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국선(楊國選)
모안룡은 모택동과 양개혜(楊開慧) 사이에 낳은 셋째 아들이다. 모안영과 모안청의 인생은 중국사람들이 대부분 잘 안다. 다만 모안룡의 생사는 지금까지 권위있는 결론이 없다.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올해 모택동탄신120주년활동 가운에, 마침내 수십년간의 "실종설", "생존설", "사망설"등의 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모택동은 모두 10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 양개혜가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즉 모안영(毛岸英), 모안청(毛岸靑)과 모안룡이다. 하자진(賀子珍)은 6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중 3명은 아들인다. 한 명은 행방불명인 모안홍(毛岸紅)(小毛), 한 명은 강서에서 출생해서 역시 행방불명이고, 하나는 소련에서 출생하여 10개월만에 요절한 요와(廖瓦)이다. 3명의 딸 중에 살아남은 것은 연안에서 추랭한 교교(嬌嬌)(李敏)이다. 다른 2명은 각각 복건과 귀주에서 출생한 딸들로 모두 행방불명이다. 그 다음은 강청(江靑)이 낳은 이눌(李訥)이다.
모택동의 10명의 자식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겨우 4명이다. 다만 신중국이 막 건국되고 모택동이 가장 아꼈던 장남 모안영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다. 최종적으로 모안청, 이민과 이눌이 남는다. 다만 그들의 일생도 전쟁의 유리걸식, 정치의 파란만장, 감정의 대비대통을 겪는다.
1. 모안룡 실종설
1930년, 양개혜가 처형된 후,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의 3형제는 당조의 안배하에 외할머니, 외숙모를 따라 상해로 간다. 숙부 모택민(毛澤民), 숙모 전희균(錢希鈞)의 곁에서 자란다. 모택민은 3형제를 상해 비밀당중앙기관 특과공작원인 동건오(董健吾)가 만든 대동유치원에서 산다.
1931년 여름, 비밀당조직이 파괴되고, 동건오의 신분이 폭로된다. 유치원의 업무인원은 체포되거나 숨어버린다. 아이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헤매게 된다.
모안영은 어린 동생을 업고, 둘째 동생의 손을 잡고, 3형제는 이때부터 길거리의 유랑아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모안영이 나중에 그 당시의 처참한 생활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빼고, 돈있는 사람의 양아들이 되는 것을 빼고는 다른 것은 모두 <삼모유랑기>에 나오는 삼모와 같았다. 수마로에서는, 바닥청소, 쓰레기통뒤지기, 전부 했다. 상해의 외백도교가 있는데, 황포거는 끄는데 힘이 든다. 나는 동생 안청과 함께 뒤에서 밀었다. 그러면 돈을 조금 주었다...."
하루는, 모안룡이 돌연 고열이 나고 설사를 했다. 모안영은 모안청을 데리고 구걸을 하러 나섰다. 돌아오니 모안룡이 보이지 않았다.
동건오는 사방으로 숨어다니면서, 모안영, 모안청이 길거리를 유랑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처인 정란방(鄭蘭芳)에게 사방으로 찾아보게 한다. 결국 두형제를 찾아내어 집안에서 기른다. 동건오의 장모는 모씨 두형제를 길러주는 것을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원망이나 싫은 눈치를 주었다. 반년후, 동건오는 두 형제를 전처인 황혜영(黃慧英)의 거처로 옮긴다. 이들은 자기 친구의 두 아들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양영복(楊永福), 하나는 양영수(楊永壽)라고 했다.
처음에 황혜영의 집에 갔을 때, 두 형제의 생활비는 당조직에서 월별로 제공했다. 그외에 동건오도 매월 황혜영에게 20위안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1933년초, 상해 당중앙기관이 강서 서금으로 옮겨가면서, 모안영, 모안청의 생활비공급이 중단된다. 이때 동건오는 이미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어진다. 당시 황혜영에게는 이미 4명의 아이가 있었다. 게다가 모씨형제까지 있으니 7식구가 모두 그녀의 장남 동재원(董載元)의 약간의 수입만으로 생활해야 했다. 궁박한 상황하에서, 황혜영은 모안영과 모안청에게도 돈을 벌어오게 시켰다. 그녀는 이웃의 담보로 신문을 발행하는 사장에게 약간의 보증금을 납입하고, 매일 각종 신문을 받아왔고, 모안영, 모안청에게 길거리에서 신문팔이를 하도록 시켰다.
하루는 밤에 정산을 하는데, 모안청은 신문을 팔고 받은 돈 중에 위조지폐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돈을 벌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다. 모안청은 황혜영에게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는다. 두끼의 밥을 이미 먹지 못했던 모안청은 그 가짜돈이 외국해군들에게 신문을 팔 때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가난 나머지 분필을 들고 길거리로 달려나가서, 전봇대에 "타도양인"이라는 4글자를 비뚤비뚤 쓴다. 이렇게 마음 속의 울분을 풀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홍두아삼(紅頭阿三)"(인도경찰)이 그 모습을 보고, 그의 귀싸대기를 날린다. 모안청은 머리가 아파서 깨지는 것같았다. 길바닥을 구르면서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나중에 도착한 모안영이 그를 업고 돌아갔다. 그러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병을 얻게 된다.
모안영, 모안청은 황혜영의 집에서 4년간 생활한다. 비록 아주 힘들고, 가슴아픈 일이 많았지만, 어쨌든 백색공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안영의 미망인 유송림(劉松林, 劉思齊)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우리가 결혼한 후, 모안영이 한번은 나를 데리고 서사(西四)의 승리영화관으로 가서 영화 <삼모유랑기>를 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그것을 보고 옛 생각이 났는지 아주 격동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의 사람이 모두 떠났는데, 그는 영화의 스토리에 푹 빠져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와 동생이 상해에서 유랑한 경력은 삼모와 아주 유사하다. 자신은 삼모와 비교하면, 자본가의 양자가 되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하지 않은 두 가지를 제외하면 삼모가 겪은 고난을 그는 모두 겪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상해에서 그 돌아보기 싫은 6년간의 유랑생활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그 영화를 보러 갔다. 내 생각에 이것은 그 개인의 특수한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생활에서 삼모유랑기는 대모, 이모는 괜찮았는데, 가장 어린 삼모가 실종되었다.
2. 모안룡 생존설
1931년, 상해지하당이 파괴되고, 대동유치원이 차압되면서, 모안영은 두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로 나가서 유랑하게 된다. 하루는 경찰의 추적을 받았고 모안룡은 실종된다.
나중에, 상해의 육백권(陸柏權)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부친은 바로 모택동의 셋째아들 모안룡이라고 주장했다.
육백권은 이렇게 말했다. 1935년 장정이전에, 모택동이 3개월간 실종되었따. 기실 모택동은 몰래 상해로 와서 "이찬각(李燦脚)"이라는 가명으로 비밀링 장정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당시 상해탄의 거물 황금영에게 돈을 빌린다. 황금영의 조건은 모택동의 아들 하나를 인질로 내놓으라는 것이고, 8살된 모안룡이 선택되어 나중에 이름을 육진발(陸進發)로 바꾼다.
다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1935년 1월, 홍군의 장정로상에 준의에서 준의회의를 개최하고, 모택동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한다. 모택동이 몰래 상해로 간 기록은 없다. 장정이전인 1934년, 모택동은 1월에 지도자 직위를 상실한다. 5월에 강서 남부로 조사를 떠나 회창에 거주한다. 당시 강서남부군구사령관인 공초가 그를 보러 갔는데, 술을 마신 후 모택동이 장탄식을 했다. "나는 혁명에 참가한 이래, 3번이나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고, 8번이나 엄중경고처분을 받았다. 이번에는 실패를 조성한 책임을 나에게 모조리 떠넘겼다. 현재는 우리 정강단 엣 동지들의 천하가 아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 9월에는 학질을 앓고, 영도에 칩거한다. 10월에 장정이 개시된다. 이 기간동안, 모택동은 비밀리에 상해로 가서 장정을 위한 자금을 모집할 기회가 없었다. 노택동이 장정의 자금을 모집했다는 사료기록도 없다.
해방후, 정부는 대거 모택동의 실종된 친척을 찾아나선다. 모택동의 처제인 하이(賀怡)는 모택동과 하자진의 사이에 낳은 모안홍을 찾으러 다니다가 강서에서 자동차사고를 당하여 불행히 사망한다. 일찌기 모안룡도 찾아다녔다. 여러가지 말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결과는 거두지 못한다.
다만, 육백권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부친은 일찌기 6번이나 북경으로 가서 신분을 드러냈다. 그리고 주은래가 사람을 보내어 접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당중앙이 모택동이 일찌기 "이찬각"이라는 가명을 써서 상해로 가서 장정자금모집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고 한다. 문혁후, 육진발은 반동분자로 몰렸다. 이때 그의 나이 84세였다.
1996년, 육진발의 장남 육백권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조상찾기여행에 나선다. 다만 2001년 상해당국에 의하여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다음 해에 석방된다. 그는 양모와 함께 북경으로 간다. 모두 그의 몸과 용모가 청년때의 모택동을 꼭 닮았다고 말한다. 비록 더 이상 그에게 강제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감시를 받는다. 육백권은 당국이 그의 부친과 그의 혈연감정을 거절하는 것은 말못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무친은 모택동이 황금영에게 인질로 보내면서 돈을 빌렸기 때문에, 모택동의 이미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조상찾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바램은 끝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외에, 또 하나의 다큐멘터리문학이 있다. <모택동의 아들: 모안룡>.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에서 생사불명인 모안룡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있다. 이 "모안룡"은 개명한 지방에서 양자로 받아들여지고, 강남항일부대에 참가했으며, 한국전쟁때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다. 일찌기 '모택동'이 입을 막았고, 그가 스스로를 '모안룡'이라고 승인하지 못하게 하였다...작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모안룡'을 만난 적이 있다고. 그리고 책의 앞부분에서 자신은 '충실하게' 그의 힘든 역정의 매 시간대의 곡성, 소성, 총성, 포성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모안영의 미망인인 유송림은 몇 페이지를 뒤적인 후 웃었다. "나도 어떤 소문들은 들어본 적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3. 모안룡 사망설
1931년 봄, 상해지하당이 심각하게 파괴되며, 삼형제는 상해의 길거리로 나선다. 어린 모안룡의 행방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였다. 일설에는 상해에서 실종되었으므로 사망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금 아마도 살아있을 것이다라는 것이고 다른 설에는 세균성 이질로 상해 광자의원(廣慈醫院), 즉 지금의 서금의원(瑞金醫院)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TV드라마 <모안영>의 상황은 마지막 주장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총고문 겸 총감제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원의 한 여성이 일찌기 모안영에게 동생이 독성이질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31년 5월말 혹은 6월초의 어느날 밤에, 모안룡이 돌연 병이 난다. 배탈설사, 고열, 보육원인 진봉영(陳鳳英)(일명 秦怡郡, 이구실 열사의 미망인)이 안고서 부근의 광자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 치료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그날 밤에 병사했다. 다음 날, 유치원에서 행정사무를 책임지난 요아부(姚亞夫)가 관을 사서 입관시켜 장례절차를 치른다.
다만 나중에, 소화(邵華)가 그 의원에 가서 모안룡의 병력을 찾아본 바 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2013년 12월 26일, 모택동탄신120주년때 중앙은 융중한 기념활동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6월 26일, 소산 모택동동지기념관의 특별전시구는 2년간의 조정을 거쳐, 정식으로 대외개방한다. 그리고 문화제, 사진 600여점을 전시한다. 그중에는 진귀한 문물로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 배후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모안룡에 대한 설명이 있다: 1931년초, 모안룡은 숙부 모택민의 안배하에 상해대동유치원에 들어간다. 얼마후 이질로 사망했다.
그러므로, 모안룡이 이질로 사망했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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