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북경일보 2013. 4.16
2013년 4월 14일 오후, 양저우(揚州)시 문물국은 기자회견을 열어, 한장구(邗江區)에서 발견된 두 개의 묘장중 이미 발굴된 하나가 수양제릉이라고 선포했다. 이 고묘에서 발굴된 묘지(墓誌)에는 "수고양제묘지(隋故煬帝墓誌)"라고 적혀 있었다. 명문상 기록된 시기는 "대업십사년(大業十四年)"으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발굴과정에서 4건의 규격이 아주 높은 유동금포수(鎏金銅鋪首), 금양옥요대(金鑲玉腰帶)등 문물이 출토되었는데, 전형적인 황실규격이다. 그중 유동금포수는 웅사(雄獅)의 조형으로 두 눈이 부리부리하고, 아주 위엄있다.
수양제릉은 양저우시 한장구 시후진(西湖鎭) 사투춘(司徒村) 차오좡(曹莊) (즉, 오공대(吳公臺)의 소재지)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전 시후진 상수도공장이며 현재는 "중성해상자군(中星海上紫郡)"이라는 부동산프로젝트의 중심지역이다. 이 부동산프로젝트의 시공때 두 개의 고묘가 발견되었는데, 각각 점유면적이 2,30평방미터이고, 수말당초의 전실묘(塼室墓)였다.
기자회견에서, 양저우시 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쑤자핑(束家平)에 따르면, 작년 시공장소에서 시공때 약간의 고대 벽돌파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건축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고고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금년 설날이후, 공사부지에 대한 전면평탄화작업에 들어갔는데, 나타난 벽돌이 더욱 많아졌다. 고고발굴단이 투입되고, 탐사를 거쳐 2개의 전실묘를 확인한다. 이미 발굴된 서쪽의 수양제묘는 묘실, 이실(耳室), 용도(甬道)를 포함한다. 묘장안에서, 고고인원은 구리로 만든 함환포수(銜環鋪首), 금양옥요대, 동전과 쇠못(鐵釘)등 십여건의 문물을 발견한다. 수량은 비교적 적었으나, 등급은 아주 높았다. 4건의 동포수는 도금을 했을 뿐아니라, 크기가 아주 컸다. 분명히 관곽(棺椁)에 썼을 것이다; 옥요대의 바깥은 금으로 싸고 있다.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금양옥'이다. 이런 두 가지 배장품은 보통관리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황실의 규격이다. 이는 묘주인의 신분이 비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묘주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묘지"이다. 위에는 분명히 쓰여 있다. "수고양제묘지", 묘지명문의 기재는 묘주인의 사망시간을 "대업십사년"이라고 적고 있다. 즉 618년인데,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 "제붕어양주(帝崩於揚州)", "....어유주당(於流珠堂)", 그리고 수양제 양광의 사후 소후(蕭后)가 매장한 장소를 분명히 적고 있다. 이런 내용에 근거하여 전문가들은 묘주인을 수양제라고 인정하였다.
수양제묘는 남북으로 길이가 4.98미터, 동서로 길이기 5.88미터이며 묘실이 깊이는 2미터여이다. 중소규모의 묘장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돈있는 사람의 묘제규격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고인원이 발굴할 때 이것이 황제릉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고고인원의 분석에 따르면, 수양제의 규모가 적은 것은 그의 사인과 여러번 이장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쑤자핑은 말한다: "이 두 개의 묘의 점유면적은 아주 적다. 제왕릉이 갖추어야할 규모와 기세를 갖추지 못했다. 더더구나 양광이 크게 공사를 벌이는 것을 좋아했던 성격과도 맞지 않는다. 이것은 주로 그의 사인과 관련있을 것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618년, 수양제가 양주를 순행하는 기간동안, 금위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중신 우문화급을 수령으로 받들고, 양광을 목졸라 죽인다. 쑤자핑은 이를 근거로 추측한다: "아마도 수양제가 피살될 때는 특수한 시기이다. 망국지군의 묘는 규모가 적은 경우가 많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양광이 죽은 후, 소황후는 궁인과 칠제상판(漆制床板)으로 관을 만들어, 그를 강도궁(江都宮, 강도는 지금의 양주) 유주당에 묻었다고 한다. 우문화급이 부대를 이끌고 강도를 떠난 후, 강도를 지키던 대장 진릉(陳棱)은 수양제의 옛은혜를 생각하여, 그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고 오공대 아래로 개장한다.처참한 말로는 이 제왕의 능묘규격을 당시 돈있는 사람의 규격에도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도 이 묘의 진실성을 인증한다.
그러나, 고고인원은 묘장에서 관곽과 유해를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양저우의 한광릉왕묘와 같은 규격의 묘장에서도 관목이 완전하게 보존되었는데, 수양제묘는 그보다 늦은데,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은데 대하여 의문을 나타냈다. 이에 대하여, 쑤자핑 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양저우는 장강중하류평원에 위치하고 있고, 기후가 다습하여, 관곽이 부패하는 것은 아주 평상적인 일이다. 광릉왕묘에서 사용된 관목은 활실 최고규격의 금사남목(金絲楠木)이었고, 수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것이다. 수양제가 피살된 처참한 말로로 그의 관목은 금사남목같은 고급목재를 쓸 수가 없었다. 다른 재질의 관목이다. 1천여년의 시간 속에 모조리 부패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쑤자핑은 동시에 이렇게 지적했다. 수양제묘는 역사적으로 여러번 도굴당했다. 게다가 1960년대이후, 현지 촌민들이 묘실의 위에 주택을 지었다. 아마도 언제인지도 모르게 수양제의 관곽은 파괴되었을 것이고, 겨우 몇 건의 유물을 남긴 것도 불행중 다행인 셈이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수양제능묘는 여러번 이장되었다. "수양제 양광(569-618), 재위14년, 처음에 강도궁 유주당에 매장했고, 나중에 오공대 아래로 이장한다. 당나라가 강남을 평정한 후, 황제의 예로 뇌당(雷塘) 현 장소로 개장했다. 청나라 가경12년(1807년) 대학사 완원(阮元)이 그를 위하여 비석을 세워주었다. 양주지부 이병수(伊秉綬)는 예서로 "수양제릉"이라고 써주었다."
648년, 소황후가 병사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그녀의 유체를 강도로 보내어 수양제와 합장하도록 명한다.이상이 사료에 근거하여 전문가들은 동쪽의 또 다른 묘의 묘주는 소황후일 것으로 추측한다. 비록 크게 자신하지는 않지만, 동쪽의 묘장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만일 동쪽 묘장에서 더 많은 문물이 나온다면, 이번에 발굴된 수양제릉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역사에 의하여 천여년간 포폄이 있는 황제의 생전생후의 일들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고고인원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그 묘지이다. 묘주신분을 단정하는 관건적인 글자는 아주 분명했다. 다만 절대다수의 글자체는 이미 모호해져서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수양제 양광은 역사적으로 명성이 아주 나쁘고, 사람들이 그를 떠올리면 부친을 시해하고 형을 죽이고, 황음무도하고 잔혹하며,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폭군의 이미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학계에서, 수양제는 공과와 시비가 아주 복잡한 인물이다. 그가 막 죽었을 때, 특히 천하를 빼앗은 이당왕조가 어떻게 그를 평가했는가? 이 묘지는 새로운 사료를 제공해 줄 것이다. 현재 양주시문물국은 과학연구소와 연결하여 과학기술을 통하여 묘지문자의 비밀을 해독하고자 하고 있다.
저명한 작가임 문사(文史)전문가인 딩자통(丁家桐)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전국을 깜짝 놀라게할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천여년만에 처음으로 수양제의 확실한 안장지가 발견된 것이다. 역대묘장의 이장과정을 연구하고, 수나라 강도궁의 구체적인 위치, 규모를 알아내는데 모두 도움을 줄 것이다. 양주사학계로 말하자면, 이것은 중대한 성과이다. 어쨌든 수양제는 양주역사상 양주에 안장된 유일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문화학자인 웨이밍화(韋明铧)는 이를 세계를 놀라게할만한 중대한 고고학적 성과라고 본다. 수양제릉은 이미 수나라문화연구를 발전시키고, 역사를 복원하는데뿐아니라 양저우의 관광산업의 새로운 자원이 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중대한 발굴이므로, 고고팀은 발굴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고고현장을 폐쇄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전문가의 논증을 거쳐 고고계획을 완벽하게 만든 후, 다시 고고학적 발굴에 들어갈 것이고,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를 상의할 것이다.
이번 고고학적 발굴위치는 양저우의 서부이다. 이전에 성급문화재보호단위로 공표된 수양제릉은 한장구 화이쓰진(槐泗鎭) 화이알춘(槐二村)에 있다. 청나라 가경연간 대학사 완원이 고증한 후 돈을 내어 만든 것이다. 양자간에는 5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 화이알춘에 소재한 뇌당(雷塘)은 바로 당나라때 수양제를 위하여 능묘를 만들어준 곳이다. 그것이 이연이 양광을 위하여 만들어준 능침인지는 고증이 더 필요하다.
뇌당 수양제릉은 3만평방미터를 차지한다. 석패루, 능문, 성원(城垣), 석궐(石闕), 측전(側殿), 능총(陵塚)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능묘는 기세가 웅위하여 전형적인 수당의 건축풍격이다. 능총은 아주 정교한 평정금자탑형이다. 높이는 12미터이고, 사방이 모두 규칙적인 등요제형(等腰梯形)이다. 상하변의 길이는 각각 8미터와 29미터이다. 능앞에는 청나라때 양주출신의 대유학자 완원이 능을 만들 때 세운 석비가 잇다. 비문에는 "수양제릉"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의 서예가이자 양주지부인 이병수가 쓴 것이다. 우측에는 "대청가경십이년재적전절강순무완원건석"이라고 썼고, 좌측에는 "양주부지부이병수제"라고 썼다. 능의 남쪽에는 석호파(石護坡)가 있다. 관광객은 걸어롤라갈 수 있고, 능의 사방에는 송백나무를 심었다.
1980년대이후, "가짜수양제릉"은 여러번의 보수공사를 거쳐, 양주의 저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쑤자핑은 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양제는 당나라초기에 뇌당으로 개장한 명확한 기록이 있다. 다만, 현재 묘지는 5킬로미터바깥에 있는 조장에서 발견되었다. 그중의 연유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 이곳이 오공대인지 아닌지, 강도궁, 뇌당과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현재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그는 말했다. 현재 뇌당릉이 가짜릉이라고 말하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전문가는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독특한 역사적 원인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수양제는 부하에게 피살되었으므로, 그다지 명예롭게 죽지 못했다. 당나라이후 수양제릉은 점점 황폐해졌고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되었다.
어떤 전문가는 양광의 손자인 양유(楊侑)의 묘가 지금의 섬서성 부풍현에 있고, 묘장의 봉토는 복두형(覆頭形)이다. 이것은 황제와 왕후묘장의 봉토형제이다. 수양제릉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때 완원이 고증한 수양제릉인 뇌당 괴이촌대묘의 봉토는 만두형(饅頭形)이다. 그것은 분명 한(漢)나라의 묘이다.
모두 알다시피, 수양제의 시호는 당고조 이연이 붙여준 것이다. 시호를 붙여줌에 있어서, "양(煬)"의 뜻은 거례원중(去禮遠衆), 역천학민(逆天虐民), 박정과의(薄情寡義), 이덕황국(離德荒國)등이다. 확실히 나쁜 시호이다. 다만 이연은 제왕이 규격으로 622년 수양제의 능묘를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남경대학 역사과 교수인 장쉐펑의 분석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기에, 한족정권의 교체는 항상 선양(禪讓)의 형식을 취했다. 왕망, 조비도 모두 이렇게 했다. 송나라이후는 정벌로 직접 전복시켰다. 617년, 이연은 장안으로 쳐들어 온다. 양광의 손자인 양유를 황제로 올리고, 양광을 태상황으로 삼는다. 양광이 사망한지 2개월후, 이연은 양유를 핍박하여 자신에게 선양하게 하고 당왕조를 건립한다. 선양의 형식을 보면, 당왕조는 수왕조의 합법성과 양광의 황제신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의 예로 양광을 매장한 것이다.
그외에, 양광과 이연은 원래 사촌형제간이다. 두 사람의 모친은 친자매이다. 고대에 명문가문이 지배지위를 점하였다. 귀족의 시대라 할만하다. 문벌개념, 가족관념이 아주 강했다. 그러므로, 이연이 양광을 위하여 능묘를 만들어준 것은 정리에 맞는다.
양저우시 정협 문사위 주임인 왕후화(王虎華)는 고고팀에서 수양제의 진짜 묘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놀랐다. 놀란 나머지, 왕후화는 자신의 의혹을 말한다: 현장발굴상황으로 보면, 이 능묘는 대충 만들었고, 누추한데,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같다.
왕후화는 말한다. 당나라 무덕5년(622년) 당고조 이연이 수양제의 능을 뇌당으로 이장하라고 지시했다. "비록 정식 이장은 아니더라도, 이런 전실묘로 만든다는 것은 상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황후가 서거한 후, 당태종 이세민은 후한 예로 그의 유체를 양저우로 보내어 수양제와 합장하도록 해주었다. 당태종이 소황후와 양광을 합장하게 해준 것은 그의 관대한 흉금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이 합장묘를 이렇게 누추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외에 왕후화는 묘실내의 유골이 없는 것에 대하여도 묘주의 신분을 확인하는데 큰 수수께끼를 남겼다고 본다. 왕후화는 심지어 이렇게 대담하게 추측하기도 한다. 한장구 스투춘 자오좡의 이 묘는 양광의 충신 혹은 후인이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의 일부 생전유물 및 일부 배장품을 수집하고, 묘지를 새겨서 이곳에 공묘(空墓)를 만든 것이 아닌가. 즉 양광의 의관총(衣冠塚)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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