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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경명루사건: 미군의 집단강간사건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유전(劉典) 

 

 

 

무한시(武漢市) 파양가(鄱陽街)에는 6층짜리 경명루(景明樓)가 있다. 이는 무한역사상 가장 중요한 외자건축설계기구인 영국계의 경명양행(景明洋行)이 스스로 설계하고 건축한 6층짜리 빌딩이다. 1917년에 건립되었다. 외형은 종(鐘)과 같고, 1층의 외벽은 모조리 긴 돌판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2층이상의 전벽은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후면은 송곳(錐)모양으로 전아하고, 기품있고, 특색이 있다. 이 근 100년된 건축은 풍진의 세례를 받았고, 중화민족의 말로 다할 수 없은 암흑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항전승리후, 경명루는 '아파트'가 되고, 그 안에는 영국인, 미국인, 유태인들이 모두 살았는데, 미국인이 가장 많았다. 미국공군의 임시초대소가 이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1948년 8월 7일, 바로 1946녀말에 발생한 심숭(沈崇)사건이 아직 가라앉기도 전에, 경명루의 5층에서는 "축수무회(祝壽舞會)"라는 명목으로 집단강간하는 사건이 몰래 벌어졌다.

 

차갑고 적막한 밤에 흐르는 것은 피해여성의 피눈물이었다. 이 사회에서 보여주는 것은 전체 민족의 비극이다.

 

비극이 발생하기 반달 전으로 돌아가보자. 이 비극의 편극 당시 모빌회사 한구(漢口)지점의 부총경리인 J. M. Lilleg은 경명루에 살고 있는 사람중 하나였다. 그는 곧 귀국할 예정이었고, 친구인 미군공군장교 조지 링컨은 그를 환송할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은 상의를 한 후, 새로운 무도회를 준비하여 중국을 떠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로 한다.

 

이전에, 한구 국민당정부는 이미 무도회개최를 금지시킨 바 있다. 그저 가청(歌廳)활동만 허용했다. 당시에 무도회를 잘 조직하면서 골치거리를 남기지 않으려면 무도회의 조직자는 관계, 수단, 담량과 경험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야 했고 그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곤란했다. 무도회의 수준을 보장하기 위하여 Lilleg과 조지는 이 분야의 고수를 찾았다. 바로 이번 사건의 감독이라 할 수 있는 서남빈 극라납목(西南賓 克羅納木)이다.

 

시남빈은 한구에 사는 필리핀교민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한구의 강한가청에서 악단의 리더였다. 여러번 무도회를 조직한 경험이 있다. 서남빈은 7월 4일 필리핀독립일을 경축한다는 명목으로 한구시 국민정부 사회과의 허가를 받아내고, 경명루에서 멀지 않은 승리가 덕명반점에서 무도회를 조직한다. 며칠 후, 다시 강한가청에서 또 한번의 무도회를 조직한다. 국민당의 금무령(禁舞令) 하에서 여전히 무도회를 계속 열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서남빈의 능력은 대단했던 것같다.

 

Lilleg과 조지는 서남빈을 찾아가서 무도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한다. 서남빈에게 악단과 중국여자들을 무도회에 참가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들 중국부녀들에게는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함께 춤추는 것이고 하나는 함께 잠자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남자는 참가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댓가로 Lilleg과 조지는 보수를 후하게 준다.

 

서남빈은 당시에 무도회를 제대로 열지 못한 적이 있어 빚을 지고 있었다. 마침 돈을 벌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시원시원하게 이들의 요구를 응락했다.

 

어디에 가서 중국여자를 찾아 릴렉과 조지의 요구를 맞추어 줄 것인가.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속이는 것. 서남빈은 당시에 먼저 자신의 중국애인 담벽진(潭碧珍), 필리핀국적의 악사인 크라츠 및 크라츠의 처이자 중국계 필리핀인인 장월명(章月明)과 상의한다. 그리고 서남빈, 크라츠 두 명이 악단을 조직하고, 담벽진과 장월명이 나서서 중국여자들을 초청하기로 한다.

 

그래서, 담벽진과 장월명 두 사람은 모 중국부호의 생일축하를 위하여 무도회를 개최한다고 하고, 다른 중국여자들을 초청한다. 장월명은 강한가청 차방의 우두머리인 양옥린(楊玉麟)을 찾아가고, 양옥린의 관계를 이용하여, 강한가청의 가녀(歌女) 사리(莎莉)등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통하여 사방으로 사람을 찾는다.

 

나중에 장월명은 다시 강한가청의 차방 유보산(劉寶山)에게 댄스파트너를 찾아달라고 한다. 이 관계를 이용하여 실업한 무녀인 조수영(曹秀英)을 찾아내고, 두터운 보수를 주고 그녀를 동원하여 중국여자들이 무도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조수영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을 보고는 아주 열심이었다. 그녀는 같은 집에 사는 장씨부인, 양씨부인등 10여명을 찾았을 뿐아니라, 자신의 딸까지도 참석시킨다.

 

담벽진도 자신의 관계를 이용하여 현지의 많은 고관가족과 귀부인들을 초청한다. 당시 무한시 참의회 의장인 장미천의 둘째부인과 모 행정수반의 부인 그리고 파공방에 거주하는 고씨부인, 송씨부인, 장씨부인등이 있었다. 이들 중국부녀들은 '함께 잔다'는 요구사항이 있다는 것은 아예 몰랐다. 그저 단순히 무도회에 가서 유행을 즐긴다는 기분으로 갔다.

 

8월 7일 당일은 토요일이었다. 릴렉과 조지등은 먼저 차량을 보내어 참가하는 중국여자들을 경명루로 모시고 왔다. 당시 경명루 5층의 무도회장에는 미군과 한구에 관광온 외국인 20여명이 이미 있었다. 그중에는 미군이 가장 많았다. 나머지는 한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영국인과 미국인이었다.

 

미국인은 모빌회사 한구지점의 부총경리인 릴렉, 직원인 육혜인(陸惠人), 불란극(佛蘭克), 사탑사박(史塔司博), 전도사인 하불로(何佛魯).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딜튼, 미국교민인 리치, 칼튼, 카알라일등이 있었고, 영국인으로는 전도사인 원광명, 강한관수상시찰 혁달생, 한구협화의원구호원 탕보생등이 있었다.

 

저녁 7시경, 무도회가 정시에 시작된다. 일시에 등이 비치고 웃고 얘기하는 소리가 넘쳤다. 분위기는 아주 활발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악곡이 빨라지면서, 술기운이 돌았고, 이들 외국인은 속속 추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강제로 댄스파트너에게 키스를 하고, 어떤 자는 손으로 몸을 더듬기도 했다. 이때 전등이 돌연 꺼지고, 어떤 서양인은 이 기회를 틈타 댄스파트너의 옷과 치마를 벗기고, 방안으로 안고 들어갔다. 부녀들은 놀라서 속속 길을 찾아 도망친다. 그러나 정상적인 엘리베이터는 이미 잠겨 있었다. 그래서 다른 출로를 찾았다 이렇게 하다보니 양이 호랑이 입으로 들어간 꼴이었다. 그리하여 일부 부녀만이 요행히 뒷쪽의 비상구로 도망칠 수있었고, 도망치지 못한 부녀들은 서양인들에게 유린당한다.

 

기나긴 밤에 얼마나 많은 죄악을 숨기고 있는지.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한 경명루사건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 12시경, 겨우겨우 도망쳐나온 가녀 교교(巧巧)는 아직 도망쳐나오지 못한 가녀 사리의 모친을 찾아서 함게 한구시경찰국에 신고한다. 한구시 보안경찰총대 분대장 방향(方向)은 신고를 받고 파양가를 관할하는 한구시경찰6분국에 통보한다. 분국의 순관 마보운(馬步雲)은 경찰을 데리고 정찰을 나간다.

 

마보운등이 경명루에 도착했으나 외국인들이 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여러번 윗사람들에게 연락한 다음에야 비로소 5층에 올라갈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8일 새벽 3시경이었다. 현장에 남아있던 릴렉과 조지는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고, 이곳에서 무도회를 열었다는 것조차 부인했고 오히려 누가 그들을 모함했는지 물었다.

 

조사는 아무런 직접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 마보운등은 할 수 없이 경찰국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한다. 이 분국의 국장인 진이앙은 초조해졌다. 이런 외국인관련사건은 민감하다. 하물며 미국군인이 관련되면 더욱 그렇다. 어찌 쉽게 조사하러 갈 수 있겠는가. 진이앙은 즉석에서 명을 내려 범연추, 사리, 웅걸을 불러 피해경위를 진술받고, 양옥기, 장월명등을 불러서 진술을 받은 후 가두어둔다. 그리고 진술서를 한구시경찰국장 임건붕에게 올려보낸다.

 

'우방'에 관련된 문제이다보니, 임건붕은 조용하게 이 일을 처리하고자 하낟. 형사과와 외사과에 지시하여 2명의 여자경찰을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게 한다. 수사보고서를 받고는 '피해' '윤간'등의 글자는 지워버린다. 이 모든 것은 극도의 보안 속에서 진행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러 갔던 경찰관 중에는 열혈자들이 있었다. 자신의 동포가 이렇게 능욕당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경찰국의 간부들은 명백히 흐지부지 일을 처리하려는 것을 보고는 분개한다. 그래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경명루에서 발생한 사건을 잘 아는 신문기자에게 얘기한다. 이 기자가 바로 <중국만보>의 기자인 양옥이다. 그리고 <중국만보>의 사장인 등계륭은 중통국 화중판사처의 비서이다. 이 신문은 주자 군통을 위하여 경찰의 문제점을 들추곤 했다. 한구경찰국은 군통의 세력범위에 속하니, 경명루의 뉴스는 당연히 이 신문에서 갈구하던 것이다.

 

과연, <중국만보>의 반응은 신속했다. 8월 8일 오후, 한구 <중국만보>는 <<경명대루"광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경명루사건을 폭로한다. 그리고 도미노처럼 경명루사건의 보도가 며칠동안 전국의 각 신문을 도배질한다.

 

매체의 보도로 경명루사건은 널리 알려지게 되고, 막을래야 막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각 대형신문은 사건의 진전을 계속 추적보도한다.

 

8월 11일, 삼십여명의 기자가 한구시경찰국국장 임건붕의 사무실에 모여, 사건의 전개소식을 취재했다. 임건붕은 짧은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도회는 사실이다. 강간도 가능성이 있다. 고위관리 부인이 참가하려면 남편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만일 여기에 소위 고위관리부인이 있다면 분명히 정식부인이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은 고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소송절차를 통해서 범인을 처벌할 수 없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했다: "이 사건은 신문이 떠드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다. 그중에는 반드시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려는 불온분자가 있고, 다른 사람을 중상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경찰에서의 취재과정에서 범죄자의 신분을 다시 확인할 때, 관련 외국국적인원의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진정한 주범인 릴렉과 필리핀 악사 시남빈는 8월 10일 이미 홍콩으로 도망을 쳤다.

 

릴렉이 도주한 후, 신문과 공중여론의 질책하에 내정부 경찰총서는 한구시경찰국을 대리하여 당당하게 말한 바 있다: "미국교포 릴렉이 규정에 따르지 않고 출국절차를 거치고 비행기를 타고 갔다. 이는 외국교민관리가 소홀한 것이므로 엄격히 조사하여 처벌해야 한다." 임건붕은 이렇게 변명한다: "본국은 각 부두에 외국교민등기소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당해 외국교민 릴렉이 8월 10일 새벽 본국에 등기신청하지않고 도망쳐서 강을 건너고 무창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갔다." 이러는 와중에 주범은 법밖으로 도망쳤고, 이제는 체포할래야 할 수가 없게 되엇다.

 

사건에 관련된 미군들은 더욱 복잡했다. 중화민국은 이전에 미국과 <재중국미군인원형사서건처리조례>를 체결하였는데, 거기에는 "미군인원이 중국경내에서 범한 형사사건은 미군군사법원 및 군사당국의 재판에 귀속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국방부도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재중국 미군고문단 관리가 형법에 저촉되면, 기소를 면제한다." 국민당 한구특별시 당부주임위원인 원옹은 이 사건에 관하여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식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면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 왜냐하면 더 추궁해 들어가면 미군공군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심숭사건에 관련된 미군사병은 본국으로 귀환조치하여 미국의 법원재판을 받는다. 이 사건에서의 조지도 그러했다. 심숭사건에서의 미군사병은 귀국후 엄격한 재판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지금의 자료를 보면 경명루사건은 미국에서 아무런 명향을 미치지 못했고, 이렇게 흐지부지된다.

 

피해자들도 협력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강간을 당한 일은 명예에 관련되었다. 비록 상호 일찌기 능욕을 당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저 치욕을 참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그래서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웟다.

 

여기에 당시 전쟁국면도 긴장되었다. 국민정부는 미군의 지원이 필요했다. "인소실대(因小失大, 작은 일 때문에 큰 것을 잃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부측에서는 이 사건의 조사에 계속하여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사건발생 3개월후, 한구지방법원은 이 사건을 심리한다. 검찰관 조능원은 12월 28일 기소하고, 서남빈, 장월명, 양옥린, 유보산, 고옥군, 장계빈과 유충천의 7명이 피고석에 앉는다. 그들이 공동으로 이익을 도모하여 양가부녀를 유인하여 간음하게 하였다는 죄목이다.

 

이렇게 하여 전국을 뒤흔든 경명루집단강간사건은 8개월을 끈다. 1949년 4월 1일 오후 2시 판결을 선고한다. 기괴한 것은 법관, 경찰관은 자리에 앉았지만, 피고석에는 한 명도 서 있지 않았다. 이미 주범도 없을 분아니라, 종범도 모두 풀려나 있었다. 한구지방법원의 검찰관은 '방해풍화사건(妨害風化事件)"의 죄명으로 기소하였고, 판결문은 아래와 같다:

 

"장월명, 양옥린, 유보산, 조수영, 장계빈등은 공도으로 영리목적으로, 양가부녀를 유인하여 타인과 간음하게 했다. 장월명, 양옥린은 각각 유기징역 3년에 처하고, 공민권리를 3년간 박탈한다; 유보산, 조수영, 장계빈은 각각 유기징역 1년에 처하고, 공민권리를 1년간 박탈한다. 피고 새랍분(시남빈의 가명), 유충천은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으므로, 체포한 후 별도로 처벌한다."

 

이렇게 경명루사건은 끝이 난다. 다만 판결이 선포되자 즉시 많은 민중들이 분개했다. 주범은 범의 심판을 벗어났고, 종범도 겨우 몇년간 감옥에 갇히면 끝이다. 이렇게 해서야 백성들의 분노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당시는 이미 인민해방군이 남하하여 무한이 곧 해방될 때였다. 국민당관리들은 산산히 흩어졌고, 인심은 황황했다. 소수의 신문들 <신호북일보>, <대강보>, <정풍보>, <정의보>가 판결을 보도한 외에 이 대형사건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경명루사건은 비록 심숭사건처럼 거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