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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 3번의 "삼국시대"

by 중은우시 2013. 11. 15.

글: 황작비비(黃雀飛飛)

 

삼국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왕왕 동한 말기부터 서진까지의 사이에 있었다. 위, 촉, 오의 3국정립시대의 역사를 떠올린다. 실제로 중국역사에서 3번의 삼족정립(三足鼎立)의 역사시기가 있었다.

 

제1차 삼국시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삼국시대이다. 연대는 대체로 기원후220년에서 280년까지의 기간이다. 즉 220년(건안25년) 조비가 한나라에서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여 위나라를 건립한 것을 표지로 한다. 다음 해 4월 유비가 성도에서 황제에 즉위하니, 역사에서 촉한이라 칭하다. 222년 손권이 칭왕하며 오나라를 건립한다(229년에 칭제함). 역사에서 동오라고 부른다. 이제 삼국정립의 국면이 형성되었고, 그후 수십년간, 삼국간에는 상호 정벌이 이루어진다. 오, 촉 양국은 조위 독대(獨大)의 국면을 타파하지 못했다. 263년 정월, 위상국 사마소가 대장 종회, 등애를 파견하여 촉을 멸하니, 촉한이 멸망한다. 삼국은 겨우 둘만 남는다. 265년 12월 사마소가 병사하고, 아들 사마염이 위원제 조환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진(晋)이라 한다. 역사에서 서진이라 부른다. 279년 11월 진나라는 육로대군으로 오나라를 정벌한다. 280년 3월, 손호가 투항하니 동오정권이 멸망한다. 자세히 계산해보면 진정으로 삼국정립한 시기는 겨우 34년가량이다(229년-263년)

 

제2차 삼국시대: 남북조시기의 후기이다. 남북조라고 하지만, 사실상 남조는 남조이고, 북조는 북조이다. 남북 양조의 사이에는 상호 정벌이 계속되었고, 동시에 각자 내부정권의 교체도 빈번하였다.

 

먼저 남조를 얘기해보자.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남조는 화하(華夏)의 정통(正統)이다. 국가정권은 시종 한민족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중화전통문화는 남조에서 연속되고 발전했다. 420년 6월, 북부군(北府軍) 장수 유유(劉裕)가 진공제 사마덕문을 폐위시키고, 남조 송(宋)정권을 건립한다. 이것은 남조의 정식 개시를 나타낸다. 그후, 회하(淮河) 이남의 중국은 장강유역을 중심으로 전후로 송, 제(齊), 양(梁), 진(陳)의 4개정권이 건립된다. 이 4개정권의 통치자는 대부분 염치가 없고, 내분과 상호 잔살에 바빴으며, 정권은 모두 비교적 단명했다. 589년 정월, 북방에서 온 대수(大隋) 정권이 남진을 멸망시킨다. 근 170년에 이르는 남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와 동시에, 중국북방의 황하유역은 시종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북조는 북위(北魏)에서 시작하고 선비족인 척발규(拓拔圭)가 북방각국을 통일한 후, 건립한 소수민족정권이다. 이 때 남방은 아직도 동진시기이다. 북위후기(534년을 전후하여), "육진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선비족 장군 우문태(宇文泰)와 고환(高歡, 선비명 '하육혼(賀六渾)'으로 한화된 선비족)은 각각 북위황족 원보거(元寶炬, 즉, 척발보거, 서위 효문제)와 원선견(元善見, 척발선견, 동위 효정제)을 황제로 옹립하여, 역사에서 서위, 동위라고 부르는 두 개 정권을 건립한다. 서위와 동위는 대체로 동관(潼關)을 경계로 하여, 남방의 남양(南梁)정권과 정족지세를 이룬다. 550년 3월, 고환의 아들 고양이 황위를 찬탈하여 북제(北齊) 정권을 건립한다. 557년 10월,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은 황제위를 찬탈하여 북주(北周) 정권을 건립한다. 그후 북제, 북주와 남량(후에 남진이 됨)의 3개국이 정족지세를 이룬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병합하여 북방을 통일한다. ㅂ581년 2월, 북주의 상국(相國),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이 황제위를 찬탈하여 대수(大隋)정권을 건립한다. 589년 정월, 수나라군대는 남하하여 남진을 멸망시키고, 남북조시대는 끝이 난다.

 

남북조는 모두 170년간 지속되었다. 삼국이 정립한 시기는 개략 43년(534년-577년)간이다. 이것은 두번째 삼국시대이다. 비록 남북정권은 모두 교체되었지만, 삼족정립의 국면은 시종 바뀌지 않았다. 동진이래 250년의 전쟁국면은 마침내 통일된 것이다. 대당성세가 곧 도래하였다.

 

제3차 삼국시대: 우리가 습관적으로 송나라 혹은 양송이라고 칭하는 시대이다. 송왕조(960-1279)는 오대십국(五代十國)을 이어 왕조건립초기에는 강역이 아주 좁았다. 후진의 고조 석경당(石敬瑭)이 연운십육주를 거란에 할양하였기 때문에, 중원정권은 장성이남의 요지를 상실하게 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 천진, 하북북부, 산서북부의 넓은 토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가 조밀하고, 농경이 아주 발달했다. 거란인의 유목문화와 중원한인의 농경문화가 서로 결합하여, 대요국(大遼國), 인구수량, 정치문화등에서 모두 큰 발전을 이룬다. 남방을 통일한 대송왕조와 서로 대항할만한 수준이 되었다.

 

북송정부는 중문억무(重文抑武)를 기본국책으로 삼아서, 문신을 중용하고, 무신을 경계한다. 그리하여 군대의 전투력이 오랫동안 약한 편이었다. 송태종이 두번에 걸쳐 요나라군대에 패배한 후, 송나라조정은 쉽게 전쟁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된다. 대요국도 남하할만한 실력은 없었다. 1004년(송경종 경덕원년) 윤구월, 요송군대는 전주(澶州)에서 대치한다. 최종적으로 "전연지맹(澶淵之盟)"을 체결한다. 양국은 장기간 대치 및 평화시기(120년가량)에 접어든다. 1125년, 대요국은 동북에서 온 여진정권 금나라에 멸망한다. 금나라는 대요국의 토지와 인민을 모조리 승계한다. 그리고 송나라와 장기간 전투를 벌인다. 마지막에는 몽골대초원의 징기스칸의 자손에게 멸망당한다. 이 시기에, 중원인은 습관적으로 요나라와 금나라를 북조라고 불렀고, 상대방인 대송정권을 남조라고 불렀다.

 

북송초기, 송요전투가 빈번했고, 다른 일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장기간 중국의 서북지구에 웅거하고 있던 당항(黨項) 부락이 이 기회를 틈타 굴기한다. 그리고 일방의 할거세력이 된다. 당항인은 선비족의 후예이다. 전투에 익숙하고 능했으며, 당나라말기에 반란을 평정하여 공을 세워 그들의 수령인 척발사공은 당왕조에 의하여 이씨성을 하사받았고, 하주절도사(夏州節度使)가 된다. 이사공(李思恭)의 후손은 장기간 중국서북방을 차지했다. 하주를 중심으로 오대십국과 북송정부의 책봉을 받았다. 982년, 이계천(李繼遷)은 당항부락을 이끌고 송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요나라의 지원하에 송나라군대와 전투를 벌인다. 송나라군대는 시종 그들을 토벌하지 못한다. 997년(송태종 지도3년), 송진종은 대신 왕우칭(王禹偁)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 수(綏), 은(銀), 유(宥), 정(靜)의 5개 주를 조보길(趙保吉, 즉 이계천)에게 하사하고 그를 정난군절도사(靖難軍節度使)에 임명하여, 명목상의 귀부(歸附)를 얻어낸다. 그 후, 이계천 및 그의 후계자인 이덕명(李德明)은 하서주랑으로 발전하여 계속하여 토번, 회흘의 세력범위를 잠식하여, 영토를 계속 확장한다. 1038년 11월, 이덕명의 아들 이원호(李元昊)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 대하국(大夏國)을 건립한다. 역사에서 서하(西夏)라고 부른다. 서하가 건립된 후, 전후로 북송과 대요의 진격을 막아낸다. 전성기에는 기병 30만명을 보유하여, 북송, 대요와 3국정립의 국면을 이룬다. 1226년(송이종 보경2년, 몽골 징기스칸 21년), 서하국은 신흥 몽골국에 멸망한다.

 

우리가 양송이라고 부르는 이 역사시기에, 1038년 이원호가 대하국을 건립한 때로부터, 송, 요, 하의 3국이 삼족정립한다. 1125년, 금나라가 대요정권을 멸망시킨 후, 다시 송, 금, 하의 3족정립의 국면이 형성된다. 이 국면은 1226년 서하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모두 188년간 지속되었다. 이것이 중국역사상 최장의 "삼국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