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 미녀표준의 변천

중은우시 2013. 11. 9. 23:47

글: 석불이(石不易) 

 

 

 

1

 

여인이 예쁜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남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이 원칙은 고금이래로 바뀌지 않았다.

한 여인이 모든 여성친구들에게 예쁘다고 칭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낯선 남자 한 사람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만 못하다. 현재의 남성은 여자들이 약간 마른 것을 좋아한다. 아마도 어느 날인가 남자들의 심미관이 바뀌어서, 양귀비같은 체형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여자들은 다이어트계획을 버리고, 삼겹살을 마구 먹게 될 것이다.

다행히 현재사회는 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개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고대에는 아니었다. 여자의 체형은 반드시 남자들의 요구에 맞추어 발전시켜야 했다. 남자들이 통통한 것을 좋아하면, 여자는 죽어라 먹었다; 남자들이 발이 작은 것을 좋아하면, 전족을 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매일 거울을 보지만, 자신을 위하여 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원시사회에, 사람들의 미에 대한 개념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요구조건도 높지 않았다. 그저 체격이 좋고 아이만 잘 낳으면 되었다. 그때는 생존과 번식이 가장 중요했다. 여자가 아무리 예뻐도 먹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중에 부권제가 주도하게 되면서, 여자들은 재산과 권력의 상속권을 빼앗기게 된다. 남편에 의지하여 생활자료를 얻고 부양당하는 입장이 된다. 여자들의 생활내용은 단지 두 가지이다. 남편을 보살피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 그래서, "인류에게 독특하고, 여자들이 반드시 겸비해야할 심미의 주체객체의 이중신분, 북합구조에서 분리되어 남자들이 심미주체지위를 독점하게 된다."

더욱 무서운 일은, 주례(周禮)에서부터 시작하여, 도통자(道統者)들이 "남존여비", "부위처강(夫爲妻綱)", "삼종사덕"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여성도덕행위규범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련의 정신적, 신체적으로 여성을 마비시키는 중국특색의 족쇄를 씌워, 중국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역사적 발전방향을 제약했다. 중국고대에, 부녀는 비록 온유(溫柔), 화순(和順), 염정(恬靜), 전아(典雅)를 주요한 특징으로하는 중화지미(中和之美)는 있지만, 솔직 분방한 열정지미(熱情之美)는 결핍되어 있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현재의 중국여자는 이미 전통적인 보수를 타파하고 개방되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믿기 어려우면 길거리의 여자들을 보라. 아무리 적게 입어도 거리낌없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필자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솔직하고 분방한 것은 옷을 많이 입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독립적인 사상이 있느냐의 문제이다.

육체의 해방은 자랑할 것이 없다. 정신의 금고(禁固)가 정말 무서운 것이다.

 

2

 

노예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의 외재적인 모습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주유왕은 포사를 총애하는데, 분명 그녀의 용모를 중시한 것이지, 생육능력을 중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웃음 한번을 보기 위하여,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하지 않았을 것이다. 춘추시대, 초문왕은 식국의 국군의 부인인 식부인이 예쁘게 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병력을 보내어 식부인을 빼앗아 온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집안과 사람을 모두 망가뜨린다. 필자의 생각에 식부인은 전설에서처럼 예쁘지는 않았을 수 있다. 중국의 소문은 항상 과장되었기 때문이다. 초문왕이 이처럼 무력을 동원한 것은 그에게 여자가 부족해서는 아니다. 그저 천하의 여인들에게 자신의 역량을 자랑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인류사회와 동물세계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남자들은 약간 호색하는 것이 정상이다. 예쁜 여인을 만나서 부인으로 삼고 후대를 약간 개량하겠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 다만 만일 여자를 많이 차지하기만 하고 품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역사적으로 여자를 가장 많이 차지한 사람은 역대 제왕들이다. 황제는 천하에 군림하며 그는 먼저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인을 뽑아서 후궁으로 채웠다. 나머지 미녀는 권세있는 사람들이 나누어가졌다. 마지막에는 찌그러진 호박과 갈라진 대추는 인민대중에게 남겨준다. 난장이중에서 장군을 뽑는 격이다. 남은 여인의 품질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다보면 역시 등급이 생긴다. 남자의 심미관도 점차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어쨌든 키가 크고 작고 뚱뚱하고 야윈 것은 있기 마련이다. 무우와 배추는 각각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통일된 기준은 없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민간에도 공인된 미녀가 있다. 누구든지 보면 코피를 흘릴 정도의 그런 여인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서시이다. 서시는 원래 저라촌(지금의 절강성 제기)의 한 시골아가씨였다. 천성적으로 미인이어서 마대자루를 입어도 선녀처럼 보였다. 나중에 서시는 선발되어 오왕 부차의 후비가 되고 미색으로 오왕을 홀려서, 월왕 구천이 힘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나중에 월국이 "십년생취(十年生聚), 십년교훈(十年敎訓)"으로 마침내 약국에서 강국으로 변신하고 오나라를 물리친다. 그리고 춘추의 패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오나라 실패의 원인을 홍안화수라고 한다. 서시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나타났다. 어떤 여인이 홍안화수의 급에 도달했다고 볼 것인가? 확실히 얼굴을 한번 보기만 하면 토하고 싶은 여인이라면 배제해도 좋을 것이다. 고대에는 영상기술이 없어서, 우리는 미녀의 용모를 확실하게 묘사하기 어렵다. 어떤 경우는 그저 언어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장자. 제물론>에는 이렇게 춘추시대의 양대미녀를 묘사하고 있다. "모장, 여희는 사람들 가운데 아름다운 여인이다. 물고기가 그녀들을 보면 깊이 들어가고, 새가 그녀들을 보면 높이 날아간다. 미록(麋鹿)이 그녀들을 보면 도망친다. 이들 넷이 어찌 천하의 아름다운 여인을 알겠는가?" 그 뜻은 모장, 여희가 비록 인간에서는 아름답지만 동물들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중에 당나라때의 시인인 송지문은 서시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왕사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경입송라(鳥驚入松蘿) 어외침하와(魚畏沉荷花)"라고 하였다. 그후 점차 미녀를 형용하는 "침어낙안지용(沉魚落雁之容), 폐화수월지모(閉花羞月之貌)"라는 말이 나타났다.

사실을 얘기하자면, 고대인들이 미인을 묘사한 문구로는 구체적인 인물을 상상해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양귀비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통통하다고 알고 있으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체중이 분명히 기준초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머릿 속에 있는 양귀비는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이다. 그 여자가 아무리 말랐더라도.

일천명의 독자에게 일천명의 햄릿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남자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 자신의 여신이 있다. 당신의 미녀표준은 분명히 나의 것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차이가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차이가 크지 않은 곳이 바로 우리 시대의 미녀표준이다. 예를 들어, 몸매가 균형잡히고, 오관이 단정하고, 피부가 뽀얀 것등등이다.

어쩔 수가 없다. 세계에 단지 당신 한 사람 혹은 여인만 남은 것이 아니다. 남녀가 공존해야 한다. 피차간에 상대방의 심미표준을 바꿀 수는 없다.

 

4

 

기실 오늘날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심미표준은 한나라때부터 이미 있었다. 만일 하나의 윤회로 본다면, 뚱뚱한 여자도 기죽을 것없다. 잘 살아있으면 수백년후에 아마도 뚱뚱한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될 지도 모른다.

한나라때 민간미녀의 표준을 사서에 기록해두지는 않았다. 궁정의 여인들의 용모기준은 상세하다. 중국인은 유행을 따라하기 좋아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민간과 궁정의 표준이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후한서.후기.서>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한나라때 후비를 선발할 때, 후보자의 용모, 형체에 대한 요구는 "자색단려(姿色端麗), 합법상자(合法相者)"이다. 이런 요구조건은 너무나 모호하다. 다행히 우리는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한혜제의 황후 장언(張嫣)이다.

장언은 한혜제의 누나인 노원공주의 장녀이다. 한혜제의 외조카딸이 된다. 그들은 근친결혼이다. 놀랄 것없다. 이런 일이 고대에는 정상적이었다. 비정상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장언의 용모특징을 살펴보면 된다.

장언은 평상시에 집안에 있어서 일반인들이 볼 수 없었다. 문을 나설 때도 꼭꼭 덮어쓰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궁하기 전에 전신 신체검사를 거쳐야 했다. 이것은 얼굴을 꽃처럼 예쁘지만, 피부는 거친 여자가 궁중으로 섞여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만일 잠을 잘 때 황제를 놀라게 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장언의 신체검사를 한 사람은 한 할머니이다. 방법은 장언을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목욕을 할 때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장언의 몸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한서.효혜장황후전>에는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장언)은 장이략원(長而略圓), 결백무하(潔白無瑕), 양협풍유(兩頰豊腴), 형여만월(形如滿月), 아미이봉안(蛾眉而鳳眼), 용준이선빈(龍準而蟬鬂), 이대수견(耳大垂肩), 기백여면(其白如面), 궐상광원(厥顙廣圓), 이광가감인(而光可鑒人), 궐흉평만(厥胸平滿), 궐견원정(厥肩圓正), 궐배미후(厥背微厚), 궐요섬유(厥腰纖柔), 기리니결(肌理膩潔), 비척합도(肥瘠合度), 불치불양(不痔不瘍), 무흑자창함(無黑子創陷), 급구비액족제사병(及口鼻腋足諸私病)."

장언이 입궁하여 한혜제에게 시집갔을 때는 겨우 12살이다. 그녀가, "온묵정정(溫默貞靜), 미상견치(未嘗見齒), 족불하각(足不下閣)" 했다는 것은 아주 수양이 잘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년이 된 후, 장언은 "신장 칠척이촌, 방구미발(方口美髮)"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키는 170센티미터 정도 되었을 것이니 아주 큰 편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절대로 지성미를 갖춘 미인이라 할 만하다. 당연히 모든 여자가 장언처럼 기준에 도달할 수는 없다. 보통여자는 그녀의 한 두 기준에만 맞추어도 아주 괜찮은 편일 것이다.

한나라때 장언 말고도, 또 한 명의 전형적인 미녀가 있다. 그녀는 바로 한성제의 황후인 조비연이다.조비연의 체모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纖細), 경유(輕柔)이다. 한성제는 그녀에 대하여, "풍약유여(豊若有餘), 유약무골(柔若無骨)"이라고 한 바 있는데, 손 바닥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일 정말 그런 여자가 있다면 확실히 어떤 남자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5

 

한나라 남자의 여성에 대한 심미는 대체로 정상이었다. 그러나 위진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자들의 신경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주로 통치계급의 명문세가의 가족에서 시작된다.

당시, 사회에서는 인물의 품조(品藻)를 아주 중시했다. 소위 인물의 품조라는 것은 개괄해서 말하자면 재정(才情)을 중시하고, 사리(思理)를 숭상하며, 방달(放達)을 표방하고, 용모(容貌)를 감상하는 4가지 방면이다.

"중재정"은 인물의 개성, 재능, 정감의 미를 가리킨다; "숭사리"는 인물의 지혜, 언어미, 변론의 말재주를 가리킨다; "표방달"은 철리적인 의미를 지닌 공리를 초월하는 인생경지의 아름다움이다; "상용모"는 인물의 형체, 풍도, 거지등 외재적인 아름다움이다.

이들 표준은 남녀에게 통용된다. <세설신어.용지>의 기술에 따르면, 위진시기의 사족대가는 의용수식(儀容修飾)을 아주 중시했다. 차분훈향(搽粉薰香)을 좋아했다. 용모가 준수하고, 풍모가 뛰어난 사람들은 왕왕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다. 어던 남자는 용모와 행동거지가 여성화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부축해주어야 드나들기도 했다. 여기에서 전형적인 사람은 반안(潘安)이다. 반안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역사상 유명한 미남자이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움은 일종의 유미(柔美)의 아름다움이다. 유명했기 때문에, 매번 그가 길거리에 나서면 여자들이 둘러싸서 보았다. 현재의 스타들과 다를 바 없다.

여자 특히 상층여자는 위진의 기풍과 현학변론의 영향하에, 정이 많고 개성이 풍부해진다. 이것은 진한시대와 차이가 크다. 한나라때는 유가의 <시>, <서>, <예>등 전적을 잘 알고 운용하며 생활에서 유학의 예교를 잘 지켜야 했다; 위진시대에는 여러 방면의 재능을 표현하였고, 예교의 속박은 비교적 적었다. 그중 가장 전형적인 사람은 "영서지재(咏絮之才)"의 사도온(謝道韞)과 서예가 위부인(衛夫人)이다.

여기서는 위부인을 중점적으로 보도록 하자. 위부인은 중국고대에 보기 드문 여성 서예가이다. 그녀의 글자는 청수평화(淸秀平和), 한아완려(嫻雅婉麗)하다. <당인서평>에서는 "삽화소녀(揷花少女)와 같이, 저앙미용(低昻美容)하고; 또한 미녀등대(美女登臺)와 같이, 선아농영(仙娥弄影), 홍련영수(紅蓮映水), 벽해부하(碧海浮霞)한다" 듣기에 상투적인 말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확실히 진정한 재능을 지녔다. 그녀는 일찌기 "서성" 왕희지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은 위진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왕조시대였다면, 대갓집 규수가 비록 글을 읽고 글자를 쓰더라도, 그것은 모두 시간때우는 용이고, 글자를 아무리 잘 쓰더라도 그것은 그저 스스로 즐기는 것이지, 사회주류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진시대에는 여자들이 진정 살아가려면 재주만 있어서는 안되었다. 당시에 허윤(許允)이라는 명사가 있었는데, 완덕위(阮德慰)의 딸 완씨(당시 사대추녀의 한 명)를 처로 삼았다. 신혼날 밤에, 기쁨에 넘쳐 얼굴가리개를 걷은 그는 자신의 부인의 용모가 아주 공포스러울 정도라는 것을 알고는 귀신을 본 것처럼 집바깥으로 도망치고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허윤의 친구인 환범(桓范)은 이런 상황을 알고난 후, 자신의 견해를 얘기한다.완덕위도 신분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절대로 아무런 이유없이 이렇게 추악한 딸을 너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쓰레기하치장이 아니다. 역시 확실하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허윤은 환범의 건의에 따라, 다시 신방으로 들어간다. 다만 완씨를 보자 여전히 다시 밖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에게 붙잡힌다. 허윤은 한편으로 버둥거리며 한편으로 말한다: '부녀에게는 '사덕(四德, 봉건예교에 따라 부녀에게 갖출 것을 요구한 부덕, 부언, 부용, 부공의 네 가지 덕행)'이 있는데, 너는 몇 개에나 부합하는가?" 완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용모가 좀 못생겼다. 그러나 독서인은 '백행(百行)'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몇 개나 부합하는가?" 허윤은 아주 자신있게 말한다. "나는 '백행'을 구비했다" 완씨는 다시 대답하여 말한다: "백행에서 덕(德)이 으뜸인데, 당신은 호색(好色)하고 호덕(好德)하지 않으니, 어찌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허윤은 그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 말에서 딸린다고 보고, 억지로 완씨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서로 사랑하는 부부로 지내게 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래도 원만한 편이다. 완씨는 운이 좋았다. 그녀의 운은 자신의 재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녀가 괜찮은 남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실은 증명한다. 추악한 여자는 재주가 있으면 있을수록 시집가기 어렵다고.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조건이 나쁜 남자는 그녀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고, 조건이 좋은 남자들은 여자들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그저 예쁘고 간단한 여자를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추녀의 비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6

 

수당시대에 여인은 뚱뚱한 것을 아름답게 보았다. 원인은 여러가지이다.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당시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이전에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대당성세를 맞이하여,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뚱뚱하다는 것은 잘 먹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인체의 미학은 '뚱뚱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당나라때 가장 저명한 미인은 양귀비이다. 양귀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사서에 기록이 있다. 몸무게가 얼마나 나갔는지는 설명이 없다. 설사 뚱뚱했다고 하더라도, 비율이 맞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나라때 사람인 진홍이 쓴 <장한가전>을 보면 이렇게 양귀비를 묘사한다: "빈발니리(鬂髮膩理), 섬농중도(纖穠中度), 거지한야(擧止閑冶), 여한무제이부인(如漢武帝李夫人), 별소탕천(別疏湯泉), 조사조영(詔賜澡瑩), 기출수(旣出水), 체약역미(體弱力微), 약불임라기(若不任羅綺), 광채환발(光彩換髮), 전동조인(轉動照人)." 어디 한 군데 "뚱뚱하다"는 말은 없다. 이를 보면 뚱뚱하다는 것이 양귀비의 결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고인의 사료, 필기류에는 모두 예술적인 가공이 덧붙여졌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말해서, 화상이 전달하는 정보가 더욱 직관적인 면이 있다. 사녀화상(仕女畵像)을 통해서 보면, 당나라이전의 인물형상은 대부분 체형이 온중돈실(穩重敦實)하고 얼굴형은 대부분 타원형이다. 오히려 수나라, 당나라초기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이 비교적 청수(淸秀)하다.

당고종, 무측천이후, 사녀화와 여용에서 '풍유비석(豊腴肥碩)"한 모습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 사회의 심미관의 주류는 풍석(豊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그렇다고 하여 섬세하고 마른 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 백거이는 두 명의 가기(家妓)를 두었는데, 한 명은 번소(樊素)로, 노래를 잘 했고, 한 명은 소만(小蠻)으로 춤을 잘 추었다. 그는 일찌기 이런 시를 지은 바 있다: "앵도번소구(櫻桃樊素口), 양류소만요(楊柳小蠻腰)". "앵도소구", "양류세요"는 여성미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심미기준은 당나라말기까지 지속된다. 오대시기, 여성미는 다시 적중(適中)의 정도로 돌아간다. 남당의 화가 고굉중의 <한희재야연도>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화면의 예기와 시녀는 이미 날씬한 모습이다. 그래서 여성의 몸매는 이렇게 남자들의 계속 바뀌는 입맛에 따라 팽창하거나 축소되어 왔다. 그녀들은 한번도 자신을 위하여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

 

7

 

송,원,명,청의 여성미의 표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하나의 공통된 특징은 있다. 그것은 정절(貞節)을 제일로 삼은 것이고, 소각(小脚, 전족)을 가장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만족하면, 그 다음에 키가 큰지 작은지, 몸이 뚱뚱한지 마른지를 살폈다. 이들 표준은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내심에서의 어떤 공백을 메워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것이 고대미녀표준의 노선도이다. 그 추세는 남자들의 기호에 따라 결정되었다. 불공평하기는 하지만, 이 선은 그래도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단지 파동이 이전처럼 강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외에, 이전과 다른 것이라면, 현재 여인은 미남의 표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인가, 모든 여인들이 키작고 통통하게 생긴 것을 좋아한다면, 무대랑같은 류의 사람들이 여성의 마음 속에서 백마를 탄 왕자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