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2010년 천카이거(陳凱歌)의 영화 <조씨고아>이후, TV드라마 <조씨고아안>이 CCTV 채널1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이 수수께끼의 역사가 관심의 촛점이 되었다. 기실, 소위 조씨고아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마천이 전국시대의 일부 전설에 근거하여 '창작'해낸 것이다.
<조씨고아>의 이야기기원
조씨고아는 역사상이 조무(趙武)이다. 조무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춘추오패중 진문공 중이는 알 것이다. 조무의 증조부인 조쇠는 진문공을 도와 국군으로 올린 중신이다. <사기>의 말에 따라 조쇠를 평가하면, "진문공이 나라로 돌아와서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쇠의 계책에 도움을 받은 바 크다." 그래서, 중이가 국군에 오른 후, 공로가 가장 큰 조쇠는 진나라의 경대부가 되고, 조당에서 진나라의 국정을 처리한다.
조쇠는 조순을 낳는다. 조순은 진양공이 죽은 후, 태자 이고를 국군으로 앉히니 그가 바로 진영공이다. 이 진영공은 역사상 유명한 폭군이다. 그는 잔인하고 살인을 좋아했다. 조순이 여러차례 간했으나 진영공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마음 속으로 조순을 겁내고 있었다. 그래서 암중으로 그를 제거하고자 한다.
이야기가 처음 문자로 기록된 것은 <좌전.선공이년>의 "진영공불군"이다. 진영공과 대신 조순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진영공은 자객을 보내어 조순을 암살하려 한다. 다행히 조순은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인간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미리 누군가가 알려준다. 조순은 그리하여 도망친다. 그러나 국경을 벗어나기도 전에, 진영공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조순의 동생 조천이 진영공을 죽이고 진양공의 동생 흑둔을 국군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진성공이다. 조순은 복직된다.
조순의 사후, 그의 아들 조삭이 작위를 승계한다. 진경공 3년, 조삭은 진나라의 대장군으로 병력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간다. 그리고 하상에서 초장왕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쟁으로 조삭은 진성공의 딸 조장희(趙莊姬)를 부인으로 삼는다.
<좌전.노성공8년>을 보면, 진나라가 조씨가족을 멸족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조장희는 조삭 및 그의 동생 조영과 삼각관계에 빠진다. 조씨가족이 나서서 간섭했고, 나중에 조장희가 진후에게 이를 고발하고, 조씨집안과 원한이 있는 대신이 기회를 잡아 개입하여, 조씨가족을 제거한다. 조삭의 아들 조무는 조장희가 궁안에 숨기고, 나중에 장성한 후 조정으로 돌아온다.
나중에 사학가 사마천의 <사기.진세가>는 기본적으로 <좌전>의 서술을 그대로 따른다. 다만, 또 다른 편인 <사기.조세가>에서 사마천은 근 천자에 걸친 글을 통해 전체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한다. 이것이 나중에 우리가 아는 <조씨고아>이야기의 기본 틀이다.
진경공때, '간신' 도안가는 충열명문 조씨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당초 진영공의 죽음을 조순과 관련있다고 하여, 병력을 이끌고 가서 멸문시킨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이미 임신하고 있던 조삭의 처 조장희였다. 도안가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 씨를 말리려고 한다. 장희는 조씨고아 조무를 낳은 후, 그를 치마이래 숨겨서 위기를 넘긴다.
나중에, 조삭의 문객인 공손저구와 정영은 고아를 구할 것을 상의한다. 정영은 사온 한 영아와 바꿔치기하고, 공손저구와 연기를 벌인다. 도안가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오자, 정영은 천금에 조씨고아를 매각할 것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도안가를 이끌고 산 속에 은거하고 있던 공손저구와 영아를 찾아내고, 두 사람은 피살된다.
정영은 조무를 데리고 멀리 타향으로 간다. 인욕부중하며 15년을 기다린다. 마침내 진경공이 조씨평반령(명예회복령을 내린다. 조무는 도안가를 죽이고, 조씨집안을 위하여 복수한다. 그러나 정영도 자살로 옛 친구에 보답한다.
그러나, <춘추>, <귝어>에도 조씨일족의 멸문에 관한 약간의 내용이 있다. 그러나 모두 "고아추살"이라는 얘기는 없다.
사마천이 쓴 "조씨고아"이야기의 연원에 대하여 어떤 사학가는 이렇게 분석한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대 사료를 조사했을 뿐아니라, 각 지방을 방문하고,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아마도 민간의 각종 전설을 짜집기한 것일 것이다.
사마천이 '조씨고아"이야기의 틀을 만든 후, 민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원나라때 기군상(紀君祥)이 쓴 <원보원조씨고아>(일명 <조씨고아대복수>)이다.
사마천의 이야기기초위에, 기군상은 몇 가지 극적인 내용을 추가했다. 첫째, 정영의 신분을 민간의생으로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가지고 조무와 바꾸어 호소력을 높였다. 둘째, 정영이 조무를 데리고 고의로 도안가에게 투항한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최초의 버전일 것이다. 셋째, 조무가 성장한 후, 정영은 연환화의 형식으로 사실을 조무에게 얘기한다. 그리하여 조무로 하여금 '대간신' 도안가를 죽이게 함으로써 피의 복수를 하게 하였다.
사마천의 기록과 역사의 편차
<사기.조세가>의 소위 "조씨고아"이야기는 허구의 성분이 아주 많다.
첫째, 소위 "조씨유복(趙氏遺腹)"의 사실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사기>에 조삭에 대한 글은 많지 않다. 다만 조순의 사후, 조삭은 그의 직위를 승계한다. 진경공3년, 조삭은 군총사령관의 신분으로 초나라와 전투를 벌인다. 그의 정치적 지위는 조동, 조괄, 조영 형제보다 여전히 높았다. 그후 사료에서는 조씨가족에 대한 기록에서 그의 소식이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같다. 그후, 조영과 조장희가 간통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간의 차이를 가지고 추리하면, 진경공 17년 조장희는 조삭의 유복자를 임신했을 가능성이 없다. 또 다른 <좌전>의 기록에 다르면, "육월, 진은 조동, 조괄을 토벌하고, 조무는 장희가 궁안에 숨겨두었다." <국어.진어구>에도 조무는 "장희가 궁에 숨겼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하궁지난(下宮之難)"시 조무는 나이가 어렸고, 모친을 다라 외삼촌(진경공)의 궁에서 살았다. 이렇게 말하면, "고아를 수색하고, 고아를 구한다"는 것 그리고 공손저구, 정영의 관련기록도 믿을만하지 못한다.
둘째, <사기.조세가>에 기록된 조씨가 멸족된 "하궁지난"으로 주살된 범위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도안가는 진영공피살사건을 추궁하기 위하여, "국군에 청하지도 않고 임의로 여러 장수들과 조씨를 하궁에서 공격하여, 조삭, 조동, 조괄, 조영을 죽이고 그의 일족을 멸족시켰다." 여기에서, 여기에는 군왕시해의 주범인 조천 및 같은 경대부인 조전(趙旃)가족은 언급이 없다. <진세가>, <좌전>에는 모두 당시 주살된 것은 조괄, 조동형제의 가족이라고 하였다. <좌전>에는 조영과 조장희가 간통했고, 노성공5년(기원전586년)에 죽었다고 한다. 조삭의 구체적인 사망연대는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조영은 조장희와 간통했다. 이는 당시에 이미 조삭이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하궁지난"의 발생시, 조영, 조삭 숙질이 모두 죽었다면, <조세가>의 기록은 헛점이 너무나 명백하다.
셋째, <사기>의 하궁지난 발생시기에 관한 기록(진경공 3년, 즉 기원전597년)은 서로 모순된다. 똑같은 사마천의 손으로 쓰여진 <진세가>, <사기십이제후연표>는 모두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에 발생했다고. <좌전>의 관련기롣도 이와 같다. 진경공3년이후의 많은 역사사건에 조씨는 많이 참여한다. 예를 들어, 진경공6년(기원전594년), "진후는 조동으로 하여금 적부(狄俘)를 주에 바치게 한." 노성공5년(기원전586년) 조영과 조장희가 간통하고, 조괄, 조동형제가 쫓겨난다; 진경공12년(기원전588년) 진나라는 육경을 두기 시작하고, 조괄, 조정이 모두 경이 된다. 이로써 추단하면, "하궁지난"은 진경공3년에 발생할 수가 없다.
넷째, 조무가 복위된 시간에 관하여. <조세가>, <한세가>는 모두 '하궁지난'이 진경공3년(기원전597년)에 발생했고, 15년이 지난 후 즉 진경공17년(기원전583년)에 조무가 복위되었다고 한다. 단, <춘추>, <좌전>, <진세가>는 이 기록과 완전히 다르다. <진세가> 진경공17년의 기록에 따르면, "조동, 조괄을 주살하고, 일족을 멸족시켰다. 한궐이 말하기를 '조쇠, 조순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어찌 후손을 멸족시키겠는가. 그리하여 조의 서자 무를 조의 후손으로 삼아서 그의 봉읍을 회복시켰다." <사기.십이제후연표>에 따르면, 진경공17년"조부의 봉읍을 회복시켰다." 이를 보면 조씨일족이 주살과 조부의 복위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주살된 사람은 확실히 조동, 조괄가족임을 알 수 있다. 진경공의 외조카인 조무는 모친과 함께 궁중에서 생활했다. 마치 이 일의 파급효과를 받지 않은 것같다.
이를 보면, 소위 조씨고아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후세 연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청나라학자 조익은 말한다: "도안가의 일은 황당무계하다. <사기> 여러 세가는 <좌전>, <국어>의 문장을 채택했다. 한가지 일에 두 가지 책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설을 취했다."
조씨멸족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좌전>에는 조씨가 멸족되었다고 적었다. 그 원인은 조장희와 조영의 간통때문이라고 한다. 조장희는 진후에 숨어들어갔고, 조씨는 멸족된다. 사마천은 한무제때 생활했다. 고후의 연고로, '위존자휘, 위현자휘, 위친자휘"의 원칙에 따라, <사기>의 모든 간통에 관한 사정은 일률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조세가의 이 이야기를 새로 쓰면서 "일가지언'이 되었다.
춘추시대는 중국역사상 사회대변혁, 대동란의 시대였다. 당시의 정치무대에는 주요 삼대세력이 있었다. 즉 주천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주왕실, 각국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공실과 각국내부의 경대부. 진나라에서 경대부와 진공실간의 갈등과 투쟁이 더욱 명백했다. 조씨가 멸족된 근본원인은 권력투쟁이다. 조씨가족이 장기간 나라의 조정을 장악하다보니 당연히 반발이 있고, 그의 일족이 멸족한 것은 진나라국군이 대권을 빼앗긴 국면을 끝내기 위해서 계속 노력한 결과이다. 근본목적은 당시 진나라의 정치국면을 고치고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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