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추수의거가 좌절된 후, 의거 참가인원들은 유양(瀏陽)의 문가(文家)시로 철수했다. 문가시에서 전선회의를 개최한다. 중공호남성위 전적위원회서기인 마오쩌둥이 제안한 장사(長沙)공격을 포기하고, 남으로 이전하여 적의 통치역량이 박약한 농촌, 산지로 가서 근거지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통과된다. 회의후 모택동은 이들을 이끌고 호남,강서의 경계지역으로 간다. 반년의 노력을 거쳐, 중국 최초의 농촌혁명근거지인 정강산(井岡山)근거지를 마련한다.
1928년 4월 중순, 주덕(朱德), 진의(陳毅)는 남창의거에서 남은 일부인원과 상남의거의 농민무장을 이끌고 정강산에 도착하여, 모택동이 이끄는 공농혁명군과 회합한다. 5월 4일, 중국공농홍군제4군(中國工農紅軍第四軍)이 성립을 선포한다. 그런데, 중국역사상 최초의 홍군을 왜 '홍사군'이라고 부른 것일까? '홍일군'이라고 부르지 않고.
에드가 스노우의 <서행만기(중국의 붉은 별)>에서 주덕과 인터뷰할 때, 주덕은 이렇게 말했다: "이 이름을 쓰게 된 이유는 국민당제4군(國民黨第四軍) "철군(鐵軍)"의 대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대혁명중에 우리 혁명의 보루였다."
그렇다면, 국민당제4군은 도대체 어떤 부대인가?
국민당제4군의 정확한 칭호는 국민혁명군제4군이다. 그 전신은 "광동군대건국월군제1사"이다. 국민혁명군의 창시부대중 하나이다. 1925년 7월, 광주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성립시키고, 광동각파군대를 국민혁명군으로 통일적으로 편제한다. 모두 8개군이었다. 그중 이제심(李濟深)이 사단장을 맡은 월군제1사는 국민혁명군제4군으로 확대개편된다. 이제심이 군장(軍長)을 맡고, 중공당원 요건오(廖建五)가 당대표를 맡는다. 이제심은 손중산 선생의 영향을 받아, 국공합작을 주장했고, 이로 인하여 사군의 각부대는 공산당원이 정치공작을 담당했다.
1925년, 국민혁명군제4군은 섭정(葉挺)독립단을 선봉으로 하여 호남으로 진격한다. 이로써 북벌전쟁의 서막이 열린다. 섭정독립단 및 그가 소재한 제4군의 전적이 탁월하였고, 오패부의 주력을 섬멸하였으므로 혁명세력을 호남호북지구까지 발전시킨다. 그리하여 '철군'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된다. 1927년 1월, 섭정독립단이 소재한 12사를 군으로 확대개편하여, 국민혁명군제4군이라 칭하며, 독립단은 사단으로 개편된다. '4.12'정변이후, 제3군은 동으로 장개석을 토벌하기 위하여 구강, 남창 일대까지 진격한다. 제4군은 원래 공산당원이 아주 많았으므로, 북벌도중 국민당은 분공(分共)을 실시하며, 일부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부대는 남창에서 남창의거를 일으킨다. 이리하여 공산당직속부대가 된다. 그후 제4군은 제19로군으로 발전하고, 12.8사변에서 저명항 항일부대가 된다. 그중 일부는 북벌때 광동에 남아서 수비하던 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항일전쟁이 정식으로 발발하고 나중에 항전후의 내전시기까지 유지되었다.
정강산회합후, 국민혁명군제4군의 '철군'이라는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공산당의 영도하에 성립한 최초의 신형인민군대를 '중국공농홍군제4군"이라 부른다.
기실, 홍군역사상 모택동, 주덕이 창건한 '홍사군'외에 2개의 '홍사군'이 더 있다. 하나는 1928년 6월 하룡이 상악서(湘鄂西)에 만든 '홍사군'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31년 1월 허계신이 군장인 홍일군과 채신희가 이끄는 홍15군이 합쳐서 '홍사군'으로 재편된다. 군장은 광계훈(나중에 서향전이 넘겨받음), 이것은 홍4방면군의 기초이다. 나중에 3개의 '홍사군'은 점차 홍군의 3대방면군으로 발전한다.
3개의 홍사군중 주덕, 모택동이 이끄는 홍사군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다. 1928년 5월에 성립되어 1932년말 편제가 취소될 때까지, 4년반동안 존속했다. 다음으로는 하룡이 이끄는 상악서근거지의 공농홍군제4군은 1928년 7월에 성립되어 1930년 7월 편제가 취소된다. 딱 2년간 존재했다. 가장 짧은 것은 악예환(鄂豫皖)홍사군은 1931년 1월에 성립되어, 같은 해 11월에 편제가 취소된다.
항전이 개시된 후, 남방8성을 지키며 유격전을 벌이던 홍군은 국민정부에 의하여 재편된다. 이 부대의 일부는 전 국군제4군에서 갈라져 나오고, 신부대의 군장이 옛날 제4군이 '철군'이라 불리던 시기의 제12사 독립단단장인 섭정이었다. 섭정은 개편후의 번호를 '홍4군'이라 하자고 제안한다.'철군' 제4군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발전시켜나가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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