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부국용(傅國湧)
2009년 10월 26일, 일대사학자 당덕강 선생이 갔다.
1920년에 출생한 그는 난세에 태어난 것이다. 역사는 그가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 직업일 뿐아니라, 그의 인생경력과 생명체험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군벌혼전, 국민혁명, 항일전쟁, 국공내전등 일련의 대역사를 친히 겪었고, 이종인, 고유균, 장학량, 호적등 여러 역사의 창조자들과 근거리에서 접촉했다. 그의 붓으로 쓰여진 역사는 살아있고,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명을 친히 증명했다. 그의 혈육과 관련있는 시간이 일찌감치 그 안에 침전되어 있다. 그중에는 그의 호흡과 심박도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글솜씨는 이렇게 종횡자여(縱橫自如), 대개대합(大開大闔), 불구일격(不拘一格)한 것이다.
그는 역사의 연구자이며, 직접 겪은 사람이다. 비록 그가 1948년 그를 낳고 길러준 이 대륙을 떠났지만, 태평양의 저편에서, 자신과 혈맥이 이어진 모국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있으랴. 모국의 흥쇠화복은 시종 그의 마음에 걸렸고 일생동안 털어버리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1999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지나가는 나그네이다...정말 감개무량하고, 한 마디로 다 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역사를 배운 노병들은 그것을 보면 금방 고층건물이 올라가고, 금방 손님을 접대하고, 금방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人相食), 금방 때리고 깨고 빼앗고, 다시 보면 개혁개방을하여, 기사회생하고...." 사람들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삼협사관'은 그의 역사연구 심득이고, 세상을 살펴본 경험의 총체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그는 매번 해가 지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때마다 흥망성쇠의 역사를 살펴보고, 오구도 읽어보고, 난간을 걸으면서, 비로소 역사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1996년 9월 그는 타이페이의 <전기문학>에 <중국국가전형론제강>을 발표한다. 여기서 이백년에 "삼협"이 생긴다는 설을 내놓았다. 중국의 정치사회제도의 제1차대전형은 2천여년전이었고,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전환하는데 전후로 2,3백년이 결러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제2차대전환은 피동적이다. 죽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고,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이번 경도해랑(驚濤駭浪)의 대전환을 필자는 '역사삼협(歷史三峽)'이라고 이름붙여보았다. 우리는 이 무서운 삼협을 지나는데 대체로 이백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1840년부터, 우리는 2040년에야 삼협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고, 풍평낭정(風平浪靜)의청복을 누릴 수 있다면 아주 행운이겠다.......그러나 시간이 길건 짧건, '역사삼협'을 언젠가는 통과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수십년의 치학과 교학으로 얻은 조국역사, 그리고 국가민족의 앞날에 대하여 한 조천(粗淺)한 인식이며 대담한 가설이다."라고 하였다. 3년후 그는 또 다른 글에서 이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다:
"과거 오천년의 중화통사는 실로 '제왕전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후 오천년(최소한 1쳔년)의 중화통사는 '민주정치사'일 것이다. 이 변화는 실로 여하한 인력, 물력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소위 역사의 '필연'이다."
다만, '제왕전제'에 관련되는 것은 '제왕' 1인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사회문화의 상호배합의 특수한 제도로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이고, 통치기제의 효과적인 조정이다. '민주정치'도 그러하다. 그것은 일종의 제도이다; 듀이, 호적의 제자이다. 입만 열면, '민주는 일종의 생활방식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왕전제에서 민주정치로 변화하는 것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양자는 정치경제의 전환에서 시작하여 일전백전(一轉百轉)해서 모조리 전환하는데, 실로 수백년이 걸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백년출삼협설"은 <만청칠십년>이라는 책의 첫편으로 소개되어 널리 유포되고 상당한 관심을 끌게 된다.2000년 6월, 당덕강과 동시대의 두 지식인, 1920년 출생의 허양영(許良英) 선생과 1923년 출생의 이신지(李愼之) 선생간이 이에 대하여 한번 토론이 벌어진 바 있다. 이선생은 이백년출 '삼협설"에 따르면 아직 40년이 남았으니 그다지 길지도 않다고 했다.자연과학사를 연구하는 허선생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의 변화는 항상 파악하기 힘들다...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소는 아주 복잡하다." 그는 역사를 예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연히, 사학자로서, 당덕강 선생은 역사는 '필연'이 있을 뿐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우연' 혹은 '변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장학량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안사변은 중국역사를 다시 쓰고, 세계역사를 다시 썼다. 그것은 바로 역사에서의 '우연'이다. 역사는 '필연'과 '우연'이 상호 격탕(激蕩)해서 이루어진다.
기실, '삼협사관'의 가치는 시간상의 예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몇년만에 '삼협'을 빠져나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숨어있는 역사의 맥락을 분명하게 통찰하는 것이다. 더더구나 본민족의 운명과 전망을 깊은 정을 가지고 관심가지는 것이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일생을 모국과 고락을 함께한 일대사가가 역사를 연구하고 세상을 살펴서 이 '대담한 가설'을 내놓았다. 이제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증거수집'을 해야할 단계이다. 나는 믿는다. "삼협사관"에 대한 토론은 그의 사망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만, 그의 역사변화경로 혹은 방향에 대한 파악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덕강 선생은 떠났다. 그러나 역사는 여전히 '삼협' 속에 있다.
수많은 중국독자들은 '당덕강'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주로 그의 <만청칠십녀>때문일 것이다. 기실 사학자로서, 그의 진정한 업적은 구술사에 있다. 그것은 그가 제대로 갖추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전공이다. <호적구술자전>, <이종인회고록>은 모두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저작이 되었고, 장지명산(藏之名山), 전지불후(傳之不朽)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때는 이런 생각까지 해본다. <만청칠십년>, <원씨당국>과 같은 통속적인 역사작품은 그저 그의 '비전공' 작품이라고. 별 생각없이 꽂은 버드나무가지라고. 그가 신경써서 경영한 것은 아니라고.
구술역사는 원래 역사를 기록하는 오래된 형식이다. 사마천의 문채풍류가 나타난 <사기>에는 대량의 구술자료가 들어있다. 당덕강은 구술역사에 새로운 요소를 주입했고, 살아있는 사례를 수립하며, 구체적인 표준을 설정했다. 이것은 그가 현대사학에 끼친 일대공헌이다. 구술역사는 우리가 평상시에 말하는 '구술자전', '구술회고'와는 다르다. 만일 주인공 개인의 믿을 수 없는 기억에만 의존하고, 상세하고 믿을만한 자료를 가지고 서로 확인하고 보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구술역사라 할 수가 없다. 당덕강은 말했다. 호적의 구술은 개략 50%를 점하고, 나머지 절반은 그가 자료를 찾아 고증하여 보충한 것이라고. <이종인회고록>에서 본인구술은 가련하게도 15%정도이고, 나머지 85%는 그가 신문, 도서관등 각처에서 수집하여 보충, 고증한 것이라고. 이런 기준으로 형량하자면, 최근에 출판된 <장학량구술자전>은 불합격품이다. 최소한 원재료이라 할 수 있다. 최후의 완성품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젊은 당덕강은 인연으로 구술사의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첫째는 녹음기의 발명, 둘째는 1949년 중국정국의 급변으로 많은 민국사상의 중요인물이 미국으로 갔다. 이종인, 호적, 진입부, 공상희, 고유균....이들 유명한 이름은 콜롬비아대학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마침 이 계획을 집행하도록 선정되었다. 민국구술사라ㅡㄴ 이 신비의 문은 이렇게 가볍게 열린 것이다.
고유균은 경력이 아주 풍부한 외교가이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중국근현대사의 외교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씨 본인은 대량의 자료를 보존하고 있었다. <고유균회고록>의 가치, 가독성응 모두 기대할 만하다. 당덕강이 최초로 이 구술사계획에 참여하게 되고, 고씨의 외교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단이 된다. 그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구술역사실을 떠난 이후, 녹음원고는 문학적인 천부가 뒤떨어지는 미국아가씨가 정리했다. 그가 "이전에 쓴 아주 생동감있고, 아주 재미있는 일부 내용이 많이 삭제되었다" 거기다 너무 커서, 현재 읽는 <고유균회고록>은 <이종인회고록>처럼 읽는데 재미있지가 못하다. 기실, 마지막에 정리한 그 미국아가씨가 일류라고 하더라도, 당덕강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역사상황이 체험과 느낌을 가지고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덕강은 친히 민국이래의 동란역사를 경험했고, 청년시대에부터 해외에 체류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강했다. 역사는 향수의 충동이다. 언어도 향수의 충동이다. 설사 그가 영어로 역사를 기록하더라도, 그는 조국이 흥망을 느낄 수 있고, 역사인물의 애환과 영욕을 느낄 수 있다. 모국어의 유일무이한 점도 느낄 수 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인생체험, 생명감탄, 고향정서를 그 안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생경험과 개인천부는 그의 구술사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만들었다. 독특한 매력과 대체불가능한 사학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당덕강선생은 사학을 했고, 문학을 했다. 그는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공력이 있다. 시문에 능했고, 젊었을 떄는 문학잡지를 발간하기도 했고, 잡문집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홍루몽>을 깊이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60만자의 장편소설 <전쟁과 애정>을 쓰기도 했다. 그는 명확히 말했다. 이 소설도 "구술사"라고. 허구인 것은 인명, 지명일 뿐이라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하여 동시대의 고난을 겪은 소인물들의 악몽을 증언했다. 그는 소설과 역사사이의 한계를 참구했고, 그가 영문으로 쓴 천페이지에 이르는 <민국사>가 지금까지도 발간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쓴 것은 모두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의 "장(將)"이기 때문이다. 수천수만의 피를 흘리면서 힘들게 싸우고, 쓰러져 신음하는 사병소졸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대인물은 '역사'로 쓰지만, 소인물의 소사건 심지어 혹은 대인물의 소사건은 '소설기법'으로 써야 한다. 그가 보기에, 소설에서 쓰는 것은 "진실한 사회, 허구의 인물"이다. 역사가 쓰는 것은 "진실한 사회, 진실한 인물"이다. 양자는 그저 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의 구술사와 기타 역사작품이 모두 읽기에 재미있는 것은 그가 '소설기법'으로 "진실한 사회, 진실한 인물"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당연히 한가지를 간과할 수 없다. 그의 글은 자체적으로 대체불가능한 독특한 개성이 있다. 장엄하며 유머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속되다. 문언과 백화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간다. 그는 많은 유행하는 명구, 속어를 가져와서 적절히 잘 활용했다. 그의 역사작품은 그리하여 교과서식의 틀에 박힌 것이 아니고, 더더구나 유행하는 학원파 문자와도 다르다. 도덕군자인 것처럼 하지만 아무런 재미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역사와 현실을 연결하여 시시때대로 역사에서 찾아내어 담소하고 웃긴다. 이것은 중국전통의 설서(說書) 풍격의 현대버전이다. 사람들이 읽다보면 시원스럽고, 배를 잡는다. 역사와 일반백성의 거리를 크게 좁혀 주었다.
당덕강 선생은 갔지만, 역사는여전히 '삼협'에 있다. 이제 그의 생명은 역사로 들어간다.
여러해전에, 당덕강은 "혼자서 한 나라를 상대한다"라는 평가로 대만 <전기문학>의 창시자 유소당(劉紹唐)을 평가한 바 있다. 기나긴 시간의 척도로 형량하면, 거의 모든 진정 뛰어난 사학자는 모두 "혼자서 한 나라를 상대한다"는 역량이 있다. 중국의 사마천, 진수, 사마광과 같은 사람, 그리스, 로마의 헤로도투스, 투키디데스등, 그리고 영국의 토인비, 독일의 스팽글러, 또한 <제3제국의 흥망>을 쓴 윌리엄 L 샤일러....그들은 자신의 저작으로 이 점을 해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있고, 사라지지 않는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에 죽은 당덕강은 그의 구술사방면에서의 탁월한 업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역사작품으로 더더구나 그의 생명정회를 융합한 "삼협사관"으로 이 "혼자서 한 나라를 상대한다"는 정신계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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