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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일본정예부대 "관동군"은 어떻게 멸망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4. 30.

작자: 미상

 

1904년, 일본은 중국의 만주로 출병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1년여의 전투를 거쳐, 일본이 승리를 거둔다. 장기간 만주지역을 노리고 있던 일본은 남만철로(南滿鐵路)의 이익보호를 명목으로 소위 "만철수비대(滿鐵守備隊)"를 만든다. 그외에 남만주에 1개사단을 주둔시킨다. 이 두 병력의 인원은 개략 2만명이다. 그리고 관동총독이 지휘한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만주지역에 "관동주(關東州)"를 설치한다. 그래서 이 부대를 "관동군"이라고도 부른다. 이리하여, 관동군은 만주지역에서 40년에 걸쳐 각종 죄악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1919년, 관동군의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하여, 일본은 관동도독부를 취소하고, 권한이 비교적 적은 관동청(關東廳)을 설립한다. 그리고 관동도독부 육군부를 기초로 관동군사령부(關東軍司令部)를 건립한다. 이때부터 관동군은 직접 일본천황의 지위를 받고, 독립성이 크게 증가한다.

 

1931년 9얼 18일, 일본은 "9.18"사변을 발동한다. 칼을 갈고 있던 관동군은 이를 기화로 남만철도속지를 나와서, 하루만에 심양, 장춘, 요양등 도시를 점령한다. 이와 동시에, 광동군은 병력을 신속히 증가시키나. 1931년 관동군은 3개사단만 가지고 있었는데, 1932년에는 6개 사단으로 늘어난다. 1933-1936년에는 5개사단의 병력을 유지한다. 1937년에는 7개로 늘어난다. 1938년에는 9개사단이 되고, 1939년에는 11개사단, 1940년에는 12개 사단으로 늘어난다. 1941년 7,8월에 나치독일의 소련침공을 돕기 위하여 관동군은 연이어 소련을 목표로 한 군사연습을 조직하고, 다시 대량의 부대를 만주에 집결시킨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전에, 관동군의 병력은 이미 31개사단으로 늘어나고 병력수는 85만명으로 늘어났다. 백만대군이라고 불렀다.

 

독일의 소련침공이 실패하자, 일본은 약간 꺼려하게 된다. 감히 소련으로 진공하지는 못했다. 영국, 프랑스등 국가가 유럽의 전투에 신경쓰느라, 동쪽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일본인은 먼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관동군은 명을 받아 남하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한다. 이때부터 태평양전쟁이 개시된다. 다음 해 6월, 일본군은 미드웨이해전에서 참패하고는 전략적 진공을 중지하고 수비태세로 전환한다. 광동군도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지는 못했다. 1942년 하반기 일본 <육군종합작전방안>에서는 관동군에 대하여 "소련에 대한 전쟁을 방지하고, 북방의 안정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관동군의 역량은 계속 강화했다. 1942년 10월, 일본은 관동군사령부를 관동군총사령부로 승겨시킨다. 그리고 2개의 방면군사령부와 장갑군, 관동방위군사령부 및 제2항공군사령부를 증설한다.

 

1943년 하반기부터, 태평양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일본대본영은 계속하여 관동군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태평양전선으로 보낸다. 이 정예부대가 자신의 실패할 운명을 만회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1945년 1월, 대본영은 다시 관동군에서 13개사단과 특설한 고도로 기계호된 상비병단을 태평양전선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관동군은 태평양전쟁의 패국을 전환시키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그저 대미작전의 포회(砲灰)로 쓰인다. 4월초,미군은 오키나와섬을 점령한다. 그리고 일본본토에 대한 공습을 개시한다. 일본은 부득이 병력을 집중하여 본토결전을 준비한다. 다시 관동군에서 7개 사단을 차출하고, 관동군의 약 1/4의 전략물자 및 인원을 일본국내로 옮긴다.

 

1945년 5월초, 독일이 무조건항복한 후, 소련의 시선은 점차 극동지구로 옮겨간다.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만주의 각 항일무장세력은 계속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고 소멸시켰다. 관동군은 할 수 없이 다시 인원을 보충하여 전투에 대비한다. 관동군은 만주의 25만퇴역군인을 새로 소집하여 8개사단, 7개혼성여단, 1개의 탱크여단 및 5개의 포병연대을 증편하여 임시로 인원을 보충한다. 신속한 보충으로 관동군의 병력은 일거에 24개사단 약 70만명에 이른다. 광동군병력의 증가는 그저 표면적인 팽창이고, 무장장비와 전투자질은 이전의 8개반사단에 불과했다. 특히 일본의 각 전선에서 참패를 하면서 사기가 저하되고, 관동군의 예전 위풍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유럽전투가 끝난 후, 소련군은 인원을 빼서 관동군을 상대한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이때 소련군의 원수 바실레프스키가 지휘하는 150만병력은 이미 야간의 엄호를 이용하여 중소변경에 배치된다. 9일새벽, 소련군은 돌연 3개방향에서 동시에 일본군에 대한 강력한 기습작전을 벌인다. 날이 밝으며 소련군은 거의 모든 국경선을 넘어간다. 어얼구나강, 헤이룽강과 우수리강을 건너서 각각 바이칼호, 헤이룽강 연안 및 해안지구에서 중국만주경내로 진입한다. 5000킬로미터의 정면전선에서 강력한 공격을 벌인다. 9일 모택동 주석도 <일구(日寇)에 대한 최후 일전>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소련군의 진공행동에 협조한다.

 

비록 관동군은 일찌기 대소작전을 준비했고, 심지어 한때 소련과 결전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보엿지만, 다만, 관동군이 결전을 벌이려고 생각한 시각은 1946년이다. ㄹ소련군의 실력을 정찰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소련이 정식으로 대일선전포고한다는 소식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하에, 관동군이 정교하게 배치한 전선은 신속히 와해된다. 총사령부는 황급히 "신경(장춘)"을 포기하고, 통화를 고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만주국황제인 부의도 총사령부를 따라 통화로 데려가고자 한다. 통화일대에서 소련군과 일전을 벌이고자 한 것이다. 이때의 관동군 관병은 이미 투지를 완전히 잃었다. 그래서 속속 탈영했다. 원래 생각한 대결전은 죽어라 도망치는 추격게임이 되어 버렸다. 소련군의 각 방면군의 작전행동은 아주 순조로웠다. 특히 크라프첸고 대장이 지휘하는 근위탱크제6집단군이 다싱안링에서 벌인 기습행동은 큰 효과를 거둔다. 1주일도 되지 않아 만주의 중부지구까지 뚫고 들어와 기적을 이룬다. 관동군은 이때부터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8월 10일, 일본대본영은 명령을 내린다. 관동군은 만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만주를 포기하고 조선으로 퇴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일본의 정예부대로 자처하던 관동군은 자신의 "황군의 꽃"이라는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끝까지 항거하고 투항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억지로 체면을 살리려는 자세는 일본군의 사기를 다시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8월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는 공개적으로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교만한 관동군은 핑계를 대며 일본군대본영의 정전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여전히 저항한다. 17일이 되어 하이라얼, 후터우 및 동닝등 소수의 보루에서 잔여일본군이 완강하게 저항하는 외에, 관동군은 이미 저항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패전은 이미 확정되었다. 관동군이 마지막 총사령관인 야마타 오토조(山田乙三) 대장은 마침내 소련군에 정전협상을 요청한다.

 

8월 19일 정오, 소련군 의 아르제멘코 대령이 5명의 장교, 6명의 사병으로 된 사절단을 데리고 9대의 전투기의 호위하에 장춘공항으로 가서 일본군과 담판을 벌인다. 압력을 받아 야마다 오토조는 소련군대표에게 지휘권을 장싱하는 군도를 넘겨주고, 자신과 부하들이 소련군의 포로임을 선언한다. 이번 전투에서 관동군은 약 67.7만명의 손실을 입는데, 그중 8.3만명이 총을 맞고 전사했으며, 59.4만명이 투항하였다. 소련군의 피해는 3.2만명 전사였다.

 

이뿐아니라, 관동군으로 성공한 일본고급전범들도 정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찌기 관동군헌병사령관, 총참모장을 역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관동군 부참모장, 참모장을 역임한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일찌기 관동군 참모장을 지낸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 관동군사령부에서 일하다가 제7방면군총사령관이 된 도리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일찌기 관동군사령부에 근무하고 나중에 제14방면군 참모장이 된 무토 아키라(武藤章)는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외에 악명이 자자하고 악행을 수도 없이 저지른 관동군 장군들도 징벌을 받거나 천고의 악명을 뒤집어쓰고 구차하게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