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daming
송고종은 남송초기 투항파의 우두머리이다. 남송정권 초기에 그는 항전파인 이강(李綱)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강을 쫓아내고, 총신 왕백언(汪伯言), 황잠선(黃潛善)등과 함께 중원을 포기하고, 남경 응천부에서 양주로 도망간다. 1129년(건염3년) 구월, 금나라병사들이 장강을 넘어 남침하자, 송고종은 신료를 이끌고 남으로 도망간다. 십월에 월주(지금의 절강 소흥)로 가고, 그후 명주(지금의 절강 영파)로 간다, 그리고 명주에서 정해(지금의 절강 진해)로 가고, 해상으로 갔다가 다시 온주(지금의 절강성에 속함)로 도망간다. 건염4텬 여름 금나라병사가 강남에서 철수하자, 그는 비로소 소흥부, 임안부등지로 돌아온다. 나중에 임안(절강성 항주)을 남송의 도성으로 삼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의 천도는 3번의 반복된 논쟁끝에 확정되었다고 한다. 송,금 쌍방의 군사형세를 분석한 이후의 결론이다. "금일의 일은 싸우고자 하기에는 부족하고, 화의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한편으로, 금나라병사들이 곳곳에서 적극적으로 진공하므로, 송나라군은 시시때때로 방어해야 했다. 이것이 당시 전국의 장기적인 형세였다. 그리고 건강(남경)은 전선에 가까워 항주처럼 후방에 있는 것만 못했다. 항주가 비교적 안전했다. 절강서부는 수로망이 교차하여, 기병의 활동에 불리했다. 항주는 이런 천연적인 장벽을 갖추고 있어서 통치자에게 안전감을 더욱 증가시켜주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당송이래, 항주는 신속히 발전하여, 일약 만물이 부유한 '동남제일주'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상당한 규모를 갖춘 도시체계와 비교적 웅후한 물질적 기초는 바로 국가수도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사서에 말하기를, 전당의 경치는 '삼서(三西) 즉 서호(西湖), 서계(西溪), 서냉(西冷)이다. 서계의 경치에서 뛰어난 점은 오로지 물에 있다. 당나라이래, 서계는 매(梅), 죽(竹), 노(蘆), 화(華)를 감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서계탐매(西溪探梅)"는 항주18경중 하나이다.
"수무약수삼천리(雖無若水三千里), 불시선인부도래(不是仙人不到來)" 청나라 광서때의 <전당현지>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건염3년(1129), 송고종은 서계를 지나면서 이 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싶어 했다. 후에 봉황산을 얻는다. 그래서 말한다. "서계는 남겨두어라(西溪且留下)" '유하'라는 지명은 여기서 나온다. 송고종 조구가 즉위하고 항주를 도읍으로 정한 후, 자신과 관리들이 여항(餘杭)의 동소궁(洞宵宮)에 기도하는데 편의를 위하여, 고탕에서 유하까지 수리 길이의 석판연도(石板輦道)를 깐다. 이를 서계연도(西溪輦道)라고 부른다. 천백년이래, 서계인들은 대대손손 이 곳에서 번성했고, 밭을 경작하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풍족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낸다.
송고종 조구는 항주를 임안부로 승격시키고, 봉황산에 황성(皇城)을 건설하기로 한다. 황궁을 짓기 위한 토목공사를 시작한다; 소흥8년(1138), 남송은 정식으로 임안을 수도로 정한다. 황궁은 구체적으로 현재의 봉황산 동록 송성로(宋城路) 일대에 위치했다. 동으로는 만두산 동록, 서로는 봉황산, 북으로는 만송령로, 남으로는 소추만까지; 황궁은 산세를 따라 건설되었다. 전각이 층층이 들어섰는데, 전, 당, 누각이 약 130여개나 되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남송궁전은 점유면적이 적었고, 건설때 절약을 기준으로 하여 많은 궁전들은 모두 하나의 궁전을 여러가지 용도로 썼다. 고공이 일반적으로 전용인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항주는 강남에 위치하여, 여름에 더웠다. 궁전의 건축형식에서 여러가지 특수한 점이 있었다. 모든 창문은 뜯어낼 수 있어서 통풍에 편리했다. 겨울에 추운 때가 되면 다시 격층을 붙여서 난방작용을 했다.
남송의 황성은 범위가 크지 않아서, 거기에 만들 수 있는 건축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임안행궁은 처음 건축할 때부터, 임시수도로 정의되었다. 궁전사용에서, 이미 간이하고 편리한 것을 기준으로 했다. 실제로 남송은 동도(東都, 개봉)로 돌아가려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원래의 행궁계획에 있는 여러가지 임시아이디어는 황성내의 건축 건축과 용도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조정의식장소이자 가장 중요한 대전은 소흥12년이전에 단지 1개의 전만이 있었다. <송사.지리지>에 기록된, "수공(垂拱), 대경(大慶), 문덕(文德), 자신(紫宸), 상희(祥曦), 집영(集英)이라는 6전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름을 바꾸었고, 실제로는 1개의 전이다." 바로 이것이 이 당시의 상황이다.
전체 남송황성은 평야에 건축된 서안의 당나라황성, 개봉의 북송황성, 북경의 명청황성과는 달리, 단정하고 편평한 네모형태가 아니었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불규칙방형이었다. 궁성담장은 약 3장이고, 서쪽은 산을 따라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남, 동, 북쪽보다 높았다. 그때의 봉황산 동록은 아주 호화스럽고, 장려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당시, 임안의 인구규모는 이미 150만명에 달했다. 서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베니스는 겨우 10만인구였다. 오늘의 세계 각 대도시는 당시에 아직 몽매의 유암에 덮여 있었다. 항주의 남송황성만이 등불이 휘황하였고, 세계의 동방을 비추었다.
당시의 황실 '대내(大內)"는 수나라의 부치(府治)이고, 당나라 치소(治所)의 소재지이다. 당년의 오월왕 전류도 일찌기 이곳에 왕궁을 건설했다. 남송의 황제가 이곳을 좋게 본 것은 마치 역사의 인연인 듯하다.
다만 남송황성은 배치에 있어서 "남궁북시(南宮北市)"의의 선하(先河)를 개척한다.
송나라이전에, 중국고대의 국도배치는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황궁이 북에 있고, 백성이 남에 거주한다. 예를 들어 당대의 장안이다; 둘째는 황궁이 도시의 가운데 있고, 주위에 민가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송의 변량이다.
남송의 항주는 황궁이 남쪽에 있고, 민가와 시장이 북쪽에 있다. "이런 국면은 항주 당시의 실제에 맞았다. 당시 서호와 전당강의 사이에 있어서 도시발전에 쓸 수 있는 땅은 오산이북이었다. 황궁을 남쪽에 놓아야 도시의 북부가 발전하는데 충분한 공간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남송황궁은 원나라때 큰 불로 사라진다. 지금 지표건축은 이미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로 궁전유적지는 지하 2,3미터 가량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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