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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1923년 임성(臨城)열차강도사건

by 중은우시 2013. 2. 15.

글: 장부걸(張溥杰)

 

1923년 5월 6일 새벽, 진포선(津浦線)의 상해에서 북경방향으로 질주하던 제2차특별쾌속열차는 강소(江蘇)를 빠져나와 산동(山東) 경내로 들어섰다. 사구(沙溝)역을 지나 임성(臨城)역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이때, 40명의 외국인승객과 200여명의 중국인승객이 강도들에게 납치된 것이다. 이것이 국내외를 깜짝 놀라게 한 임성열차납치강도사건(臨城大劫案)이다.

 

이 열차에 대하여는 명칭이 여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남강피(藍鋼皮)"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막 구입해왔고, 중국에서 최초로 외곽이 모두 철강으로 된 열차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를 "경호제1차쾌차(京滬第1次快車)"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이를 "세계연운객차제2차특별열차"라고 불렀다. 열차는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등석 차표는 북경, 남경, 상해 3곳을 오가는 중국의 일부관리와 외국인에게만 판매했다.

 

당시 열차에는 중요한 승객이 적지 않았다. 미국적십자회 간호사총대표, 프랑스 공사참찬, 미국 대통령고문이 있었고, 산동 황하궁가패둑 낙성식에 참가한 외국기자와 외국여행자 수십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신혼부인과 허니문을 보내는 멕시코인, 예쁜 비서를 대동한 이탈리아인도 있었다.

 

 

열차가 임성에서 개락 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사구산을 지나갈 때, 대부분의 여객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The China Weekly Review의 주필인 중국주재 미국인인 벤자민 파월은 패혜패(貝惠貝)라고 불리는 프랑스인과 얘기를 나누고있었다. 패혜패라는 프랑스인은 중국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파월에게 "우리는 이미 유명한 토비활동지역으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새벽2시경, 기관사가 어두운 밤에 미약한 달빛에 의지하여 앞에 검은 그림자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기적을 울렸으나 평상시처럼 비켜주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은 죽으려고 하는 자들 같았다. 그래서기관사는 급정거를 한다. 거대한 관성으로 열차는 바로 서지 못하고 약 수십장 앞에 이미 연결을 풀어놓은 철궤까지 갔고, 앞부분의 기관칸, 우편칸, 삼등객차는 궤도를 벗어나 전복된다. 곧이어 총소리가 들리면서 1000여명의 머리 뒤로 변발을 땋은 토비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열차위로 뛰어 올라가서 재물을 강탈하고, 승객을 납치했다.

 

미국기자인 파월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그는 돌연 급정거하는 소리를 듣는다. 대다수의 승객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는 창문을 통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산으로 둘러쌓였고, 검은 밤하늘뿐이고, 기차역도 아니었다. 돌연 총소리가 들이고, 토비들이 열차칸안으로 들어온 후, 모든 승객들은 하차했고, 자신의 짐을 모조리 빼앗긴다.

 

한 루마니아승객은 반항을 시도하다가 맞아죽는다. 그러나 북양정부의 해명에 따르면 맞아죽은 사람은 루마니아인이 아니고, 로스만이라고 부르는 영국인이라고 했다. 열차에서 내린 여객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파월과 그 프랑스인은 스스로 무기를 내놓았으므로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사건발생후 몇시간만에, 북양정부와 각국의 주중국대사관은 모두 중요한 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는 북양정부이건 각국주중국대사관이든 이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 토비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랐다. 어떤 열강은 이전에 산동에서 일어났던 의화단사건을 떠올리고 전율했다.

 

이틀후 세계의 각 주요매체는 이 폭탄같은 뉴스를 보도한다. 5월 7일, 8일 이틀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5국공사가 차례로 북양정부에 가장 엄중한 항의를 제기한다. 미국공사 슈르만은 아주 신속했다. 그날 저녁에 그는 제남으로 가서 추가로 상황파악을 한다.

 

그중 이탈리아공사가 가장 엉터리였다. 그는 임성사건을 빌어 중국관세, 철로, 군대, 교통등에 대하여 전면적인 위탁관리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일만 터지면 빠지지 않는 일본신문들도 고소해하는 투로 국제연합군을 조직하여 중국철로를 공동관리해야한다고 호소했다. 북경에 주재하는 미국의 군대에 직접행동을 요구하였고, 미국의 국방장관 데이비스는 심지어 공공연히 국무장관 쉬스에게 중국에 출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대통령 하딩은 냉정했다. 임성사건에서 각국열강들이 보인 반응에 중국민중이 분노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는 대통령이었다. 현재의 일본정부가 그의 반만큼만 되어도 괜찮을 것같다.

 

그러나, 자신의 노비정부에는 손을 써야 했다. 민중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지만, 나는 나의 노비를 괴롭히겠다. 내 노비로 하여금 다시 그 말안듣는 인민을 처리하게 하면 된다. 이것이 열강이 계속하여 사용한 기량이다. 5월 9일, 5국공사는 북양정부에 3일의 기한을 주고 납치된 외국인들을 모두 석방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24시간마다 배상금을 배로 늘이겠다고 했다. 아양을 떠는 것은 괜찮지만, 돈을 내라는 것은 곤란하다. 북양정부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하고 있던 큰일 작은일 모두 미뤄두고 외국인을 구출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약체정부의 전형이다. 외국주인의 안색이 변하면, 즉시 오줌을 질질 싸며, 자신의 국민을 어떻게 구할지는 자신들에게 관심있는 일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서방열강이 계속 압력을 가하고, 이 기회를 틈타서 주권을 침해하려는 일련의 조건이 나오자, 민족위기가 또 한번 초미의  급선무가 된다. 이처럼 대담무쌍하게 인질을 납치한 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정부군과 토비의 교전과정에서 토비로부터 전해진 서신에서 알게 되었다. 이때 막후의 두목은 손미요(孫美瑤)라는 자이다. 서신에서는 정부군에게 경고를 했다. 즉시 전투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하였다. 이 토비들은 일정한 모략을 지닌 것같다. 외국인의 목숨이 정부에서 볼 때 자신의 동포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서신은 효과를 즉시 발생시킨다. 정부군은 그날로 추격을 중지한다. 토비도 이 기회를 틈타서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포독고(抱犢崮)로 도망쳐 들어간다.

 

손미요는 성공한 후, 손계지(孫桂枝)의 아이디어에 따라, 먼저4명의 외국인여승객을 석방한다. 동시에 그녀들로 하여금 정부측에 3가지 조건을 전달하게 한다:

 

첫째, 신속히 산을 포위한 관병을 10마일 밖으로 철수시켜라.

둘째, 토비군을 여단으로 재편하고, 손미요를 여단장으로 삼아달라

셋째, 군수물자를 보충해달라. 

 

납치의 목적은 포독고의 포위를 푸는 것이고, 그들이 국군으로 재편되는 것이었다. 무슨 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 토비는 원래 양산박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정부당국과 맞서려는 것은 아니었고, 정부당국에 의하여 정규군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정부의 관직을 원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마누라 자식들과 편안히 살고싶어한 것이다.

 

북양정부와 납치토비간의 제1차 정식담판은 민국12년 5월 15일에 이루어진다. 담판장소는 석탄회사였다. 정부측은 산동독군 전중옥(田中玉)과 산동성장이 친히 나섰고 토비측 대표는 주천송(周天松)이었다. 토비측은 몇 가지 조건을 제기했다:

(1) 정부군은 포위를 풀고 원래의 방어지로 철수하라.

(2) 토비군을 여단으로 재편하고 손미요를 여단장으로 삼아달라.

(3) 군수물자를 보충해달라.

 

이들 조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에 석방되어 나온 4명의 여자인질들이 전달한 것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얼마후, 손미요는 마음이 바뀐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바로 손미요가 정부측에 더 양보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미요등이 제출한 조건이 갈수록 까다러와지면서 협상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한때 deadlock상태에 빠진다.

 

토비들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3명의 인질을 산꼭대기로 데려가서, 밧줄에 거꾸로 묶어서 괴롭혔다. 중국인질들은 대우에 차이가 많았다. 왜냐하면 중국인질은 이용가치가 없었으므로 쓰레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얼굴이 누렇게 뜨고, 갖은 학대를 당했다. 외국인인질은 그래도 언론자유가 있었고, 외부에서 전해오는 물품도 받았다.

 

그후 토비는 파월을 하산시켜 담판조건을 전달하게 한다. 그러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파월은 신용을 지켜 다시 토비소굴로 돌아간다. 5월 26일, 전중옥이 북경에서 되돌아오고 다시 파월에게 두 개의 비교적 양보된 조건을 가지고 하산하게 한다. 두개의 조건은: (1) 정부군이 포위를 풀고 철수할 것; (2) 2개여단까지 편성해줄 것 그러나 정부츠기 상응하게 제출한 두 개의 대응조건은 (1) 먼저 서방포로 2/3를 석방할 것; (2) 토비군을 편제하는 것은 총을 지닌 자에 한함.

 

담판은 다시 한번 deadlock에 빠진다. 그 이유는 토비와 정부가 서로 상대방을 못믿었기 때문이다. 정부측은 조건을 받아들여도 인질을 풀어주지 않을까봐 우려했고, 토비측은 사람을 풀어주고 나면 정부측이 안면을 바꿀까봐 우려했다. 쌍방이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 때 진조원(陳調元)이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일처리를 아주 원만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정부측에서는 이 사람을 산으로 보내어 손미요등과 담판하게 하고 결국 포위망을 푼다.

 

6월 2일, 진조원은 손미요를 데리고 하산한다. 정부측 대표인 정사기(鄭士琦)와 평화협정에 서명한다. 그날 손미요의 일당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사면을 받고, 군대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무기를 버리고 갈 수있도록 허락했고, 개인물품은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게 허락했다.

 

6월 12일, 마지막 외국인포로 8명이 전부 석방되고 13일에는 상해로 돌아간다. 국내외를 뒤흔들었던 임성열차강도납치사건은 이렇게 37일만에 끝이 난다.

 

손미요등은 원하는대로 정부군에 편제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을 길지 못했다. 손미요는 6개월단 여단장으로 지냈다. 그해 겨울 12월 19일, 막 부임한 연주진수사 장배영이 연 연회에 참석했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를 위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투항하여 정부의 관직을 받으면, 그때부터 당국을 위하여 견마지로를 다하려 하였겠지만, 당국에서는 너를 같은 편으로 봐주지 않은 것이다. 기회를 노려서 언젠가 너는 제거해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