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당태종 이세민은 626년에 즉위한 후 24년간 재위했다(627-649).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타천하(打天下)도 할 줄 알고, 치천하(治天下)도 할 줄아는 명군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두 형제를 죽이고, 부친을 퇴위시켰고, 여러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 당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일련의 전쟁에서, 그는 결정적인 작용을 한 군대총사령관이었다. 즉위후, 다시 일련의 개혁조치를 통하여, 역사상 유명한 '정관지치'를 실현했고, 향년 51세로 사망한다(598-649).
당태종은 봉건제왕중 아주 업적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별로였다. 그는 아들들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들이고,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살자조(殺子詔)까지 내렸다. 역사가들은 이런 궁중의 에피소드까지 적어놓았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여 봉건사회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당태종의 14아들은: 황후 장손씨가 항산왕 이승건(李承乾), 복왕 이태(李泰), 당고종 이치(李治)를 낳고, 양비는 오왕 이각(李恪), 촉왕 이음(李愔)을 낳았고; 음비는 서인 이우(李祐)를 낳았고; 연비는 월왕 이정(李貞), 강왕 이효(李囂)를 낳고; 위비는 기왕 이신(李愼)을 낳고; 양비는 조왕 이복(李福)을 낳고; 양씨는 조왕 이명(李明)을 낳고; 왕씨는 장왕 이운(李惲)을 낳고; 후궁궁녀가 초왕 이관(李寬), 대왕 이간(李簡)을 낳았다.
당태종의 큰아들은 승건전(承乾殿)에서 낳았기 때문에, "승건"으로 이름붙인다. 이는 황업을 계승하고, 건곤을 통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승건은 성격이 총명하고, 무덕3년, 항산왕(恒山王)에 봉해진다. 당태종이 즉위하자, 황태자가 된다. 당시 나이는 8살이었다. 생각지 못하게 성년이 되자 성색을 좋아하고 노는 것이 도를 넘었다. 그러나 그는 당태종이 두려워, 이중적인 생활을 한다. 당태종의 앞에서는 충효를 얘기하다가, 퇴조한 후에는 여러 소인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그는 족질(足疾)이 있어, 이로 인하여 폐위될까 우려하였다. 그는 당태종이 좋아하는 위왕 이태를 깊이 질투했다. 나중에, 이승건은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밀고하여, 하옥된 후에 서인으로 폐해진다. 검주로 유배를 간다. 이년후에 그곳에서 죽는다. 당태종은 이에 비추어 조서를 내린 바 있다: "이제 태자는 무도하고, 번왕중 이를 노리는 자가 있으니, 둘 다 버리기로 하고 영을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공문(空文)이었다.
둘째아들 초왕 이관은 숙부 초애왕 이지운에게 양자로 가나, 요절하고, 후손을 두지 못한다.
셋째아들 오왕 이각은 수양제의 딸인 음비 소생이다. 무덕3년, 촉왕에 봉해진다. 10년, 오왕으로 고쳐 봉해진다. 이각은 문무에 뛰어났고, 당태종이 자주 그가 자신을 닮았다고 말하고 그를 태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대신 장손무기(문덕황후의 오빠)의 반대에 부닥친다. 장손무기는 외조카 이승건, 이태도 모두 쫓겨나자, 또 다른 외조카인 아홉째아들 이치를 올리고자 했던 것이다. 나중에, 장손무기는 이치를 보좌하여 황위에 올린 후, '모반안'을 핑계로 이각을 죽여버린다. 중망을 얻고 있는 그를 죽이자 해내에는 모두 이를 원망한다. 이세민의 아들 중, 이각이 대신과 백성으로부터 가장 높은 신망을 얻고 있었으나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넷째아들 이태는 무덕3년, 의도왕에 봉해진다. 4년, 위왕(衛王)으로 고쳐 봉해지고, 정관2년, 월왕으로 고쳐 봉해지며, 양주대도독의 직위를 맡는다. 10년 다시 위왕(魏王)으로 고쳐 봉해지며, 태자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욕심낸다. 태자와 위왕은 각각 붕당을 만들어 서로 상대방에게 독수를 쓴다. 태자 이승건이 피살된 후, 이태도 유폐된다. 나중에 이태는 순양왕으로 고쳐 봉해지고 균주의 운향현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정관21년, 복왕(濮王)에 봉해진다. 35세때 죽는다. 당고종 영휘3년, 운향에서 사망하니 나이 35세이다.
다섯째아들 이우는 무덕8년, 의양왕에 봉해지고 그 해에 초왕으로 고쳐 봉해진다. 정관2년, 다시 연왕으로 고쳐 봉해진다. 10년, 제왕에 봉해진다. 그리고 제주도독을 받는다. 그는 하루종일 어린 깡패들과 어울리고 사냥을 좋아한다. 장사가 계속 권했으나 듣지 않는다. 당태종은 장사가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감히 직언을 간하는 권만기를 장사로 삼는다. 정관17년, 이우는 자객을 보내어 권만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 이우는 일이 실패하여, 내성에서 사사되고 서인으로 된다.
여섯째 아들 이음은 정관5년 양왕에 봉해진다. 10년, 촉왕으로 고쳐 봉해지고, 익주도독이 된다. 사냥을 심하게 하며 논밭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여러번 나쁜 짓을 많이 했던 방탕한 공자였다. 태종은 노하여 말한다: "금수라면 조련시키면 쓸 수 있고, 철석이라면 방원의 기기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음이는 금수나 철석만도 못하구나." 그리고 멱주자사로 강등된다. 당고종 영휘4년, 이음은 서인으로 폐해진다. 그리고 유배지인 파주에서 죽는다.
일곱째 아들 이운은 정관5년, 담왕에 봉해진다. 10년, 장왕으로 고쳐 봉해지고, 안주도독이 된다. 그는 마음대로 놀고 즐겨서 주현에서 힘들어했다. 당고종 상원원년, 이운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자, 그는 두려워 자살한다.
여덟째 아들 이정은 정관5년 한왕에 봉해지고, 10년 월왕으로 고쳐 봉해지며 양주도독이 된다. "문사를 널리 섭렵하여 관리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재주는 칭찬했으나 그의 덕행은 멸시했다. 나중에 한왕 이원가, 노왕 이영기, 곽왕 이원궤의 반무(무측천)이 실패하자 음독자살한다.
아홉째 아들 이치는 정관5년 진왕에 봉해진다. 그가 나중에 당고종이 된다. 비록 천자가 되었지만, 대권을 무측천에게 바친다. 나중에 이씨 종족은 무씨들에게 대거 살륙당한다. 당고종이 멍청한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열째 아들 이신은 정관5년, 신왕에 봉해지고, 10년 기왕에 고쳐 봉해진다. 비록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나, 아쉽게도 유약하고 무능한 겁쟁이였다. 월왕 이정이 무측천에 반란을 일으키자고 하자 그는 '동모'하지 않고자 한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래도 그를 죽여버린다.
열한째 아들, 이효는 정관5년 강왕에 봉해지고 6년에 사망한다.
열두째 아들, 이간은 정관5년 대왕에 봉해지고 그 해에 사망하고, 후손이 없다.
열셋째 아들 이복은 정관13년 조왕에 봉해지고, 18년 태주도독의 직위를 받는다. 비록 선종했지만 평범하고 무능했다.
열넷째 아들, 이명은 정관21년 조왕에 봉해지고, 태종말년, 서인과 공모하여 모반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검주에 유배를 가고 도독에 의하여 핍박받아 자결한다. 이는 확실히 당태종이 암시하거나 인가한 것이다.
총 14명 중에서 이복, 이치를 제외하고 나머지 12명이 모두 비명에 갔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세민의 14명의 아들은 불초자가 많았다. <구당서>의 작자는 태종의 여러 아들을 얘기하면서 탄식했다: "자제들을 번왕으로 삼는 것은 반석이 되어 성을 보호하라는 것인데, 교만하고 사치하면 실패하게 되고 이름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이세민의 후계자는 이 14명의 후보자 중에서 나와야 한다. 이는 봉건전제제도의 문제이다.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은 부친의 과실이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스승의 나태함이다. 이세민의 잘못인가, 사부의 잘못인가. 모두 아니다. 태종이 즉위한 초기, 궁중에서 친히 말을 타고 활을 잡으며 여러 아들을 교육시켰다. 이는 전통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자녀교육을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친히 태자를 위하여 학문이 뛰어난 우지녕, 공영달 등을 스승으로 삼는다. 그러나 일체의 조치는 모두 소용이 없어졌다. 그는 이를 위하여 깊이 고뇌했다. 그는 아들을 죽이는 조서를 내릴 때, 자신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위로는 황천에 부끄럽고, 아래로는 후토에 부끄럽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세민은 아마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이 모두 하나같이 타락의 길로 들어선 잘못은 모두 썩어빠진 봉건제도 때문이라는 것을.
봉건왕조하의 종법제도는 적장자승계의 방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것은 황위의 평화적인 과도를 보증할 수 없다. 황위를 엿보고, 권리를 쟁탈하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서로 죽이는 것은 많은 황실후손들이 비명에 죽은 중요한 원인이다. "교만사치"는 더더욱 이들의 타락을 부추기는 중요원인이었다. 봉건제도는 이들 '용종'의 특수한 지위를 규정했다. 이승건은 8살때 태자가 된다. 그는 동궁의 주인이 된 것이다. 동궁내에는 문실들이 그의 지시를 받는다. 무사는 그의 말을 따른다. 비빈은 그가 데리고 놀 수 있다. 한번은 그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자로 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 간언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 오백명을 죽이면 아마도 더 이상 간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봉건제왕들은 이런 특권으로 아들의 지위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가천하의 통치를 공고히 했고, 그 결과 원하던 바와 달라졌고, 오히려 반대로 가버린다. 이는 봉건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대한 당태종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세민의 딸의 역사기록은 아래와 같다:
태종 이세민은 모두 21명의 딸을 두었다.
양성공주, 소예에게 시집간다.
여남공주. 어려서 죽었다.
남평공주, 왕경직에 시집갔다가 나중에 유현의에게 개가한다.
수안공주, 두규에게 시집갔다가. 규가 죽자 왕대례에게 재가한다.
장락공주, 장손충에게 시집간다.
예장공주, 당의식에게 시집간다.
북경공주, 처음에 파릉에 봉해지고, 시령무에게 시집간다. 방유애와 모반을 꾀다하가 사사당한다.
보안공주, 사인표에게 시집간다.
동양공주, 고이행에게 시집간다.
임천공주, 위귀비 소생이다. 주도무에게 시집간다.
청하공주, 이름은 경이고, 자는 현덕이다. 정회량에게 시집간다.
난릉공주, 이름은 숙이고, 자는 여정이다. 두회철에게 시집간다.
진안공주, 위사안에게 시집간다. 다시 양인락에게 시집간다.
안강공주, 독고모에게 시집간다.
신흥공주, 장손희에게 시집간다.
성양공주, 두하에게 시집간다.
합포공주, 처음에 고양에 봉해지고, 방현령의 아들 방유애에게 시집간다.
금산공주, 요절한다.
진양공주, 자는 명달이고, 어릴 때 자는 시자(兕子)이며 문덕황후 소생이다.
상산공주, 시집가기 전에 현경때 죽엇다.
신성공주, 진양의 모친의 동생이다. 장손전에게 시집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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