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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곽씨일족(霍氏一族)은 왜 한선제에게 멸족당하는가?

by 중은우시 2013. 5. 19.

글: 왕전휘(王田暉) 

 

서한의 곽씨일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이 방대한 가족은 한무제, 한소제, 한선제의 3황제시기에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고, 온갖 영광을 누리다가, 최종적으로 멸족당했다.

 

곽씨일족의 성공은 한무제시기부터 시작한다. 한선제때 곽광(霍光)이 보정(輔政)을 하던 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곽거병(霍去病)은 한무제시기의 유명한 "전신(戰神)"이다. 그는 흉노와 싸우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대사마 표기장군이 된다. 그의 외삼촌은 바로 대사마 대장군 겸 부마인 위청(衛靑)이다. 이모는 한무제의 황후인 위자부(衛子夫)이다. 이때 곽씨집안의 실력은 이미 무시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위청, 곽거병 두 사람은 당시에 전공이 혁혁하며,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고, 관계가 아주 심후하며, 한무제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찌기 양사(養士), 결당(結黨)을 하지 않았다. 곽광은 곽거병의 동부이모의 이복동생이다. 형으로 인하여 그는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어 한무제의 신변보호를 책임진며, 역시 한무제의 신임을 받는다. 곽거병은 비록 전투에 능했지만 명운은 좋지 못했다.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요절해버린다. 그래서 곽거병이 일맥은 기본적으로 끊기게 된다.

 

"무제탁고(武帝托孤)"때부터, 곽광은 정치무대에서 활약을 시작한다. 한무제의 통치후기, 정치가 비교적 혼란스러웠다. 태자 유거(劉據)는 무고지란으로 죽임을 당하고, 한무제는 임종전에 유불릉(劉弗陵)을 태자에 앉힌다. 곽광은 한무제의 유조를 받아 대사마 대장군이 되어 유불릉의 보명대신(輔命大臣)이 되어, 거기장군 김일제(金日磾), 좌장군 상관걸(上官桀),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등과 공동으로 보정한다. 이때부터 한왕조 정치의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그후 곽씨가문의 발전은 대체로 두 단계로 나뉘어진다. 제1단계는 한소제시기이다. 한소제가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8살이었다. 정사의 결정권은 모조리 곽광이 수중에 떨어진다. 곽광은 계속하여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쓴다. 국내는 풍족하고, 경제는 장족의 발전을 거둔다. 그리고 연왕 유단(劉旦)의 반란도 분쇄한다. 한소제는 곽광에 의존하였을 뿐아니라, 신임했다. 이때 곽씨일족은 조정에서 관직에 있는 자들이 적지 않게 된다. 제2단계는 한소제가 죽은 후이다. 한소제는 후사가 없어서, 곽광은 먼저 한무제의 손자인 유하(劉賀)를 즉위시킨다. 그러나 황음무도하여 그를 폐출시키고, 유거의 손자인 유병이(劉病已)를 옹립하니 그가 한선제이다. 곽광은 여전히 대권을 장악한다. 작은 딸 곽성군(霍成君)은 황후가 되고 자손들도 모두 조정에서 관직을 갖는다. 곽씨집안의 풍광은 최고조에 달한다. 곽광이 죽은 후, 황상과 태후가 친히 그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3년만에 곽씨는 멸족당하고 만다.

 

반고는 이렇게 찬탄한 바 있다: "곽광은 강보에 쌓인 어린 황제를 보좌하라는 유지를 받은 후, 한황실을 위하여, 국가를 통치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며, 한소제를 옹립하고, 한선제를 세웠다. 주공, 아형(阿衡)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곽광은 주공단과 이윤에 비유했다. "곽광의 한황실 보좌는 충성스럽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그는 한황실에 충성했고,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 그리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사람을 잘 썼다. 그는 심모원려를 지닌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일족을 보호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의 집안 사람들은 여러번에 걸쳐서 왕조의 한계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척하거나, 심지어 내버려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전체 일족이 멸문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소위 왕조의 한계선은 도대체 무엇인가? 곽씨집안은 도대체 어떤 한계선에 도전했던 것일까?

 

첫째, 곽광이 대권을 장악한 후, 황권을 위태롭게 하였다. 곽광이 정권을 장악한 기간이 오래 되면서, 그의 친당을 조정에 많이 심어놓게 된다. 그리하여 조정의 문무대신은 곽씨 아니면 곽씨와 가까운 사람들만 남는다. 곽광 자신에게는 역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천하가 도대체 유씨의 것인가 곽씨의 것인가? 그래서 한선제는 곽광을 아주 꺼려한다. 매번 그가 조정에 들어와 배알할 때면, 한선제는 항상 '몸에 가시가 돋는 것같았다'. 표면적으로는 허심탄화하게 받아들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미 꺼려하게 된 것이다. 곽씨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아마도 이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둘째, 곽광의 처가 황후 허평군을 독살한다. 곽광의 일생에서 최대의 실패는 그런 여자를 부인으로 얻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악독함은 인류의 언어로 형용하기 이미 어려울 정도이다. 허평군은 한선제가 빈천할 때의 처이다. 그리고 한선제와 서로 사랑이 깊었다. 자신의 딸이 황후의 보좌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그녀는 의관을 매수하여 허황후가 임신했을 때 독수를 쓴다. 허황후는 황자 유석(劉奭)을 낳은 후 죽는다. 곽성군은 순조롭게 황후가 된다. 곽광이 이 일을 알고난 후 깜짝 놀란다. 그래서 처를 고발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곽씨가족이 전부 연루될 것을 우려하여 그만두게 된다. 곽광의 처는 여러번에 걸쳐 허황후가 낳은 태자를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한다.황후와 태자까지 죽이려 하다니, 곽씨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선제는 아주 총명했다. 이런 짓을 누가 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마음 속으로는 곽광의 처를 천도만과(千刀萬剐)해도 시원치 않겠지만, 곽씨의 세력을 꺼려하여, 곽성군을 총애하는 것같은 모습을 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셋째, 곽씨가족은 온갖 비위를 저지른다. 곽광이 죽은 후, 곽광의 처는 곽광의 능묘를 확장할 뿐아니라, 토목공사를 대거 벌인다. 그리고 나중에는 외간남자와 사통까지 하게 된다. 아들 곽산(霍山) 곽우(霍禹)는 모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곽운(霍雲)은 아프다는 핑계로 황제를 만나지도 않으며 사냥하고 놀러 다녔다. 그리고 집안의 가노 1명을 보내어 조회에 참석하게 한다. 비록 조정에서 아무도 그들을 질책할 수 없었지만, 이처럼 황권을 무시하다니, 황제는 물론이고 문무백관들마저도 의분을 품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득세가 빠르면 죽는 것도 빠르다. 하물며 곽씨집안의 큰나무인 곽광이 이미 쓰러지지 않았는가?

 

넷째, 정변을 일으켜, 모반을 꾀한다. 곽광이 죽은 후, 한선제는 이미 곽씨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허황후의 사인을 먼저 캐묻지 않고 먼저 일련의 인사변동을 한다. 그리하여 곽씨 심복들의 직위를 조정한다. 암중으로 그들의 실권을 박탈한다. 권한을 잃게 되자, 곽씨들은 위기감을 느낀다. 황상이 그들을 없애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손을 쓰기로 한다. 그리하여 승상 위상(魏相), 평은후 허광한(許廣漢)등을 불러오고, 다시 범명우, 등광한등에게 태후의 뜻이라고 지시하여 그들을 죽이게 한다. 그 후에 황제를 폐하고 곽우를 황제로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이 음모는 한선제에게 발각된다. 곽산, 곽운이 자살하였을 뿐아니라, 나머지 곽씨집안사람들도 모조리 참수한다. 곽씨와 관련이 있어 주살된 사람이 수천명에 달한다. 이때부터 한때 잘나갔던 곽씨집안은 조용히 사라진다.

 

불충이건 황후를 죽이고 태자를 죽이려 한 것이나, 모반이나 그 어느 하나만으로도 당시에 멸문을 당할 대죄이다. 모두 건드려서는 안되는 한계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곽씨집안사람들은 이 한계선을 무시했다. 그래서 수십년의 가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고, 천고의 악명을 얻게 된다. 이런 이치는 2천년후인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대단한 배경이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나대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하여 정치와 법률의 한계선을 건드리게 되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생활을 철저히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윗대 몇 대의 사람들이 쌓아올린 기업을 고스란히 잃게 되고, 자손후대의 앞날까지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런 원칙을 깊이 기억해야 한다: 얼마나 대단하든지간에, 절대로 정치와 법률의 한계선에 도전해서는 안된다. 사람으로서의 한계선에 도전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곽씨집안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