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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주(周)나라의 전차(戰車)

by 중은우시 2013. 7. 12.

글: 별묵(別墨)

 

주(周)나라 사람들의 입국(立國)은 고옥건령(高屋建瓴) 즉 높은 집에 물동이를 두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서 공격해가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동쪽으로 향하면서 천하를 제압했다.

 

국력이 향하는 곳은 첫째, 동관(潼關)을 나가서 하(河), 락(洛)을 향하고 동도(東都, 낙양)을 장악하여, 황하하류를 경영하는 것이다.

 

둘째, 무관(武關)을 나가 강(江), 한(漢) 그리고 회(淮)하유역까지 향하며, 예(豫), 악*鄂), 환(皖) 일대를 경영했다.

 

제1선은 무왕벌주(武王伐紂), 주공동정(周公東征)의 노선이다. 제2선은 문왕전상(文王翦商), 행남국(行南國)의 노선이다. 이렇게 두 선을 보면 주나라사람들의 입국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동서로 향하는 것은 산(山), 해(海)의 사이이고, 남북으로 향하는 것은 장강, 황하의 사이이다.

 

이 범위는 바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중원(中原)"이며, 일대왕조의 기본지반이다.

 

주나라사람들이 중원을 경영하는데 세 가지 법보(法寶)가 있었다: 하나는 계속혁명의 민본주의로, 상나라의 "백성을 이끌고 신을 모신다(率民以事神)"의 신권주의를 청산했다. 둘째는 봉방건국(封邦建國)의 봉건주의로 상나라의 방국연맹(方國聯盟)을 대체하여 국토를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셋째는 군권으로 신권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직업화된 상비군인 "사병(士兵)"을 두었다. 이는 병민합일의 "민병(民兵)"을 대체하여 입국의 근본이 된다.

 

목야지전(牧野之戰)은 <중국역대전쟁사>에서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전쟁사례로 꼽히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상(商)에는 70만의 병력이 있었고, 주(周)에는 병력이 겨우 수만이었는데, 이렇게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을 비교하여, '대국상(大國商)"과 "소방주(小邦周)"라는 말이 인증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아마도 정반대일 것이다. 당시에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삼분천하, 주유기이(三分天下, 周有其二)"(천하를 셋으로 나누면, 주나라가 둘을 가졌다)는 말도 잇다. 태백이 남국으로 향한 이래, '소방주'는 일찌감치 변신했다. 무왕벌주때에 이르러서는 팔백제후가 맹진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소승다"는 겉으로 보이는 거짓모습이다. 상나라군대는 70만이라고 하지만, 상고시대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이다. 만일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70만명이 전사가 아니고, 아마도 민중과 노예일 것이란 것이다. 70만명이 출동하면 이는 '온나라를 모조리 동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대한 모습에도 병력이 많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들이 병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그때의 형세를 보면, 상나라군대는 멀리 동남에 있었다. 주나라사람은 서북에서 빈틈을 노리고 쳐들어갔다. 그래서 일전만에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나라의 전투패배는 전략적인 잘못때문이기도 하고, 병제의 결함때문이기도 하다. 상나라에는 상비군이 없었다. 그래서 전시에 모집을 한다. 신앙에 호소하고, 신권으로 총동원령을 내린다. "솔민이사신" 그래서 성전(聖戰)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인민전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주왕(紂王)이 70만명이나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병력동원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 그의 전사는 이미 동남으로 갔다. 나머지는 민중과 노예이다. 주왕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민중을 동원했을까? 그 때, 주왕은 바로 종교개혁으로 상제를 인격화하였다. 먼저 그것을 조상의 영혼과 결합시켜, "제조합일(帝祖合一)을 실현한다. 다시 왕권과 결합하여, "제왕합일(帝王合一)을 실현하여 세속화된 상제로 만든다.

 

그는 자신이 하늘이 대표라고 자신했다. 상제의 인격화의 구체적인 존재로 확신했다. 그의 사명은 바로 신권화된 상왕국이 제국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상제의 제국. 그리하여 '제왕합일'의 이념을 지녔다.

 

70만명을 한꺼번에 전쟁터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전민개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주왕의 '제왕합일'의 위력과 호소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주왕의 강대함은 여기에 있었다. 그의 실패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지나치게 신앙에 의존함으로써, 제도건설을 등한시한다. 지나치게 신권에 의존함으로써 상비군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상의 통치력은 신권에 있었지 군권에 있지 않고, 신앙에 있었지 사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나라사람들은 정반대였다.

 

천명이 어디에 있는가? 은(殷, 상)나라사람들은 말한다. 청동(靑銅)과 귀갑(龜甲)"에 있다고 중기(重器)와 영물(靈物)만이 천명을 감당할 수 있다.

 

주나라사람들은 시초(蓍草)로 천명을 파악했다.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시초를 뜯어내어 음양이효로 나누고, 천명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산괘(算卦)로 점복(占卜)을 대체하고 음양이효를 가지고 중국철학의 근원을 열었다. 그 명운의식은 이미 은나라사람들보다 위였다. 은나라사람들이 신비한 직관에 호소할 때, 주나라사람은 이미 추상의 연산을 시작하고 천지를 시작으로 "기제(旣濟)"와 "미제(未濟)"의 상수로 사람의 일의 여러가지 방면의 변화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입천지도, 입지지도, 입인지도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은나라사람들의 점복은 갈라진 무늬를 살펴서 우연성을 탐지하고, 이를 방비하여 습격을 막아내는데 반하여, 주나라사람들의 산괘는 필연성을 파악한다. 점복의 예측은 신의 말씀과 같다. 그러나 괘를 놓은 것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64괘 384효를 놓는 것이다....

 

천명이 게속 변화하는 압력하에서, 주나라는 그들의 이상국 "중국"을 경영하고, 정권을 민본에 놓았다. "보민(保民)"으로 "사신(事神)"을 대체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상비군을 건립하고, 문왕"전상"이 주(周) 

"가천하(家天下)" 속에서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악정벌자천자출(禮樂征伐自天子出)"(예악과 정벌은 천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규정하고, 봉방건국의 분봉제를 통하여 원래의 방국체계를 변경한다.

 

주나라초기에 분봉을 하여 천하를 평정시킨다. 순자는 말했다. 주나라초기에 71국을 분봉하는데 그중 희(姬)성이 53국이었다고. (희성은 바로 주나라의 국성이다)

 

비록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가천하는 아니다. 그래서 주나라사람들은 계속혁명을 해야 했다. 관념상의 민본주의, 제도상의 예치주의와 중국화된 봉건주의로 그들의 이상국 주나라사람들의 가천하를 건설했다.

 

적서를 나누어 집안을 다스리고, 봉건제로 천하를 평정한다. 소종은 대종을 따르고, 가신은 국군을 보위하며, 제후는 왕실을 지켜낸다. 혈연으로 지연을 나누고, 지연이 혈연을 확장시키며, 혈연과 지연이 상호작용을 톻아여 가국과 천하를 만든다. 이성국(異姓國)에 대하여 종법으로 통일할 수 없으면 혼인으로 유대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천하의 나라는 형제가 아니면 조카외숙이 된다.

 

그 결과 자연히 가천하가 형성된다. 가천하는 또 다른 일면이 있다. 천하를 하나의 집안으로 하였고, 이것이 주나라사람들의 이상이었다. 그들의 전략이기도 했다. 상나라의 천하는 가천하가 아니다. 방국임입(方國林立)의 세계였다. 주나라사람들은 '봉건'으로 방국세계를 가천하로 편입시켰다. 역사상, 그 누구도 주나라사람들처럼 원대한 이상을 실제적인 전략으로 바꾸어, 큰 성과를 거둔 적이 없었다. 주나라사람들은 실질을 중시했고, 그들의 이상은 반드시 전략과 배합이 되어야 했다. 전략은 상비군으로 관철한다.

 

주나라에는 상비군을 두는데, 이것은 전차에서 연유한다. 전차병(戰車兵)은 하나의 병종으로서, 전문가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비단 기술과 전술이 강해야 할 뿐아니라, 조직화정도가 높아야 한다. 양자가 결합해야만 지구전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비군이 아니면 안된다. 이와 상응하는 사회기초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 주나라는 이미 사민분업이 되어 있었다: 사, 농, 공, 상. "사의 아들은 항상 사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분업으로 인한 사인계층의 출현은 주나라의 상비군에 계속적인 전력과 재력을 가져다 주었다.

 

석기시대에 목석(木石)이 무기일 때는 전민이 동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동시대에 이르러 청동이 병기가 되면서, 동기는 만들기가 쉽지 않고, 갑사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청동과 돌을 병용하게 된다. 병민이 나뉘며 전차가 등장하면서 '사병'이 '민병'을 대체한다. 그리고 상비군이 된다. 원래 청동병기는 아주 비사다. 더욱 비산 전차의 일개 전사는 귀족이 아니면 안된다. 흑철시대의 도래를 맞이하여, 철기는 다시 민에게 보급되면서, 비로소 경전합일(耕戰合一)이 이루어지고 전민개병시대가 온다. 다만 이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목야지전은 "사병"과 "민병"의 전투이다. 주나라는 전차 300승, 사병 수만을 보유했고, 주왕(紂王)은 70여만이라고는 했지만,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얼마 없었다. 전차도 없고, 갑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민병'이다. 목석을 무기로 하는 병사이다. 상나라초기에 동병(銅兵)으로 천하를 얻었다. 목석을 무기로 하는 병사들을 눌렀다. 누가 생각했으랴 그들의 말기에 오히려 주나라사람들에게 당할 줄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이긴 것은 전차에 의존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상나라에도 전차가 있었다고 말한다. 탕이 걸을 정벌할 때 명조(鳴條)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전차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소위 '전차'는 물건을 싣는 도구에 불과했다. 작전병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은허의 차마갱에서 이미 전차가 출토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병기사가인 양홍의 말에 따르면, 비록 전차가 출토되기는 하였으나, 작용이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군관이 전투에 나갈 때 썼고, 아직 승부를 결정짓는 작전병종으로 되지는 못했다고 본다.

 

전차병이 하나의 병종으로 출현한 것은 사회화된 사 계층과 제도화된 상비군의 결합을 제외하고, 그 자신의 개선도 있다. 그래서 비로소 효과적인 작전병기로 변신한 것이다. 상나라사람들은 갖추지 못했는데, 주나라사람들은 이미 갖추었다. 양홍이 말한다. 주나라사람의 전차는 끄는 말을 늘이고, 바퀴통(車轂)에 구리장식을 붙이고, 차폭을 늘이고, 차축을 줄이며, 마구를 개선하여 저차전의 격투병기 및 말을 보호하는 피질마갑과 마주를 두어 전차의 충격력과 작전성을 제고시킨다. 이렇게 하여 혁명적인 신병종이 탄생한다.

 

무왕은 전차를 가지고 주왕을 이겼다. 주공은 전차를 통하여 그의 이상국을 건설했고, 계속혁명을 진행한다.

 

다행히 전차가 있어서, 주나라사람들은 천하를 종횡했다. 전차의 척도를 이용하여 가천하를 만들고, 중국을 변화시켰다. 황하와 장강유역을 모두 평정한다. 원래 상제국의 세력범위는 모조리 주나라사람들의 영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