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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강유는 어떤 점에서 제갈량만 못한가?

by 중은우시 2013. 6. 27.

글: 염호강(閻浩崗)

 

강유(姜維)는 제갈량이 고르고 고른 유일한 적전제자(嫡傳弟子)이다. 제갈량이 제자를 받으려는 마음은 삼고초려에서 나올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여러해가 지나도록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 마속(馬謖)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오만한 마속은 승상이 제자로 받아들이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핸다. 제갈량도 마속에 대하여 관찰자로서 시험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강유를 보자마자, 제갈량은 결정을 내려버린다. 강유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즉시 "나의 평생의 학문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강유는 당연히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생각해보라. 시골구석의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에게 북경대학의 교수가 너를 박사생으로 받아주겠다고 먼저 얘기한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겉으로 보기에, 제갈량의 이번 학생모집은 크게 성공을 거둔 것같다. 강유는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고, 포부도 있고, 품덕도 있고, 모략도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상승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강유는 문무를 겸비하였다는 점에서는 제갈량보다 낫다. 제갈량은 휠체어에 앉아서 지휘를 했고, 그 자신을 스스로 지킬 무공조차 없었다. 강유는 일찌기 친히 위나라의 장수인 곽준(郭準)을 사살한 바 있다.

 

그러나, 강유는 제갈량의 사후 9번이나 중원을 토벌하였으나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매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는 결국 촉한의 국력을 모두 소모하여, 촉한의 멸망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지우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가 매년 병력을 동원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삼국연의>의 내용에 따르면, 제갈량의 육출기산의 실패는 모두 우연한 요소때문이다; 사람을 잘못 썼거나, 양초가 제대로 조달되지 못했거나, 혹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강유의 구차벌위(九次伐魏)은 거의 승리할 희망이 없었고, 그다지 유리하게 전개되지도 못했다. 강유의 재능과 성적은 그의 스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강유와 제갈량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주로 아래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 그는 제갈량같은 경력과 인맥이 없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창업할 때 여러번 모셔서 중임을 맡긴 사람이다. 강유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투항해 온 사람이다. 유비의 사후 제갈량은 후주로부터 '상부'로 존경받고 권력이 조야에 미치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 강유는 비록 군권을 장악했지만, 정치적인 지위는 장완, 비위보다 낮았다. 한중에는 오의가 견제하고 있었다. 즉, 제갈량은 그를 유일한 후계자로 선발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그에게 자신의 군사기술(연노법)과 전법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원래의 지위를 누리게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도 제갈량과 같은 권세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여 강유가 정벌하러 나갈 때 견제하는 사람과 발목을 잡는 사람이 제갈량보다 더욱 많았다. 그는 원래 위나라장수이다. 촉한의 조정내부에서는 북방세력권이건 형주세력권이건, 익주세력권이 사람이건 모두 강유와 그다지 교분이 깊지 못했다. 그래서 강유가 가장 믿는 것은 마찬가지로 원래 위나라장수였으며 그보다 늦게 촉한에 투항해온 하후패(夏侯覇)였다. 그리고는 원래 촉한의 2,3류장수인 요화(廖化), 장익(張翼)과 장의(張嶷)였고, 그 자신이 새로 발탁한 장수인 장서(蔣舒)와 부첨(傅僉)이었다. 황군내의 소인 황호(黃皓)가 중간에서 방해하지만 그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둘째, 그의 출병은 제갈량이 원래 가졌던 이데올로기 합법성을 잃었다.

 

유비가 살아있을 때는 항상 "광부한실(匡扶漢室)"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는 촉한 조야의 공인된 이데올로기였고, 정신적인 응집력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자신의 정권에 정치적인 합법성도 부여했다. 유비의 사후,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명목으로 북벌을 진행한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소력이 있었다.

 

제갈량의 사후, 원래 위나라장수이던 강유가 다시 이 기치를 내건다면,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웃기고 황당한 일이 될 것이다. 강유가 위나라를 토벌하는 것은 기실 개인공명을 위한 것이다. <삼국지> 배송지 주석에 강유가 출병하기 전에 '공명을 세우기를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손성의 말을 인용하여 강유의 도덕에 의문을 표시했다: "강유는 위나라에 충성하여야 하나 촉나라로 투항해 와서 군주를 배신하고 이익을 취했으니 충이라 할 수 없고, 부모를 모른체하고 구차하게 살아남았으니 효라 할 수 없고, 원래의 나라인 위나라를 해쳤으니 이는 의라 할 수 없고, 패배하고도 순국하지 않았으니 절이라 할 수도 업속, 덕정을 베푼 것이 많지 않고, 백성들만 피곤하게 만들었으며, 축한의 전략을 그대로 승계하여 1주의 힘으로 대국과 이십여년간 싸웠으니 지용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여섯가지 중에서 강유는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도덕적으로 문제를 제기당하는 사람이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으니, 그의 호소력과 응집력은 분명 많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강유 자신의 능력에도 부족함이 있었다.

 

전략분야에서, 강유는 시대를 읽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피지기하지를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강하다고 여기고 적을 업수이 여겼다. 하후패는 그에게 위나라의 후기지수인 종회와 등애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얘기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손에 패배한다. 비위는 그에게 일깨워주면서 권유했다: 지피지기해야 백전백승할 수 있다. 제갈량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승상도 중원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우리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강족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부했고, 강족의 병사에 의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강족의 병사들에게 당한다.

 

전술분야에서, 그는 위나라군대와 싸우면서 가끔 이기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패배한 것이 승리한 것보다 많다. 촉장 장외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잃는다.

 

넷째, 군심과 민심을 잃다.

 

강유는 병력을 일으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패배하고 병사와 장수를 잃었으며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원래 인맥이 좋지 못했던 그는 더더욱 인심을 잃는다: 촉나라의 장병들중 전사한 사람이 많은데 잘못을 모두 강유에게 돌렸다." 제갈량의 육출기산에서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원망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었다.

 

다섯째, 성격상의 약점이 명확했다.

 

강유의 성격 및 일부문제에 대한 처리에도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화를 냈다. 제갈량이 기도할 때, 위언의 잘못으로 주등이 꺼지자, 그는 분노하여 위연을 죽이고자 했다. 이를 보면 그는 승상의 총애를 믿고, 경력이 그보다 오래되고, 지위도 그보다 높은 위연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잇다. 요화는 관우를 여러해 동안 따라다닌 노장이다. 강유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냉정하게 형세를 분석한다: "해마다 정벌에 나서니 군인과 백성이 편안히 지내지 못한다. 게다가 위나라장수 등애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장군이 억지로 일을 추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은 금옥양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유는 대노하여 '나를 거슬리는 자는 죽는다'고 협박한다.

 

그와 후주의 관계는 제갈량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제갈량은 후주에 대하여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강유는 일부 세부적인 점에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후주의 곁에 있는 황호가 중간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그는 몇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뛰어들어 후주에게 황호를 죽이라고 요구한다. 후주가 따르지 않자, 강유는 화를 내며 나가버린다. 비록 강유 본인은 반란의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런 행위는 후주의 마음 속에 어떻게 비추어 졌겠는가?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유는 사람됨이 음험했다. 후주가 투항한 후, 그는 거짓으로 종회에 투항한다. 그리고 종회에게 반란을 부추긴다. 종회의 수하장수들이 따르지 않을까 우려하여, 그는 종회에게 모조리 죽여버릴 것을 권한다.

 

결론적으로, 강유가 제갈량을 계승하면서 그의 잘못된 점을 계승했다. 그의 재능, 자질과 인맥, 기연이 모두 제갈량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은 촉한을 멸망으로 이끌는 가속기가 된다. 그가 종회에 투항하고 의탁한 것은 종회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유는 장재(將才)이지 수재(帥才)는 아니다. 제갈량은 그가 생각이 정밀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이다. 많은 <삼국>지 팬들은 위연을 숭상한다. 위연의 운명을 안타까워한다. 기실 위연의 재능과 성격상 약점은 강유와 일부 유사하다; 위연도 군구사령관은 지낼 수 있지만, 삼군총사령관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들 둘의 구별이라면, 그저 제갈량이 잘 보았는가 잘 보지 않았는가의 차이이다.

 

<삼국지>에서는 극정(郤正)이 강유를 위하여 변명해준다. 그는 관료로서 청렴했고, 사람됨이 엄격하며 조심스러웠다. 생활은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만족했기 때문이다. 욕심이 크지 않았다. 이 말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촉한의 국방부장관, 무장부대총사령관으로 여러해동안 있으면서, 자신을 위하여 수십채의 호화주택을 사두지도 않았고, 돈과 재물을 모으거나, 첩실을 거두지도 않았다. 집안에 시녀와 배우들을 기르지도 않았다. 옷도 좋은 것을 구해서 입지 않고 정부에서 나누어준 것을 입었다. 집을 나설 때도 좋은 가마나 수레를 타지 않고, 공금을 유용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보더라도 보기드문 좋은 간부이다. 그러나 나쁜 점이라면 개인야심에 있었다.

 

한 사람의 추구가 시세에 들어맞으면, 지신의 능력과 실제에 들어맞으면 그것은 웅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야심이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가 만일 백성의 이익을 해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극영웅이고, 만일 그저 개인야심을 위하고 백성의 사활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