중에 황문금은 중상을 입어 사망한다. 홀로 떨어진 유천왕 홍천귀복 일행은 금방 청군에 생포된다.

이 사실 때문에 일찌기 어떤 사람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태평천국이 남긴 거대한 재물의 상당일부분을 유천왕이 호주로 가져갔을 것이라고. 어떤 보도에서는 1954년, 일찌기 누군가 황문금이 거주하던 주택지에서 우연히 성인의 손바닥크기가 되는 큰 동전을 발견한다. 그 위에는 '태평통보'라는 몇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전설중의 태평천국 '성고'의 진고전(鎭庫錢)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론은 더욱 유력하게 태평천국의 호주 보물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이 주장에 대하여, 장테바오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당초, 천경성이 함락될 때, 이수성은 유천왕 일행을 호송하여 도망칠 때 청군으로 변장하여 겨우 성을 빠져나왔다. 유천왕은 목숨만 겨우 부지해서 도망치면서,자신의 두 친동생조차도 데려나오지 못했다. 대량의 보물을 가져나올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없다.

유천왕이 청군에 포로로 잡힌 후, 친필로 진술서를 썼는데, "진술서를 보면, 이 유천왕은 철저한 약골이다. 전혀 기개도 없다." 장테바오는 웃으며 말했다. "삶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태평천국의 모든 상황을 진술했을 뿐아니라, 청나라조정에 아부까지 한다." 그러나, 진술서에서 그가 유일하게 언급한 돈과 관련된 사정은 그가 도망가는 길에 권력을 상징하는 옥새를 잃어버려서, 임시로 나무로 도장을 만들어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문금의 옛저택에서 발견된 그 동전은 어찌된 일인가? 장테바오의 설명은 이렇다. "분명히 태평천국과 아무 관계가 없다. 태평천국의 화폐는 근본적으로 '태평통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보(聖寶)라고 불렀다." 장테바오의 말이다. 이전에 석달개의 대도하 보물에 관한 소문은 더더욱 근거가 없다.

천경사변후, 석달개는 어쩔 수 없이 천경을 떠나, 가는 길에 병마를 모집했다. 안휘, 강서, 절강, 호남, 복건등지를 지나서 최종적으로 사천에 도착한다. 사천에 들어간 후, 석달개의 부대는 이미 전투력을 거의 상실했다. 대도하의 앞에서, 그들은 현지 토사와 청군의 합공을 받아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하에서 어쩔 수 없이, 석달개는 삼군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아들을 이끌고 청나라군영으로 들어간다. 결국 능지처참을 당한다. 석달개의 잔여부대 이천여명은 그의 십여명의 왕비를 포함하여 결국 깨끗하게 도륙당했다.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하에서,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운데, 누가 보물에 신경을 쓰겠는가?" 장테바오는 웃으며 말한다. "소위 보물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사람들이 현실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낸 상상이다."

 

태평천국이 남긴 금전은 유천왕이 호주로 가져가지 못했다. 대도하에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일찌기 반벽강산을 점거했던 정권이 모아놓은 거대한 재물은 하룻밤만에 사라졌단 말인가?

남경성 서쪽에 살고 있는 왕병의는 문사연구전문가이다. 여러해동안 그는 이 문제를 주목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왕병의에 따르면, 장삼은 일찌기 이수성의 나마총관(騾馬總管)을 지냈다. 태평천국이 실패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돌연 부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그가 청량산에서 일찌기 태평군이 묻어둔 24상자의 금은보화를 발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남경의 변영, 태평항, 삼산가, 승주로 일대에는 모두 그의 집과 점포가 있었다. 예를 들어, 태평항 50호 장가고택은 규모가 아주 크다. 항전초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이곳은 일본의 헌병대구류소로 개조된다. 그 안에서는 많은 항일지사들이 구금되고 목숨을 잃었다. 해방후 이곳은 백하구양식창고로 개조된다. 1958년 강남기계공장으로 되고, 1980년대에는 원부지에 태평상하(太平商廈)가 지어진다.

 

그외에, 남경의 민간에는 석두성내의 마안산에 "장모장금굴(長毛藏金窟)"이 있다고 한다. 성의 서북쪽 노룡산에도 "장모장금굴"과 같은 류의 소문이 있다. 이들 소문가운데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천왕부 보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홍수전의 천왕부유적지는 현재의 장강로 292호 '총통부' 내에 있다. 당시 이곳은 홍수전이 거주하고 정무를 보던 핵심지역이다. 민간에서는, 의심이 많았던 홍수전이 분명히 자신의 집에 개인금고를 만들어두었을 것이라고 본다. 구체적인 장소에 대하여 민간에서는 그의 '금룡전' 아래에 있다고....

사실은 도대체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