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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상(商)왕조는 초기에 왜 천도를 자주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8.

작자: 미상 

 

상왕조는 탕(湯)부터 시작하여 주(紂)에서 멸망할 때까지, 모두 17대 31왕을 내려가며, 근 6백년간 지속되었다. 약기원전16세기부터 기원전11세기까지이다. 상왕조의 역사상 아주 현저현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도성을 여러번 옮겼다는 것이다. 탕이 처음에 도업으로 정한 곳은 박(亳)(하남성 상구시)였다. 그후 다섯번 천도했는데, 중정(中丁)은 오(隞)(지금의 하남 형양북 오산남)으로; 하단갑(河亶甲)은 상(相)(지금의 하남 안양시 서쪽)으로; 조을(祖乙)은 형(邢)(지금의 하남성 온현 동쪽)으로; 남경(南庚)은 엄(奄)(지금의 산동성 곡부 구성 동쪽)으로; 반경(盤庚)은 은(殷)(지금의 하남 안양 서북)으로 천도했다. 반경이 은으로 천도하 것은 상왕조 역사상 시대를 긋는 의미가 있다. 이전에, 탕부터 양갑(陽甲)까지 10대 19왕으로 이어졌고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 이것이 상왕조의 전기이다. 그후 반경부터 주까지 8대 12왕은 273년간 지속되었고, 상나라의 후기이다. 이를 보면 도성을 여러번 천도한 것은 확실하게 말해서 상왕조 전기이다.

 

상왕조 전기에 왜 여러번에 걸쳐 천도했을까?

 

이 문제에 관하여, 고금학자의 설은 여러가지이다. 주로 아래의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수재"설, 둘째는 "유목", "유농(遊農)"설, 셋째, "거사행검(去奢行儉)"설, 넷째, "왕위분쟁"설.

 

"수재"설은 자연재해에서 상나라의 도성이 여러번 이전된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증거자료를 내서 수재가 상나라사람들의 천도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탕부터 중정까지, 6대 11왕동안 최소한 박에 150년간 도읍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긴 기간동안 수재가 없었단 말인가? 그리고 무정부터 주까지 복사에 따르면 여러번 원수의 범람으로 도성 은이 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은의 사람들이 천도하지는 않았다. 왜 반경이후의 수재는 더 이상 천도를 불러오지 않았을까? 반경이전의 수재는 왜 사람들로 하여금 천도를 하게 만들었을까? 그외에, 남조의 몇몇 도성은 모두 화하양안에 있다. 특히 중정은 박에서 오로 천도한 것과 반경이 엄에서 은으로 천도한 것은 황하에 더욱 가까운 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수재'로 설명하는 것은 성립되기 어렵다.

 

"유목", "유농"설은 사회생산분야에서 상나라도읍을 천도한 원인을 찾는 것이다. '유목'설은 상나라사람들은 반경이 은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주거가 부정하고 계속 이주하는 유목민족이었다고 말한다. 반경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농업을 초보적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목경제에서 농업경제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착하려는 경향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나라때의 복사(卜辭)와 고고자료를 보면, 상나라전기부터 농업은 이미 주요한 생산부문이 되었다. 그래서, 이 설은 역사의 실질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유농"설은 상나라때의 농업은 원시적이었다는 것이다. 원시적인 점은 생산도구가 단순하고 경작방법이 원시적이라는 것이다. 상나라사람들은 "화전'방식을 채택했다. 숲을 불태워서 거기에 곡식을 심었다. 그들은 관개도 모르고, 시비도 몰랐다. 일단 토지의 자연력이 소진되면, 경지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자주 옮겨다녀야 했다. "유농"경제는 상나라사람들이 도성을 자주 이전한 원인의 소재이다. 그러나 고고자료에 따르면, 정주와 소둔 두 땅은 당나라문화에서 출토된 석겸과 석부가 모두 아주 비슷하다. 이 두 곳은 상나라전기를 대표하는 곳이고, 하나는 상나라말기를 대표하는 곳이다. 상나라 농업생산은 이미 소량의 청동기를 사용했다. 현재 출토된 몇 건의 청동농구도 상나라 전후기의 수량도 대체로 비슷했다. 이것은 상나라 전후기의 농업생산도구에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간단했다. 경작방법은 호후선 선생이 <은대분전설>에서 '분전(焚田)'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은(殷) 사람들이 수렵하는 방법의 일종이었다. 농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상인들이 '비료를 줄줄 몰랐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생지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탕에 가뭄이 있었다. 이윤이 구전(區田)을 만들어 백성에게 분종(糞種)을 가리켰고, 물을 지고 밭에 뿌리게 했다." 갑골문의 "뇨(尿)"자는 즉 분변을 가리킨다. 복사에는 대량의 '뇨전(尿田)'이라는 말이 나온다. 상나라초기에 이미 '분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농'설의 논거는 박약하다. 그외에 그것은 '수재'설과 마찬가지로, 중정이전과 반경이후에 상나라도읍이 안정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유농'설도 믿기 어렵다.

 

"거사행검"설과 "왕위분쟁"설은 사회정치방면에서 상나라의 천도원인을 밝히려는 것이다. "거사행검"설은 '사치를 억제하고, 검약을 창도하여 계급간 갈등을 완화시키려는 것이 상나라도읍을 여러번 옮긴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설에는 약간의 합리적인 부분도 있다. 왜냐하면 <상서>의 <반경>3편은 지금까지 보존된 상왕 반경이 은으로 천도할 때 신민들에게 한 세번의 연설문이다. 천도할 때, 그는 귀족들중 재물을 탐하는 관리가 있다고 질책하였다; 천도한 이후 그는 다시 관리들에게 말한다.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자신만을 위하여 계속 재산을 늘여가지 말라.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고, 너희들의 그 국왕과 같은 마음을 영원히 깨끗하게 하라. 그러나, 사치는 계급착취의 고질과 통병이다. 은으로 천도할 때에도 존재했고, 은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왜 이때의 사치는 천도를 불러왔고, 다른 때는 아닌가. '거사행검'설은 비록 상나라수도가 여러번 천도된 어떤 현상을 보았지만, 현상을 제대로 꿰뚫어 본질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것은 상나라가 자주 천도한 원인을 설명하는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왕위분쟁"설은 <사기.은본기>에 따르면, "중정이래, 여러 동생, 아들을 폐하고 다시 세웠다. 동생과 아들이 서로 대체하여 세워지려고 하니, 구세난(九世亂). 그래서 제후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중정에서 양갑까지 딱 9명의 왕이다. '몇세'는 '몇왕'이다. 이 '구세지난'은 상나라수도의 여러번에 걸친 천도와 시간적으로 부합한다. 이는 절대 우연한 일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나라수도가 여러번 이전하게 된 객관적인 원인이다. 이런 추단은 <상서.반경>중편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반경은 선왕이 천도한 원인을 기술하면서, "은에 대학(大虐, 천재지변으로 봄)이 내려, 선왕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기업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위하여 천도했다." 그렇다면 왕위분쟁이 일으킨 사회동란을 왜 천도로 해결하려 했을까?

 

왜냐하면 '구세지란'의 직접적인 결과는 상왕의 권위가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팽창해진 것이다. 귀족세력의 팽창은 경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재물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군왕을 죽이고 찬탈하는 것이다. 투쟁쌍방은 승리를 얻기 위하여 반드시 천시, 지리와 인화를 얻어야 했다. 천시는 사람의 의지에 관계없이 이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차 공유하는 것이다. 인화는 주관노력으로 재취하는 것이다. 유독 지리만이 누구든지 먼저 점유하면 그의 것이 된다. 아주 분명하게, 귀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하면서 왕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귀족이 지리를 점하는 것이 된다. 은상시기에 비록 이미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사회생산력의 발전수준은 여전히 아주 낮았다. 이런 사회발전수준에서, 지리의 역할을 특히 중요하다. 천도를 통하여 귀족의 지리적 우세를 변화시키고, 이를 통하여 귀족의 실력을 감소시키려는 것은 상왕의 전략적인 조치이다. 이것은 상나라수도의 여러번에 걸친 천도의 주관적 원인일 것이다. <상서.반경>편이 이를 입증한다. 반경이 은으로 천도할 때 거의 거국적인 반대에 부닥친다. 그러나 주요 반대는 귀족으로부터의 것이지 평민으로부터의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노에로부터의 것은 아니다. 귀족은 온갖 말로 민심을 선동하고, 반경은 '천명'과 '선왕'의 두 기치를 내건다. 그렇게 하여 반경은 은으로의 천도에 성공한다. 천도할 때, 반경은 경고한다: 간사하고 사악하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모조리 없애버리겠다. 이런 나쁜 자들이 새로운 수도에서 만연하고 생장하게 하지는 않겠다. 이를 보면, 반경은 천도를 통하여 귀족에게 타격을 가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도이후에 반경은 다시 말한다: 상왕과의 혈연이 가깝고 멀고를 불문하고 죄를 지으면 죽임을 당한다. 공을 세우면 상을 받는다 이를 보면, 천도를 통하여 반대파를 진압하고 상왕의 권위가 상승되었다.

 

"구세지란"의 교훈은 심각하다. 역사가 재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위계승제도에 변화가 발생한다. 상왕의 승계법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대정에서 조정까지 형(兄)을 직계로 하는 것이다. 제2기는 소을에서 강정까지 동생(弟)을 직계로 했다; 제3기는 무을부터 주까지 장자(長子)에게 전해진다. 반경은 제1기에서 제2기로 넘어가는 전환단계이다. 은으로 천도한 후 상왕의 왕위계승법은 동생을 직계로 하는데서 결국은 아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적장자계승제의 확립은 왕위분재을 최소화했다. 왕실내부는 안정되고, 은으로 천도한 후 273년간 더 이상 천도하지 않는다. '왕위분쟁'설은 상나라전기의 천도를 설명하는데 비교적 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