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와신상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중은우시 2013. 4. 13. 18:19

글: 유병광(劉秉光)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얘기하면, 습관적인 사고에 따라, 사람들은 월왕 구천을 떠올린다. 그리고 구천이 고생을 하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노력한 것을 생각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와신상담"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고 있다. 이를 통하여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분발하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나타낸다. 기실, 역사상 '와신상담' 사건은 정말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와신상담"은 춘추시대에 발생했어야 한다. 모든 춘추시대역사를 기록한 사료중 기술이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신뢰성있는 것은 당연히 <좌전>과 <국어>이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사서를 뒤적여보면, 사람이 실망하고 의문이 들게 만든다. <좌전>의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의 두부분이 있고, <국어>에는 "오어"와 "월어" 부분이 있다. 비록 모두 상세하게 월왕 구천의 평생사적을 적어놓고 있지만, 모두 "와신상담"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순한 한 마디 말도 적혀 있지 않다. 이처럼 약속이나 한 것같은 역사기록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든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와신상담"은 합성단어이다. "와신"과 "상담' 두 사건의 총칭이다. "상담"에 대하여 춘추의 사료는 완전히 공백이다. 한(漢)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최초의 기록이 나타난다. 서한의 사학자 사마천이 <월왕구천세가>를 쓸 때, 처음으로 월왕구천이 일찌기 "치담어좌(置膽於坐), 좌와즉앙담(坐臥卽仰膽), 음식역상담(飮食亦嘗膽)"(쓸개를 자리에 놓고, 앉거나 누웠을 때는 올려다보고, 음식을 먹을 때는 쓸개의 맛을 보았다)라는 내용을 <사기>에 적었다. 그러나 "와신"은 언급하지 않았다; 동한의 학자인 조엽은<오월춘추>에서 비록 구천이 "현담어호(懸膽於戶), 출입상지(出入嘗之)"(쓸개를 집에 걸어놓고, 들어가고 나오면서 이를 맛보았다)는 일을 기록했다. 그러나 "와신"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당송시대에 이르러, 일부 저술성의 문자에서, 비로소 월왕 구천이 일찌기 "침과상담(枕戈嘗膽)"(창을 베고, 쓸개를 맛보다)했다는 말이 나온다. 당나라때 대시인 두보는 <장유>라는 시에서 일찌기 "침과억구천(枕戈憶句踐)"이라는 구절이 있다. 북송의 학자 왕수(王洙)가 이 시를 주석하면서, 월왕구천은 "나갈 때는 쓸개를 맛보고, 누울 때는 창을 배게로 삼았다"고 하였다. 남송초기 이강(李鋼)은 <의국시>소에서 일찌기 구천이 "침과상담으로 그 뜻을 격려했다."고 하였다; <논사사찰자>에서는 또한 "구천은 침과상담하고 마침내 오나라에 갚아주었다."고 하였다. '과(戈)'는 고대시대의 일종의 병기이다. 비록 전설상의 장작은 아니지만. 이를 보면, 구천의 "와신상담"은 춘추에서 양한시대, 그리고 당송시대까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신"과 "상담"의 두 단어를 연결시며서 성어로 사용한 것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북송문호 소식(소동파)의 <의손권답조조서>에서이다. 소식은 손권이라는 삼국풍운인물에 대하여 존경해 마지 않앗다. 그 유희적인 서신체 글에서, 소식은 시대의 터널을 뛰어넘어, 대담하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손권의 말투로 이렇게 썼다: "....복수유이래(僕受遺以來), 와신상담(臥薪嘗膽), 도일월지유매(悼日月之逾邁), 이탄공명지불립(而嘆功名之不立), 상부선신미보지충(上負先臣未報之忠), 하첨백부지인지명(下忝伯符知人之明)." 손권이 '와신상담' 했는지는 <삼국지>, <한서>에 기록이 없다. 널리 알려진 <삼국연의> 소설에도 여하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를 보면, 손권의 "와신상담"은 순전히 소식의 허구와 두찬임을 알 수 있다.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월왕구천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식은 어쨌든 소식이다. 북송후기의 문단영수로서, 일대의 반세기동안 이름을 떨친 대문호로서, 그의 문장의 영향력은 거대하다. 그가 처음 만들어낸 "와신상담"이라는 글자는 널리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남송시기에 이르러, 증개(曾開), 진덕수(眞德秀)와 황진(黃震)등 애국관리, 학자는 남송의 반벽강산에 만족할 수 없다. 자주 월왕구천의 영웅사적을 추억하며, 그들의 주장, 저술에서 여러번 구천은 "좌신상담(坐薪嘗曇)" 혹은 "와신상담"이라고 썼다. 이것은 구천을 끄집어내어 말하는 것이다. 이는 측면으로 일관되게 유약하고 무능한 남송의 황제들에게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이와 동시에, 적지 않은 학자들은 전혀 상반된 견해를 제출했다. 남송학자 여조겸은 <좌씨전설>에서, 오왕 부차가 일찌기 "좌신상담"했다고 말했다. 명나라학자 장부가 <춘추열국전>을 썼을 때 또 말했다: "부차가 즉위하며 와신상담했다." 그후, 청나라때 역사학자인 마소는 <좌전사위>와 <강사>를 편찬할 때, 여전히 "와신상담"의 일을 오왕 부차에게 연결시켰다. 하나의 성어전고가 각각 동시대의 서로 경쟁했던 상대방에게 쓴 것이다. 이런 문자유형의 대결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와신상담'의 일을 월왕 구천에게 추가하고자 했다. 청나라초기의 대재자 오승권(吳乘權)은 <강감역지록>을 편찬할 때 이렇게 기록했다: "구천반국(句踐反國), 내고신초사(乃苦身焦思), 와신상담(臥薪嘗膽)." 포송령은 널리 알려진 대련(對聯)에서 명백히 써놓았다: "유지자(有志者), 사경성(事竟成), 파부침주(破釜沈舟), 백이진관종속초(百二秦官終屬楚); 고심인(苦心人), 천불부(天不負), 와신상담(臥薪嘗膽), 삼천월갑가탄오(三千越甲可呑吳)". 이렇게 그의 항우, 구천의 뛰어난 업적에 대한 무한한 감정을 표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여러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낙백하기 그지없는 자면(自勉)했다. 나중에, 건륭시기의 문학가인 채원방은 수정한 <동주열국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월왕구천)은 섶을 쌓아놓고 잠을 잤고, 침상과 요를 깔지 않았다; 그리고 쓸개를 앉고 자는 곳에 두고, 음식기거에 반드시 그 맛을 보았다." 이렇게 하여 월왕구천의 "와신상담"이야기는 갈수록 널리 알려지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와신"의 기록이 송나라때 가장 먼저 나타난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오기춘추>에 월왕구천이 "목와칙공지이료(目臥則攻之以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료"를 많이 쌓으면 "료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와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소위 "료"라는 것은 청나라때 학자 마서진이 일찌기 "쓴 야채"라고 해석한 바 있다. 그들은 월왕구천이 그때 밤낮으로 일하면서 눈이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을 때(목와), 쓰고 맛이 없는 요채('요신')으로 눈을 자극해서 잠을 쫓아냈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상담"은 미각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와신"은 시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와신"을 단단한 섶 위에서 잔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일종의 오해라는 것이다.

 

한나라때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상담"과 송나라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와신"은 역사상 실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잘못 전해진 것인가. 월왕구천은 일찌기 "침과상담"하였는가, 아니면 "와신상담"하였는가? "와신"은 잠을 자고 싶을 때, '쓴 야채'로 눈을 자극하는 것인가, 아니면 딱딱한 장작더미에 누워서 근골을 단련하는 것인가. 이들 문제를 분명히 하려면, 아마도 많이 힘들 것이다.

 

"와신상담"이라는 중국의 성어가 역대명인들에 의하여 각각 손권, 구천과 부차의 서로 다른 세 인물에게 붙여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대다수의 사람은 월왕 구천에게 붙였다. 이를 보면 사람들은 이 천년의 발전변화를 거쳐 좋은 뜻이고, 찬양하는 의미에 성공을 갈망하는 단어를 중시하고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실, 지금 보기에, "와신상담"이라는 성어가 도대체 확실한 역사적 전고가 있는지, 도대체 어느 역사인물에게 발생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미 보편적으로 한 사람, 한 민족, 한 국가가 낙후되기를 원치 않고, 자강불식하고, 힘을 내고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부흥을 도모하느 ㄴ내재적인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천년간 논쟁이 되고 심지어 오해된 성어이다. 그것은 중화민족에 남겨준 무궁한 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