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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춘추", "전국"은 어떻게 나누는가?

by 중은우시 2013. 6. 11.

글: 금암조휘(金巖朝輝) 

 

춘추전국(春秋戰國)은 하나의 역사시기로서, 존재하던 기간에 대하여 원래는 이의가 없었다. 즉, 주평왕(周平王) 희의구(姬宜臼)가 기원전770년에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때로부터, 주난왕(周赧王) 희연(姬延)이 기원전256년 진군에 투항할 때까지이다. 전후 합계 514년이다. 이 시기의 정확한 명칭은 "동주(東周)"시기이다.

 

지긍은 일부 사람들로부터 만일 주왕실의 향화제사가 단절되었는지 여부를 참고치로 한다면, "동주"의 존속시간은 진장양왕 영이인(즉, 진시황의 부친)이 기원전249년 '동주'를 멸망시킨 때까지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주'시기는 521년이다.

 

왜 이런 이견이 나타난 것인가? 그것은 동주말기, 주왕실이 실제통치하는 지역은 단지 낙읍주변 수백리의 땅 뿐이다. 즉, 이 유한한 토지를 다시 주왕실의 성원들이 나누어가졌다. 역사에서는 그들을 "서주공(西周公)"과 "동주공(東周公)"이라고 부른다. 이 두 명의 분열주의자들은 세습제를 한다. 마지막 일대 "서주공"(西周文公)은 희구(姬咎)라는 인물이다. 마지막 일대 "동주공"(周昭文君)은 희걸(姬傑)이라는 인물이다. 진소왕(진소양왕) 영직은 먼저 주난왕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그 후에 '서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5년후(249년) 진장양왕 영이인은 '동주'를 멸망시킨다; 그리하여 역사학자들이 다시 주장을 내세울 거리가 생긴 것이다.

 

진한(秦漢) 초기에는 '동주'시기를 '춘추'와 '전국'으로 나누지 않았다. 서한말기, 유향(劉向)은 <전국책(戰國策)>을 편찬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이 시기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비록 유향이 정확한 분계점을 제출하지는 않앗지만, <전국책>을 읽어본 사람이면 대체로 알 수 있다. 유향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공자(孔子)가 <춘추>를 정리편찬한 것을 근거로 한다. 그렇다면, "춘추", "전국"을 나누는 방법은 몇 가지나 될까. 도대에 어떻게 나누어야 할까?

 

첫째, 최초의 주장: 공자는 노국 사관의 왕실실록과 대사기를 근거로 편년사 <노국춘추>를 편찬정리해낸다. 맹자는 "춘추에는 의로운 전쟁은 없다(春秋無義戰)"이라는 말을 하여 처음으로 '춘추'라는 개념을 제출했다. 여기서 "춘추"가 가리키는 것은 기원전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의 241년간이다. 말할 것도 없이481년이후는 '전국'시대이다. 유향의 구분은 <노국춘추>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이 구분은 무단(武斷)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평왕의 재위기간과 주경왕의 재위기간을 억지로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경왕 39년(기원전481년)에서 진시황이 중국통일할 때까지(기원전221년)를 '전국'시대로 보았다. 그것은 비과학적이며 역사의 상규에도 맞지 않는다. 그저 성인의 말에 따른 것일 뿐이다.

 

둘째, 사마천의 <사기.육국년표>에서 인정한 전국시기는 현재 대다수의 사서에서 동의하는 구분이며 다음과 같다: 주원왕(周元王) 원년(기원전 475년)부터 진시황 26년(기원전 221년)까지 합계 254년이다. 사마천의 대체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주원왕 초기 동주(東周) 13국은 다시 "진월초연제진(秦越楚燕齊晋)"의 6국으로 재편된다; 주원왕4년, 월왕 구천은 660년간 존속하던 오국을 병합하고, 승세를 몰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회하(淮河)를 건너서, 제,초,진,진등의 나라와 서주회맹을 맺는다. 그리고 원하는대로 맹주가 된다. 주원왕은 구천의 맹주지위를 공손하게 인정한다. 구천은 비록 오랫동안 은인자중했지만, 일단 복수에 성공하고 다시 범려, 문종의 공로가 너무 높아서 군주로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을 꺼려서, 범려를 물러나게 하고, 문종은 자결하게 한다. 월나라의 국세는 이로써 급격히 쇠퇴한다. "춘추오패"는 금방 혼전에 빠져들고,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셋째,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본다. 전국시대는 주위열왕(周威烈王) 23년(기원전403년)부터 진시황26년(기원전221년)까지이다. 사마광이 이처럼 구분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453년,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晋)나라가, 한(韓), 조(趙), 위(魏)의 세 대가가 나누어 차지하게 된다. 그후 이 삼가(三家)는 다시 약속이나 한 듯이 주왕실에 그들의 제후국지위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범상작란(犯上作亂)에 대하여 주왕실은 뼛속까지 미워했고, 또한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정정왕(周定正王)과 주고왕(周考王)의 두 왕은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50년후, 주위열왕23년(기원전403년), 주위열왕은 더 이상 한,조,위 삼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여, 부득이 한,조,위 제후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조서를 반포한다. 만일 기원전453년 삼가분진을 표지로 삼는다면, '중국'은 정식으로 '춘추오패'의 시대와 작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해는 실제로 이미 '전국칠웅'으로 진입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사마광의 구분방법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칠웅'간의 전투는 확실히 기원전403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왕실의 권위는 더욱 쇠퇴하고, 제후국간의 전쟁이 빈발한 것을 표지로 하여 '춘추'와 '전국'을 나눈다면, 사마천의 견해가 더욱 이성적이다. 즉 기원전 720년에서 기원전 476년까지를 춘추시기로 하고, 기원전475년부터 기원전221년까지를 전국시기로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조소하거나 힐난할지 모르겠다. '춘추'와 '전국'을 어떻게 구분하든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굳이 옛 사람들이 남겨놓은 밥을 다시 꺼내서 떠든단 말인가. 기실, '춘추'와 '전국'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확실히 현대인들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우리가 관심가지고 걱정해야하는 것은 스모그(우마이)와 황사 그리고 수자원오염등 문제일 것이다. 다만, 필자가 이 이슈를 제기하는 것은 학술태도에 숨어있는 문제때문이다. 현대인의 학술태도가 바르지 못하고 객관적인 규율에 위배된다는 것과 크게 관련있기 때문이다.

 

송나라때의 사마광은 <사기>의 작자 사마천이후 가장 유명하고 가장 우수한 사학자이다. 그는 사마천이 전국시대에 대하여 인정한 것이 역사적사실에 부합하고, 쉽게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그는 왜 하필이면 다르게 역사를 나누었는가? 그 이유는 아마도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그의 사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표신입이(標新立異), 독수일치(獨樹一幟)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것이다. 그의 종사인 사마천과 다르기 위하여 그는 객관규율에 어긋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통규칙에 위반하는 '과속'이다. 아마도 확실히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느끼기로는 '벌점 + 감점"의 처벌을 받아야 할 일이다. 농교성졸(弄巧成拙). 잘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슴아픈 일은, 현재 각 학술분야에서, 마르크그수의 및 정치철학의 연구를 포함하여, 사마광보다 더욱 엉터리인 학자들이 이미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헛소리를 지껄여 대더라도, 그들의 거짓학술 내지 왜리사설(歪理邪說)은 월스트리트의 동우(銅牛)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들은 절대로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필자는 자주 생각해본다. 사마광에게서 현재까지 이미 9백여년이다. 이렇게 얼굴이 더욱 두꺼워지는 현상은 역사의 비극인가 아니면 현실의 비극인가. 만일 다윈의 진화론에서 답안을 찾을 수 없다면, 귀결은 결국 중국인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